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clude(틀:역대 로마 집정관/4세기)] || '''이름''' ||율리우스 콘스탄티우스[br](Julius Constantius)|| || '''출생''' ||미상|| || '''사망''' ||337년 || || '''아버지''' ||[[콘스탄티우스 1세]]|| || '''어머니''' ||[[플라비아 막시미아나 테오도라]]|| || '''친형제''' ||[[플라비우스 달마티우스]], 한니발리아누스, 아나스타시아, [[플라비아 율리아 콘스탄티아]], 에우트로피아|| || '''이복형제''' ||[[콘스탄티누스 1세]]|| || '''배우자''' ||갈라, 바실리나|| || '''자녀''' ||[[콘스탄티우스 갈루스]], [[율리아누스]], 성명 미상의 아들, [[율리우스 콘스탄티우스의 딸|성명 미상의 딸]]|| [목차] [clearfix] == 개요 == [[로마 제국]] [[콘스탄티누스 왕조]]의 황족, [[집정관]]. == 생애 == 제1차 [[사두정치]] 시기 서방의 [[카이사르(칭호)|카이사르]](부황제)였던 [[콘스탄티우스 1세]]와 [[막시미아누스]]의 친딸 또는 양녀인 [[플라비아 막시미아나 테오도라]]의 아들이다. 형제자매로 [[플라비우스 달마티우스]], 한니발리아누스, 아나스타시아, [[플라비아 율리아 콘스탄티아]], 에우트로피아가 있었고, 이복형으로 [[콘스탄티누스 1세]]가 있었다. 그가 달마티우스보다 2년 후에 집정관이 되었기 때문에, 학계에서는 그가 달마티우스보다 어렸을 것이라고 추정한다. 콘스탄티우스 1세 사후 알려지지 않은 시기에 트리어의 황궁을 떠나 친형제들과 함께 갈리아 나르보넨시스 속주의 툴루즈에 살다가 [[에트루리아]] 지방 마사 베테르넨시스(오늘날 마사 마르티티마)에 거주헀다. 이 시기에 [[세베루스 왕조]]의 후손이며 오래된 이탈리아 귀족 가문인 풀비우스 일가의 후손인 갈라와 결혼해 325년 또는 326년에 [[콘스탄티우스 갈루스]]를 낳았고, 그 외에도 성명 미상의 아들과 [[율리우스 콘스탄티우스의 딸|성명 미상의 딸]]을 하나씩 낳았다. 그 후 [[코린토스]]로 이주해 325년 집정관을 역임한 율리우스 율리아누스의 딸 바실리나와 두번째로 결혼해 331년 [[율리아누스]]를 낳았다. 330년대 초반에 콘스탄티누스 1세의 부름을 받고 형제들과 함께 [[콘스탄티노폴리스]] 황궁으로 찾아갔다. 리바니우스에 따르면, 콘스탄티누스 1세는 자신의 이복형제들과 완벽한 조화를 이루며 살았다고 한다. 콘스탄티누스가 이복형제들을 불러들인 것은 후계자 선정 작업에서 그들의 도움이 절실하게 필요했기 때문이다. 그는 본래 [[미네르비나]] 사이에서 낳은 장자이자 군사적 역량이 탁월했던 [[크리스푸스]]를 317년에 [[카이사르(칭호)|카이사르]]에 선임해 후계자로 공인했지만, 326년 계모 [[플라비아 막시마 파우스타]]와 간통한 혐의로 긴급 체포한 후 정식 재판도 거치지 않은 채 처형했다. 이제 그에게 남은 자식은 파우스타 사이에서 낳은 [[콘스탄티누스 2세]], [[콘스탄티우스 2세]], [[콘스탄스]]였다. 콘스탄티누스는 이 세 자식에게 관할 구역을 각각 맡겨서 제국을 다스리게 하기로 했다. 문제는 콘스탄티누스의 세 아들은 10대 소년이었고 실무 경험이 부족해서 제국을 능수능란하게 이끌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는 것이었다. 따라서 이들이 성숙해질 때까지 보좌해주면서도 황위를 [[찬탈]]하려 들 위험이 적은 인재가 필요했다. 콘스탄티누스는 고심 끝에 이복형제들의 협조를 받기로 했다. 이에 따라 333년 플라비우스 달마티우스가 집정관에 선임되었고, 335년 율리우스 콘스탄티우스가 집정관에 선임되었다. 콘스탄티누스는 여기서 멈추지 않고 이복형제의 자식들, 즉 자신의 조카들을 황위에 앉히기로 했다. 335년 9월 18일, 콘스탄티누스는 재위 30주년 기념 행사를 개최하면서 대중 앞에 자신의 청사진을 발표했다. 세 아들 콘스탄티누스 2세, 콘스탄티우스 2세, 콘스탄스, 그리고 플라비우스 달마티우스의 장남 [[달마티우스]]를 카이사르로 삼고, 콘스탄티누스 2세는 트리어를 중심으로 갈리아, 브리타니아, 히스파니아 속주를 관장하고, 콘스탄티우스 2세는 안티오키아를 비롯한 동방 속주를 관장하며, 콘스탄스는 로마를 중심으로 이탈리아, 아프리카 속주를 관장하고, 달마티우스는 다뉴브 전선을 맡게 했다. 또한 플라비우스 달마티우스의 차남 [[한니발리아누스]]를 'rex regum et gentium Ponticarum(폰토스인의 [[왕중왕]])'으로 삼았다. [[에우세비우스]]의 <콘스탄티누스의 생애>에 따르면, 콘스탄티누스는 재위 30주년 기념식을 치른 직후 둘째 아들 콘스탄티우스 2세와 [[율리우스 콘스탄티우스의 딸]]을 결혼시켰다고 한다. 이 딸의 이름은 기록상에 전혀 알려지지 않았는데, 일부 학자들은 [[로마식 작명법]]에 의거해 '율리아 콘스탄티아'였을 가능성이 있다고 추정한다. 한편, 일부 학자들은 피케눔 총독을 맡던 유스티우스와 결혼하여 [[발렌티니아누스 1세]]의 황후이자 [[발렌티니아누스 2세]]의 황태후가 될 [[유스티나]]를 낳은 여인이 율리우스 콘스탄티우스의 또다른 딸이라고 추정한다. 이렇듯 콘스탄티누스 1세의 우대를 받으면서 앞날이 평탄할 듯했지만, 337년 5월 22일 콘스탄티누스 1세가 붕어한 뒤 그 해 여름에 거행된 장례식에 참석하고자 콘스탄티노폴리스에 들어갔다가 콘스탄티우스 2세의 사주를 받은 것으로 추정되는 장병들에 의해 형제 플라비우스 달마티우스, 조카 [[달마티우스]], [[한니발리아누스]], 아내 바실리나, 성명 미상의 아들과 함께 피살당했다.([[337년 콘스탄티누스 황족 학살 사건]]) 두 아들 콘스탄티우스 갈루스와 율리아누스는 목숨은 건졌지만 니코메디아로 이송되어 6년간 유폐생활을 하다가 342년 카파도키아의 마르켈룸에 유폐되어 바깥 출입이 금지된 채 힘겹게 살아가야 했다. 그러다 350년 [[마그넨티우스]]의 반란을 진압하는 동안 제국 동방을 책임질 황족이 필요했던 콘스탄티우스 2세에 의해 석방되었다. 콘스탄티우스 2세와 결혼했던 그의 딸이 어찌 되었는지는 기록이 미비해 알 수 없다. [[분류:로마 황족]][[분류:4세기 집정관]][[분류:로마 제국 집정관]][[분류:337년 사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