[include(틀:역대 가톨릭 교황)] ---- ||<-5><#806600> [[교황|[[파일:교황 문장.svg|height=40]] '''{{{#FFF 가톨릭 교회의 교황}}}''']] || ||<-5> [[파일:215_giulio_II.png|height=125]] || || 제215대 [[비오 3세]] || → ||<#806600> '''{{{#FFF 제216대 율리오 2세}}}''' || → || 제217대 [[레오 10세]] || ---- ||<-2> {{{#!wiki style="margin: -5px -10px; padding: 5px 10px; background-image: linear-gradient(to right, #D9A100, #EFBC00 20%, #EFBC00 80%, #D9A100);" '''{{{#670000 제216대 교황[br]{{{+1 율리오 2세}}}[br]Iulius II}}}'''}}} || ||<-2>{{{#!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external/farm1.staticflickr.com/525035475_45e3dc6673_o.jpg|width=100%]]}}}|| ||<-2> 율리오 2세, [[라파엘로 산치오]] 作 || || '''교황명''' || 율리오 2세 (Iulius II) || || '''본명''' || 줄리아노 델라 로베레[br](Giuliano della Rovere) || || '''출생지''' || [[제노바 공화국]] 알비솔라 || || '''사망지''' || [[교황령]] [[로마]] || || '''생몰년도''' || 1443년 [[12월 5일]] ~ 1513년 [[2월 21일]] (69세) || || '''재위기간''' || 1503년 [[11월 1일]] ~ 1513년 [[2월 21일]] || || '''문장''' ||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270px-C_o_a_popes_Della_Rovere.svg.png|width=100]] || || '''언어별[br]명칭''' || [[라틴어]]: Iulius II[br][[이탈리아어]]: Giulio II || [목차] [clearfix] == 개요 == [[가톨릭]] 교회의 제216대 [[교황]]. [[16세기]] 초, 이탈리아 [[도시국가]]들의 경쟁이 심화될 시기에 율리오 2세는 교황령의 영토 확장을 위해 '''[[전사]] 교황'''이라고 불릴 정도로 전쟁을 많이 일으킨 전쟁광이었다. 또한 [[로마]]의 개발과 예술가의 ~~강제 노동~~ [[후원]]에 심혈을 기울여 거대한 교회 건축인 [[성 베드로 성당]]과 위대한 천장화인 <[[천지창조]]> 등이 만들어지는 데 큰 역할을 한 것으로도 유명하다. == 생애 == 가난한 [[양치기]] 집안에서 태어났지만, [[추기경]]이었던 숙부의 도움으로 [[신부(종교)|신부]]가 되었으며, 숙부가 [[교황]] [[식스토 4세]]로 즉위하자 [[추기경]]으로 서임되었다. ~~[[인맥]] 교황~~ 자신이 직접 태어난 집안 자체는 몰락해서 가난해도, 원래 델라 로베레 가문이 명망 높고 강력한 로마 귀족 가문 중 하나였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이후 전임인 [[비오 3세]]가 재임 기간을 1개월도 못 채우고 사망하는 바람에 뒤이어 [[교황]]이 되었다.