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clude(틀:송서)] [include(틀:남사)] ||<-2> '''건안충후(建安忠侯)[br]{{{+1 殷孝祖 | 은효조}}}''' || || '''시호''' ||충(忠) || || '''작위''' ||자귀현후(秭歸縣侯) → 건안현후(建安縣侯) || || '''성''' ||은(殷) || || '''이름''' ||효조(孝祖) || || '''생몰''' ||415년 ~ 466년 4월 3일 || || '''출신''' ||진군(陳郡) 장평현(長平縣) || [목차] [clearfix] == 개요 == [[송(남조)|유송]]의 장수이다. == 생애 == 진군 장평현 출신으로 동진의 광록훈 은선의 증손이었다. 은효조는 젊은 시절에 방종하고 구애되지 않았으며, 주색을 좋아했고 기백과 재간이 있었다. 원가(元嘉) 연간 말에 봉조청(奉朝請), 원외산기시랑(員外散騎侍郞)이 되었다. [[효무제(유송)|효무제]]는 은효조에게 군사적 재능이 있다고 여겨 분무장군(奮武將軍), 제북군(濟北郡) 태수로 제수하했고, 은효조는 뒤에 입조하여 적사장군(積射將軍)이 되었다. 대명(大明) 연간[* 457년~464년] 초에 [[북위]]가 청주(靑州)를 침공하자, 효무제는 은효조를 파견하여 청주 자사 [[안사백]]의 절도를 받도록 했다. 은효조는 여러 차례 북위군과 전투를 벌여 북위군을 대파했다. 은효조는 조정으로 돌아와 태자여분중랑장(太子旅賁中郞將)으로 제수되고 용양장군(龍驤將軍)이 더해졌다. 뒤에 경릉왕(竟陵王) [[유탄(유송)|유탄]](劉誕)이 광릉(廣陵)을 점거하여 역모를 일으키자, 은효조는 심경지(沈慶之)에게 소속되어 유탄을 평정하고 다시 전공을 세웠으며, 무군장군(撫軍將軍) 서양왕(西陽王) 유자상(劉子尙)의 참군, 영삭장군(寧朔將軍), 남제음군(南濟陰郡) 태수로 옮겼다. 은효조는 다시 우이군(盱眙郡) 태수로 전출되었고 영삭장군을 그대로 받았다. 조정으로 돌아와서 호분중랑장(虎賁中郞將)이 되었고, 영삭장군, 양평동평2군(陽平東平二郡) 태수로 제수되었다가 다시 제남군(濟南郡), 남군(南郡)의 태수로 옮기고 영삭장군을 그대로 받았다. 464년, 효무제가 죽고 효무제의 태자인 유자업이 즉위하니 이가 [[전폐제(유송)|전폐제]]이다. 은효조는 465년에 독연주제군사(督兗州諸軍事), 연주 자사가 되었다. 같은 해에 상동왕 유욱이 유자업을 폐위하고 제위에 오르니, 이가 [[명제(유송)|명제]]이다. 명제가 즉위할 때 유송 각지에서 반란이 일어났는데, 은효조의 사위인 사도(司徒) 참군 순승소(荀僧韶)가 명제에게 은효조를 불러 입조하도록 건의했고 명제는 순승소를 은효조에게 파견하였다. 당시 서주(徐州) 자사 설안도(薛安都)가 설삭아(薛索兒) 등을 파견하여 나루터로 통하는 모든 길을 차단했기에 갈승소는 지름길을 통해 은효조에게 도착하여 은효조를 설득했다. 은효조는 순승소에게 조정의 소식을 자세히 물었고 순승소는 임의로 대답하며 조정의 군대는 강하고 명제가 은효조를 선봉으로 임명하고자 한다는 이야기까지 했다. 은효조는 바로 그날 처자를 남기고 2천 명의 수하들을 이끌고 갈승소를 따라 수도로 돌아왔다. 당시 조정에서는 수도인 단양군(丹陽郡) 일대만 보전했으나, 영세현(永世縣)에서 반란이 일어나고 의흥군(義興郡)에서 봉기한 도적이 연릉현(延陵縣)으로 접근하여 수도가 불안에 빠졌다. 은효조는 형주 출신으로 구성된 대군을 이끌고 출병했다. 조정은 은효조를 관군장군(冠軍將軍)으로 진호하고 가절(假節), 독전봉제군사(督前鋒諸軍事)로 삼았으며, 호감(虎檻)으로 파견하여 반란을 진압하게 하였다. 이때 명제는 [[제갈량]]의 통수개를 은효조에게 하사하며 신임을 보였다. 하지만 은효조는 조정에 대한 자신의 충절에 의지하여 휘하 장수들을 능멸했고 부자나 형제가 남쪽에 있는 관군의 군인들을 모두 심문하여 벌을 주려고 했다. 이 때문에 내부가 산만해졌고 누구도 은효조를 위해 활약하려고 하지 않았다. 은효조는 사지절(使持節), 도독연청기유4주제군사(都督兗青冀幽四州諸軍事), 무군장군(撫軍將軍)으로 진위되고 자사는 예전과 같이 받았다. 자기(赭圻)를 점령한 반란군을 토벌하러 출병할 때 은효조는 왕현모(王玄謨)와 작별한 뒤 그 슬픔을 견디지 못했고 많은 사람들이 여기에 놀랐다. 은효조는 반란군과 교전할 때 항상 고취와 산개(傘蓋)를 가지고 출병했는데, 군중의 사람들은 서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은효조는 가히 사장(死將)이라고 할 만하다. 은효조는 지금 반란군과 교전하며 의장으로 스스로를 과시하니 만약 활을 잘 쏘는 사람 10명이 집중적으로 활을 쏜다면 죽지 않으려고 할 수 있겠는가? 466년 3월 3일, 은효조는 결국 전투 도중 화살을 맞아 사망했다. 은효조는 산기상시(散騎常侍), 정북장군(征北將軍)으로 추증되었고 지절과 도독은 예전과 같이 받았으며, 자귀현후(秭歸縣侯)로 추봉되고 식읍 1000호를 받았다. 468년, 은효조를 다시 건안현후(建安縣侯)로 추봉하고 충(忠)이라는 시호를 내렸다. [[분류:송(남조)/인물]][[분류:415년 출생]][[분류:466년 사망]][[분류:진군 은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