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류:조선의 후궁]][[분류:1454년 사망]][[분류:한양 조씨]] [include(틀:조선의 후궁(환조 ~ 연산군))] ---- ||<-2> {{{#!wiki style="margin: -5px -10px; padding: 5px 10px; background-image: linear-gradient(to right, #6E1D55, #89236A 20%, #89236A 80%, #6E1D55); color: #FFD400" '''조선 태종의 후궁[br]{{{+1 의정궁주 조씨 | 義貞宮主 趙氏}}}'''}}} || ||<-2> {{{#!wiki style="margin: -6px -10px;" [include(틀:지도, 장소=서울시 도봉구 방학동 의정궁주조씨묘, 너비=100%)]}}} || ||<-2> {{{#ffd400 {{{-2 의정궁주 조씨묘 위치}}} }}} || || '''출생''' ||미상 || || '''사망''' ||[[1454년]] [[3월 15일]]^^([[음력]] [[2월 8일]])^^ || || '''본관''' ||[[한양 조씨]] || || '''부모''' ||부친 - 조뇌(趙賚)[br]모친 - [[연안 이씨]] 이귀령(李貴齡)의 딸 || || '''배우자''' ||[[태종(조선)|태종]] || || '''자녀''' ||없음 || [목차] [clearfix] == 개요 == [[조선]] [[태종(조선)|태종]]의 [[간택]] [[후궁]]. 아버지는 돈녕부 지사를 지낸 조뇌(趙賚), 어머니는 [[좌의정]] [[치사#s-3]] 이귀령(李貴齡)의 딸이다. 그녀의 선조들은 대대로 [[함경도]] 지역에 근거하여 살았으므로 [[태조(조선)|태조 이성계]]의 가문과 밀접하였다. [[도조(조선)|도조 이춘]]의 둘째 부인[* 한양 조씨의 시조 조지수의 아들 조휘의 딸이 도조 이춘의 둘째 부인이다. ]과 [[환조(조선)|환조 이자춘]]의 사위[* 의정궁주의 할아버지 조인옥의 형 조인벽이 환조 이자춘의 사위다. ]가 그녀의 가문 사람이다. 따라서 그녀는 태조와 인척 관계가 되는 셈이다. == 생애 == >[[소헌왕후|공비]](恭妃)가 가례색(嘉禮色)에서 뽑아 올린 상호군(上護軍) 조뇌(趙賚)와 좌랑(佐郞) 장수(張脩)와 전 현감 신기(愼幾)의 딸을 궁중에 불러 보았다. 처음에 변계량이 [[조말생]]에게 말하기를, "[[원경왕후|대비]]가 이미 돌아가고, [[숙공궁주|김씨]](金氏)도 또한 나가 버렸으니[* 숙공궁주 김씨는 아버지 김점이 뇌물을 받는 등 죄를 저질러서 궁중에서 내쫓겼다. ], 마땅히 태상왕을 위하여 다시 명가(名家)의 딸을 가려서 빈(嬪)과 잉첩(媵妾)의 모자라는 데를 보충해야 될 것이다." 라고 하였다. 드디어 건의하여 여러 대신들과 함께 청하였다. >---- >《[[세종실록]]》 세종 4년 2월 28일 1422년(세종 4) 변계량의 건의로 태상왕 태종을 위한 간택을 하였다. 태종은 자신이 나이가 들었다는 이유로 거절하다가 조뇌의 딸로 낙점하였다. 그런데 그해 5월에 태종이 세상을 떠났다. 결국 조씨는 제대로 된 [[혼례]]를 치르지도 못한 상태에서 [[과부]]가 된 것이다. 이에 조뇌는 "내 딸이 혼례식은 못 치렀지만, 궁중에 들어오라는 말이 있었으니 상복을 입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이 주장이 받아들여져 조씨는 태종의 다른 후궁들과 똑같이 상복을 입게 되었다. --혼례복은 입어보지도 못했다-- 그 후, [[세종(조선)|세종]]이 부왕을 위해서 뽑은 후궁인만큼 빈(嬪)으로 책봉하겠다고 밝혔다. 그러나 당시 조정에서는 조씨가 태종과 혼인하는 예를 갖춘 것이 없어서 안된다고 반대하였고, 그 탓에 궁주(宮主)가 되었다.[* 세종실록 17권, 세종 4년 9월 25일 기묘 1번째기사. [[http://sillok.history.go.kr/id/kda_10409025_001|#]] ] 1454년(단종 2) 세상을 떠났다. == 여담 == * 의정궁주에게는 동복형제로 조효생, 조순생, 조관생, 조덕생이 있었다. 이 중 조순생은 [[계유정난]]이 일어났을 때 [[안평대군]] 일파로 몰려 죽임을 당하였다. * 의정궁주의 묘는 [[연산군]]ㆍ[[폐비 신씨]]의 묘와 연산군의 적녀 [[휘신공주]]ㆍ구문경 부부의 묘 사이에 있다. 원래 의정궁주의 묘가 먼저 있었는데, [[강화도]] 교동으로 유배가서 죽은 연산군이 의정궁주 묘 쪽으로 이장되면서 지금과 같은 모습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