[* 일단 비오 3세는 재위기간이 1개월 미만이라는 데서 알 수 있듯 즉위할 때 이미 병이 깊은 몸이었기에 보르자 가문을 어떻게 할 수 있을 턱이 없었으며, 그래서였는지 [[체사레 보르자]]의 교회군 총사령관이라는 직위와 로마냐 공작이라는 직위를 그대로 인정해 주었다.] === 교황 즉위 이전 === [[교황]]이 되기 전 델라 로베레 [[추기경]]이던 시절에 정치적으로는 숙부덕을 보지 못하고 찬밥 신세였다고 한다. 숙부 [[식스토 4세]]는 자신의 누이의 아들들을 선호해서 고종사촌들이 잘나가는걸 지켜만 봐야 했다고... 역시 종조부가 교황 [[갈리스토 3세]]였던 로드리고 보르지아 [[추기경]]과 대립하는 사이였고, 교황 선출에서도 경쟁했다. 그러나 숙부 덕에 수입이 많은 [[교구]]와 직위를 차지하고 스페인 추기경들의 몰표를 받은 보르지아 추기경이 [[교황]] [[알렉산데르 6세]]가 되자 신변의 위협을 느껴 [[발루아 왕조]]가 통치하던 [[프랑스 왕국]]으로 도망갔고, 군사적 야망으로 가득찬 [[샤를 8세]]를 선동하여 [[교황령]]을 침공하도록 했다. 이후 [[알렉산데르 6세]]가 프랑스와 협상하고, 델라 로베레 [[추기경]]과도 화해의 제스처를 취하자 이를 받아들이지만, [[알렉산데르 6세]]가 사망하자 그의 아들 [[체사레 보르자]]로 대표되는 [[보르자 가문]]을 박살내는데 온 힘을 쏟아 결국 성공했다. === 1503년, 교황 즉위 이후 === [[교황]]이 된 이후에는 군사력을 통해 [[교황령]]의 확대를 꾀했고, 이에 '''전사 [[교황]]'''이라는 별명을 얻었다. 하지만 그 결과는, 결국 비극으로 끝나고 만다. 중세 이래 [[이탈리아 반도]]는 여러 [[도시국가]]들과 [[공국]]들로 나뉘어져 분쟁이 지속 중이었다. 그 와중에 1494년 프랑스가 이탈리아를 침공했고, 이에 [[합스부르크 가문]]의 [[오스트리아 대공국]], [[이베리아 반도]]의 [[아라곤 왕국]]이 프랑스를 저지하기 위해 이탈리아에 간섭하려고 했다. 율리오 2세는 이러한 혼란스러운 상황을 이용하여 이탈리아 반도에서 [[교황령]]의 영토 확대를 적극적으로 도모했다. 이 점은 전임 교황들도 마찬가지였지만 이전 교황들이 주로 [[돈]]을 이용한 비교적 온건(?)하고 소극적인 방식을 사용했다면 율리오 2세는 [[성직자]]라는 본분에 아랑곳하지 않고, '''직접 손에 피를 묻혀가며 적극적으로 전쟁을 일으켰다는 점이다.''' ==== 베네치아 공화국과의 캉브레 전쟁 ==== 먼저 [[교황령]]의 [[볼로냐]]를 선동해서 독립을 지원했던 [[베네치아 공화국]]에 격분하여 스스로 갑옷을 입고 말을 타며 전쟁에 참전했다. 이 결정을 모든 [[추기경]]들이 말렸으나, 율리오 2세의 고집을 막을 수는 없었다. 그리고 프랑스 왕국 및 [[아라곤 왕국]]과 함께 1509년에 '''캉브레 동맹'''을 결성하여 베네치아를 상대로 전쟁을 일으켰다. 전쟁에 앞서 [[세금]]을 내기를 거부하던 [[볼로냐]]와 [[베네치아]] 지도자들을 [[파문]]했는데, 그들은 >"교황님께서 우리의 복잡한 사법 체계를 잘 이해못하시네요 ㅋㅋㅋ" 라며 교황을 조롱하고 비아냥거렸지만 '전사 교황'에게 비참하게 패배한 이후, 스스로 헤진 옷을 입고 맨발로 기어 나오자 당시 관례대로 매를 몇대 때리는 시늉으로 관대하게 용서했다는 일화가 전해진다. 결국 율리오 2세는 캉브레 전쟁을 통해 볼로냐의 교황령 독립을 저지하고, 베네치아 공화국의 세력을 크게 약화시키는데 성공했다. ==== 프랑스와의 신성 동맹 전쟁 ==== 하지만 [[프랑스 국왕]] [[루이 12세]]와 분쟁이 생기게 되었고, 이에 1510년 캉브레 동맹을 해체시키고, 적이었던 베네치아 공화국, 그리고 [[카스티야 연합 왕국]] 및 [[아라곤 왕국]]과 '''신성 동맹'''을 맺고 프랑스를 상대로 전쟁을 일으켰다. 