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clude(틀:다른 뜻1,other1=당나라의 추존 당의종(唐義宗),rd1=당의종(추존))] [include(틀:역대 당 황제)] ---- ||<-2> {{{#!wiki style="margin: -5px -10px; padding: 5px 10px; background-image: linear-gradient(to right, #937449 0%, #a48252 20%, #a48252 80%, #937449); color: #ece5b6" '''당 제17대 황제[br]{{{+1 의종 공황제 | 懿宗 恭皇帝}}}'''}}} || ||<|2> '''출생''' ||[[833년]] [[12월 28일]] || ||[[당나라|당]] [[시안시|장안]] 황궁[br](現 [[산시성(섬서성)|산시성]] [[시안시]]) || ||<|2> '''즉위''' ||[[859년]] [[9월 13일]] || ||[[당나라|당]] [[시안시|장안]] 황궁[br](現 [[산시성(섬서성)|산시성]] [[시안시]]) || ||<|2> '''사망''' ||[[873년]] [[8월 15일]] (향년 39세) || ||[[당나라|당]] [[시안시|장안]] 황궁 함녕전[br](現 [[산시성(섬서성)|산시성]] [[시안시]]) || || '''능묘''' ||간릉(簡陵) || ||<|4> '''재위기간''' ||'''{{{#ece5b6 당의 황태자}}}''' || ||[[859년]] [[9월 7일]] ~ [[859년]] [[9월 13일]] || ||'''{{{#ece5b6 제17대 황제}}}''' || ||[[859년]] [[9월 13일]] ~ [[873년]] [[8월 15일]] || ||<-2> {{{#!wiki style="margin: 0 -10px -5px; min-height: 26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 '''본관''' ||[[이(성씨)|농서 이씨]] || || '''휘''' ||온(溫) → 최(漼) || || '''부모''' ||부황 [[선종(당)|선종]][br]모후 원소황후 || || '''형제자매''' ||12남 11녀 중 장남 || || '''배우자''' ||혜안황후, 공헌황후 || || '''자녀''' ||8남 9녀 || || '''작호''' ||운왕(鄆王) || || '''묘호''' ||'''[[의종]](懿宗)''' || || '''존호''' ||예문영무명덕지인대성광효황제[br](睿文英武明德至仁大聖廣孝皇帝)[* [br]예문명성효덕황제(睿文明聖孝德皇帝)[br]→ 예문영무명덕지인대성광효황제(睿文英武明德至仁大聖廣孝皇帝)] || || '''시호''' ||소성공혜효황제(昭聖恭惠孝皇帝) || || '''연호''' ||대중(大中, [[859년]] ~ [[860년]])[br]함통(咸通, [[860년]] ~ [[873년]]) || || '''절일''' ||연경절(延慶節) || }}}}}}}}} || [목차] [clearfix] == 개요 == [[당나라]]의 제17대 황제. 묘호는 의종(懿宗). 시호는 소성공혜효황제(昭聖恭惠孝皇帝)로, 줄여서 공황제(恭皇帝)이다. 굳이 요약하자면, 당나라에 절망을 가져온 [[황소의 난]]을 초래한 '''당나라 최악의 암군'''이다. == 생애 == > "주색에 빠져서 놀고 즐기는 데에 절도가 없다" >"당의종은 직간하는 신하에게 화를 내고 유배보냈다." [[당선종]]의 [[장남]]으로 [[환관]]들이 옹립했다.[* 예법상으로는 당연히 황태자가 되었을 위치이지만, 의종은 너무나 사치스럽고 유흥을 즐겼기에 선종은 의종을 매우 싫어했다. 어느 정도였냐면 선종의 아들들 중 유일하게 궁 밖에서 살았다. 그 정도로 무능하기에 환관들이 옹립한 것이었다.] 선종이 중흥의 의지가 있었던 것과 달리, 선종 말년부터 터져 나오는 반란 속에도 놀고 먹으며 당나라를 말아먹는 데 크게 일조했으며 직간하는 신하에게 화를 내고 유배를 보내기도 했다. 우선 1년도 안 되는 사이에 영호도와 백민중을 중앙 정계에서 추방시켰다.[* 영호도와 백민중은 선종과 함께 당나라의 중흥을 위해 노력한 사람들이었다. 게다가 명대 신종 만력제 치세때의 신하인 장거정 수준의 스캔들도 없었다.] 2년 뒤에는 애초에 그 자리에 없었던 두종 등을 포함한 대신들을 모반죄 운운하면서 죽이려고 했다. 그런데 그런 그가 '아름다울 의' 자 의종이다. 당나라에서는 마지막으로 황제 노릇을 한 황제였다. 의종은 체격이 장대하고 훤칠했다고 한다. 황자 때는 그릇이 침착하고, 중후했으며 음률에 뛰어났다고 하니[* 상술한 대로 왜곡일 가능성이 매우 높다.] 좋은 재능을 음악하고 놀고 먹으며 불교 받드는데 쓴 모양이다.[* 아들 [[당희종|희종]]도 그대로 물려받았다.] 당시 당나라는 마지막 불꽃처럼 강남을 중심으로 백성들에게 학정을 일삼았으며, 매관매직이 성행했다. 의종의 딸인 [[동창공주]]가 죽자 치료하지 못한 의원들 300명의 가솔을 학살하려고 한 것을 막으려던 관료인 온장(溫暲)은 좌천되자 자살했다. 그가 유언으로 남긴 >'''살아서는 때를 만나지 못했는데, 죽는다 한들 무엇이 아쉬우랴!''' 가 의종이 어떤 인간인지를 말해주고 있다. 당나라 역대 황제들의 특징인 [[도교]] 심취보다는 [[불교]]를 심취했다는 게 그나마 특징인데 아버지 선종이 행한 폐불 중단을 이어받아 복구한 것 외에는 별 것 없다. 참고로 선종은 반대로 도교에 심취했다. == 논찬 == >국가의 치세와 난세는 군주가 송사를 듣고 판단하는 것에 달려있다. '''공혜황제'''는 교만하고 사치스러웠으며, 어질고 착한 이들은 좌천되고 먼 곳으로 유배되었다. 흉악한 내시가 정권을 잡았고, 간사한 사람들이 조정에 가득하였다. 간사한 영웅이 기회를 이용하여, 부조가 자식에게 전하는 가르침이 완전히 사라졌다. >------ >《구당서》의 논찬 == 여담 == [[최치원]]이 당나라에서 유학 생활을 할 때의 황제가 이 사람이었다. 최치원은 다음 황제인 [[희종(당)|희종]] 대에 신라로 귀국했다. == 대중매체에서 == 2011년 드라마 <후궁쟁패>에서 의종을 배경으로 한 궁중암투를 다루고 있다. == 둘러보기 == [include(틀:역대 당 황태자)] [include(틀:구당서)] [include(틀:신당서)] [각주] [include(틀:문서 가져옴,title=의종,version=53)] [[분류:수당시대/황제]][[분류:역대제왕묘 배향자]][[분류:833년 출생]][[분류:873년 사망]][[분류:시안시 출신 인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