이 과정에서, 스페인의 이탈리아 남부 지배[* 1504년에 정복.]를 인정해야만 했고, 이에 따라 이탈리아 반도 내에서 스페인의 영향력이 급격히 커졌다.[* 이는 스페인 출신의 교황 [[알렉산데르 6세]]도 인정하지 않았던 것이다.] ==== 결과 ==== 율리오 2세는 캉브레 동맹 전쟁과 신성 동맹 전쟁을 연이어 치루며 [[적이 된 아군|어제의 친구를 오늘의 적]]으로, [[아군이 된 적|어제의 적을 오늘의 친구]]로 삼는 등 철저히 이해타산적인 모습을 보였으나 전쟁 중에 사망하고 말았다. 결국 전쟁은 전쟁 이전 상태로 되돌리기로 합의되면서 종전되었다.(...) 그리고 이탈리아 반도에서 프랑스의 영향력이 축소되었지만 율리오 2세가 끌어들인 스페인의 영향력이 이탈리아 북부에서 강해졌고, 결국 [[이탈리아 전쟁]]은 재개되었다. 그리고 이 이탈리아 전쟁의 와중인 1527년 신성 로마 황제이자 스페인의 왕이었던 [[카를 5세]]의 [[란츠크네히트]] 군대가 [[사코 디 로마|로마를 약탈]]하고 교황 [[클레멘스 7세]]를 포로로 잡았다. == 전략적인 한계 == 율리오 2세는 [[무력]]을 통해 이탈리아 반도에서 교황의 영향력을 확대하려고 했으나 이는 처음부터 한계를 가질 수 밖에 없었다. * 근본적으로 [[교황령]] 자체의 국력의 한계가 존재했기 때문이다. 전통적으로 그리고 당연히도 군사력이 미약하던 교황령은 [[성전#s-1|성전]](聖戰)을 명분으로 이탈리아 중 · 소 [[도시국가]]들의 군대를 빌리거나 [[용병]]을 고용하거나 했는데, 그런 군대들은 [[프랑스]]나 [[스페인]], [[신성 로마 제국]] 같은 강대국의 군대와는 도저히 상대가 되지 못했다. [[도시국가]] 수준의 이탈리아 국가들이 [[절대왕정|중앙집권화]]되기 시작한 큰 국가들에게 밀려나가는 시기에 율리오 2세는 잘못 싸웠던 것이다. * 또한 한 나라의 힘을 빌려 다른 나라를 공격하는 [[이이제이]](以夷制夷) 작전을 쓴 것은 좋았지만, 그 '''[[오랑캐]]''' 가운데 하나가 배신하고 자신을 공격할 때의 대비는 전혀 해놓지 않았던 것이 패인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런 면에서 보면, 오늘날에는 [[흑역사]] 취급을 받는 [[알렉산데르 6세]]를 비난할 수 없게 된다. 율리오 2세와는 달리 알렉산데르 6세는 아들 [[체사레 보르자]]와 협력하여 최대한 자주적으로 진행하려 했고 [[로마냐]] [[공국]]이라는 새로운 국가를 창건하여, '''오랑캐가 자신을 공격할 때의 대비'''를 착실히 해나가고 있었기 때문이다.] 사실 율리오 2세가 보여준 정치적 목적 자체는 결국 (평생의 정적이자 원수였던) [[알렉산데르 6세]]와 거의 일치했다고 볼 수 있다. 두 사람 모두 교황의 권위와 권력을 바탕으로 교황령의 확대를 시도했다. 문제는 '''[[종교]]적 권위만으로도''' 교황에게 강한 영향력이 보장되던 중세 교황권의 전성기가 지나가고, [[서유럽]] 각국들이 [[중앙집권제|중앙집권적]]인 영토형 대국으로 거듭나는 시대적 상황이었다는 점이다. 즉, 율리오 2세의 교황 국가 강화 확대 노력은 애초부터 시대 역행이었던 것이다. * 교황들은 [[고령]]에 즉위하는 경우가 대부분이기에 정복 전쟁을 장기간 지속할 수 없었으며, [[환갑]]의 나이에 즉위한 율리오 2세 자신도 여기서 예외가 아니었다.[* 간혹 예외가 나오기도 하는데, 율리오 2세의 후임 교황인 [[레오 10세]] 같은 경우, 38세에 즉위했다.] == 예술가 후원 == [[파일:external/www.cretesenesi.com/documento_(4).jpg]] {{{-1 [[라파엘로]]를 율리오 2세에게 소개하는 브라만테를 그린 그림.}}} [[미켈란젤로 부오나로티]]와 절친한 친구였으며, 그 밖에도 [[도나토 브라만테]]와 그의 제자인 [[라파엘로 산치오]]를 포함한 [[예술가]]들도 크게 후원하여 [[예술]]을 중흥시키기도 했다. [[라오콘]] 상을 사들인 것이 그의 재위 4년째인 1506년이었는데, 이때부터 교황들은 예술품을 본격적으로 수집하기 시작했고 이로 인해 1506년은 '''[[바티칸 미술관]]이 시작된 해'''로 역사에 기록되었다. 특히 숙부 [[식스토 4세]]가 지은 [[바티칸]]의 [[시스티나 경당]]에 [[미켈란젤로 부오나로티]]를 시켜 유명한 천정화인 '''<[[천지창조]]>'''를 그리게 했으며, 브라만테에게는 [[성 베드로 대성당]]의 재건축과 벨베데레 궁전(Cortile del Belvedere)[* [[사부아 공자 외젠]]의 소유였던 [[오스트리아]] [[빈(오스트리아)|빈]]의 [[벨베데레 궁전]]과는 다른 건물이다.]의 건축을, [[라파엘로 산치오]]에게는 '''<[[아테네 학당]]>''' 같은 벽화, 자신의 초상화, [[바티칸]]의 건축 일부를 비롯한 여러 가지 작업을 의뢰했다. 율리오 2세는 [[성 베드로 대성당]]을 신축하면서 그 중앙에 위치할 자신의 [[영묘]]에 쓸 조각상들을 [[미켈란젤로 부오나로티]]에게 의뢰했다. 그 조각상들이 바로 [[미켈란젤로 부오나로티]]의 대표작으로 일컬어지는 '''[[https://namu.wiki/jump/LO%2B3zyDz6EU1hDXdpYH2vlqS8B84WUPLFSWdDsnG0sisx9xLNtCI8OsgulBL9mqMLgXc80xO6eSR5dL8ZPblNefs0wH%2B1G9unKbnkZ3xWH8%3D|모세]] 상''', '''[[https://namu.wiki/jump/3BI2kZ1OcgjTZmH3OXorl73iHD0iUzHYiFJw8NcMnpe1C7UZ0MkXqE4MymNQkIQ2cLdJWz9K1G1z2gqjxCSsztRld4H6ScT0p0iH6nuT9vJyV0r1IHrq3qCLQacz8Imx%2Fa%2BCS2%2FxqcizxFLH%2BE2rfA%3D%3D|죽어가는 노예]] 상''', '''[[https://namu.wiki/jump/TpKFgT5KeOSDK3bzehBTWyKsm4KI6RQooG6ASpiCAo2fmvgCIkxUIRv6PAneW0Hz49OwPjkDXyGXoDVj8j%2FxmtiEqKOYNpSuNlKSL3P2C%2Bm1iUtyJnA92ps3KHDe%2FaC5Iq3GTrnQWV6e13VwxvtC3A%3D%3D|반항하는 노예]] 상'''들이다. 그러나 영묘 건설 계획은 흐지부지되었고, 대신 [[미켈란젤로 부오나로티]]에게 시스티나 성당의 천장화를 그리도록 강제했다. 미켈란젤로는 자신의 천직을 조각가로 생각했고 그전까지 [[프레스코]]화를 그려본 적이 없었기 때문에 강제로 천장화를 그리게 하는 것을 탐탁치 못하게 생각했으며, 율리오 2세가 전쟁 때문에 돈이 없어 미켈란젤로가 이미 구매한 [[영묘]] 조각에 쓸 대리석 대금을 지불하지 못한 적도 있어 미켈란젤로의 큰 불만을 샀다. 그래서 미켈란젤로는 반항하며 고향 [[피렌체]]로 도망갔다가 율리오 2세가 보낸 사람이 어르고 달래서 겨우겨우 ~~목에 밧줄이 묶인 채로~~ [[로마]]로 돌아가기도 했으며 천장화 작업의 중간 공개 문제를 두고 율리오 2세에게 대들었다가 빡친 교황에게 지팡이로 머리를 맞기도 했다. 당시 예술가의 낮은 지위를 생각하면 큰 벌을 받을만한 일이었지만, 율리오 2세는 미켈란젤로의 재능을 아껴서 벌하지는 않았다. 다만 이후에도 [[미켈란젤로 부오나로티]]와의 관계에 애증이 얽혔기 때문에 율리오 2세가 자주 바가지를 긁어댔다. 그러나 당시 율리오 2세의 입장에서도 고작 을에 불과했던 이 예술가가 어떤 무례한 행동을 해도 결국은 용서해주는 일을 반복했기에 그 역시 예술가의 지위를 향상시키는 데에 큰 역할을 한 셈이다. 영화 <고통과 환희>(The Agony and the Ecstasy, 1965)는 이런 미켈란젤로와 율리오 2세의 [[애증]] 관계에 집중한 영화이다.[* [[찰턴 헤스턴]]이 미켈란젤로 역을, [[렉스 해리슨]]이 율리오 2세 역을 맡았다.] == [[성 베드로 대성당]] 신축 == [[파일:external/www.wikigallery.org/painting1.jpg]] {{{-1 브라만테, 미켈란젤로, 라파엘로에게 [[바티칸]]과 [[성 베드로 대성당]] 건축을 주문하는 율리오 2세.[* 에밀 장 오라스 베르네, 1827년, 캔버스에 유채, 프랑스 파리 [[루브르 미술관]].][* 헌데 브라만테가 들고 있는 설계도는 브라만테가 죽은 이후 라파엘로가 만든 [[성 베드로 대성당]] 설계도로, 실제로 있었을 광경을 그린 것은 아니다.]}}} 율리오 2세는 옛 [[성 베드로 대성당]] 건축을 개축하는 선에서 끝내려고 하다가 계획이 마음에 안 든다며 폐기해 버리고는 아예 처음부터 훨씬 웅대한 건물을 새로 지으려고 했다. 이러한 큰 건축적인 야심은 여러 곳에서 도전받는 가톨릭의 위상을 [[고전]]에 기초한 [[르네상스]]적인 기념비적인 건축물을 통해 재정립하려고 했던 시대적인 요구에 따른 것이었다. 또한 15세기 초의 로마는 심각할 정도로 황폐화되어[* [[교황청]]이 프랑스 남부 [[아비뇽]]으로 이전하면서 [[로마]] 시의 인구가 격감하여 100,000명의 인구 중 20,000여 명으로 줄었고, 귀환 당시 건물 사이로 여우가 굴을 파고, 밤중엔 성벽 사이로 늑대가 출몰하며, 주요 건물들은 거의 허물어져간 상태였다고 한다.] 로마 전체를 새롭게 재개발하는 것이 교황청은 물론 로마 시의 숙원 사업이 되어 있었으며 새로운 성 베드로 대성당은 그 계획의 핵심이었다. 새 [[성 베드로 대성당]]의 초기 설계는 율리오 2세의 총애를 받던 건축가 [[도나토 브라만테]]가 맡았으며, 당초에는 율리오 2세의 영묘가 성당의 중앙에 자리잡을 예정이었으나 영묘는 흐지부지되었다. 브라만테의 설계에 따라 중앙부에 거대한 기둥벽(pier)들을 올리며 옛 성당은 필요한 만큼만 조금씩 철거하던 중 율리오 2세가 사망헸다. 율리오 2세가 죽자 노쇠한 브라만테는 다른 건축가들로 교체되었으며, 설계는 이후의 건축가인 [[라파엘로]][* 브라만테의 제자였다.] 등이 전면적으로 변경했다. 흔히 [[성 베드로 대성당]]의 건축비가 재정을 악화시켜 [[면벌부]]를 팔게 만들어 교회 분열을 불러오고, [[개신교]]를 탄생시킨 원흉이라고 알려져 있는데, 사실 이러한 것들은 후임 교황 [[레오 10세]]의 사치와 전쟁질로 인한 재정 파탄 문제가 더 컸다. == 평가 == [[르네상스]]라는 말을 학술 용어로 고착시킨 대학자 [[야코프 부르크하르트]]는 율리오 2세를 >'''[[교황령]]의 구세주''' 라고 평가했다. 그런데 부르크하르트는 대학자이긴 하지만 문화사 중에 [[미술사]] 전공으로, 주전공은 이탈리아 르네상스였으니 예술을 사랑하고 예술가들을 후원한 율리오 2세에게 좋은 평가를 할 수 밖에 없었다. 율리오 2세와 동시대 인물로 교황령 소속 관료로 근무한 적도 있는 역사가 프란체스코 구이차르디니는 율리오의 외교에 대해 다음과 같이 평가했다. >'''치명적인 동맹, 치명적인 무기.''' 애초에 16세기에는 [[프랑스]]나 [[신성 로마 제국]]은 거대화된 [[관료]] 국가가 되어서 이탈리아 중부의 손톱만한 영지의 국력인 교황령 자체로는 도저히 상대하거나 조종할 위치는 진작에 지나갔었다. 중세 교황권이 세속 군주보다 높았던 시절은 황제가 제국 내 정적들인 공작들의 반발을 이용하거나, 황제 가문인 호엔슈타우펜 왕가가 어이없게 남계가 단절되어 명맥이 끊겼을 때나 가능했다. 세속 군주들은 황제나 왕만 되었다 하면 신앙심이 줄어드는(?) 기적을 보여왔다. 사실 중세 초기엔 동로마 황제와 그의 대리인이었던 라벤나 총독에게 들볶였고 랑고바르드족이니, 고트족이니, 노르만족이니 하는 오랑캐(?)들도 이탈리아를 노렸기 때문에 세속적인 보호는 황제에게 더 의지하거나 영향력하에 놓인 기간이 길었다. 현재에 와선 개인의 정치적 능력을 제외하면 르네상스 시대 최악의 교황으로 비판받는 [[알렉산데르 6세]]보다 더 못한 평가를 내리는 자도 있다. 알렉산데르 6세가 개인적인 정욕과 공사 분간이 안 된 경우라면, 율리오 2세는 교황보다는 세속 군주나 장군이 더 어울릴 사람이라는 것이다. 또한 교황 역사상 [[레오 9세]]와 함께[* 11세기 초 [[교황]] 레오 9세가 스스로 토벌군을 이끌고 정벌하는 경우가 있었는데, 노르만인들이 이탈리아 남부를 침략해서였다... 그런데 [[노르만인]]들은 '''[[가톨릭]]으로 개종한 상태였다!''' 이탈리아 남부에 교황 소유의 장원이 많았기 때문이었는데 전투 결과 사로잡혔지만 융숭한(?) 대접을 받았다.] 스스로 갑옷을 입고 정벌에 나선 둘 뿐인 사례이다. 문제는 그것이 세금을 안내는 신자들을 상대로 했다는 점에서 비판의 대상이 되었다. 이에 온건한 가톨릭 인문주의자였던 [[에라스뮈스]]는 갑옷 입은 군인 교황이 천국에서 문전박대를 당했다는 익명의 비판극을 발표했고 사후에 에라스뮈스의 저작임이 드러나서 이 때문에 사후에 파문당했다. 더불어 기록까지 말살당했다.[* 생전에는 [[레오 10세]]와의 친분으로 교회에서 존경을 받았고, 그 덕분에 여러 이단 논쟁에서 면책을 받았었다.] [[종교 개혁]] 시기 [[개신교]] 진영에선 >'''전쟁에 미쳐서 피에 굶주린 [[흡혈귀]]''' 란 비판까지 받았다. [[니콜로 마키아벨리]]의《[[군주론]]》에서 말하는 군주 중 교황의 예시로 나왔다. == 대중매체에서 == * 영화 <고뇌와 환희>(The Agony and the Ecstasy, 1965)에서 [[렉스 해리슨]]에 의해 묘사되었다. [[미켈란젤로 부오나로티]]는 [[찰턴 헤스턴]]이 연기했다. * <[[락 오브 에이지]]>에서는 대전 상대로 등장하며, [[레오나르도 다 빈치]]가 고안한 [[수륙양용장갑차]]를 타고 등장한다. * <[[어쌔신 크리드: 브라더후드]]>에서는 언급만 되지만 소설에서는 직접 나오는데, [[보르자 가문]]에 맞서는 [[암살단]]의 협력자로 나온다. * 미국 드라마 [[더 보르지아]]에서도 등장한다. 배우는 콜름 피오. 교황으로 즉위하기 전의 이야기를 다루기 때문에 추기경으로서 나오며, 줄리아노 델라 로베레라는 본명으로 나온다. [각주] [[분류:이탈리아인 교황]][[분류:1443년 출생]][[분류:1513년 사망]][[분류:제노바 출신 인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