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clude(틀:이순신)] ---- 李洸 [[1541년]]([[중종(조선)|중종]] 36년) ~ [[1607년]]([[선조(조선)|선조]] 40년) [목차] [clearfix] == 개요 ==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덕수 이씨|덕수]](德水)[* 덕수는 현재 [[북한]] [[개성시]] 일대로 [[이순신]], [[율곡 이이]]와 같은 본관이다.], [[자(이름)|자]]는 사무(士武), [[아호|호]]는 우계산인(雨溪散人), 우파(雨波)이다. [[율곡 이이]]의 8촌 삼종제(三從弟)이며, [[이식(조선)|택당 이식]]의 작은할아버지이다. == 생애 == 1541년 도사(都事:종5품)와 군자감 판관(軍資監判官:종5품)을 지낸 아버지 이원상(李元祥)과 어머니 [[평산 신씨]] 신옥형(申玉衡)의 딸 사이의 아들로 태어났다. 조부는 [[좌의정]]을 지낸 이행(李荇)이다. [[충무공 이순신]]과는 19촌의 숙질(叔姪)간으로, 비록 촌수는 멀었지만 줄곧 가까운 관계를 유지했다. 27세 되던 1567년(선조 즉위년) 식년시 생원시에 3등 57위로 [[http://people.aks.ac.kr/front/dirSer/exm/exmView.aks?exmId=EXM_SA_6JOb_1567_005229|입격하고]] [[참봉]](종9품)을 지내다가 1574년(선조 7) 별시 문과에 병과 9위로 [[http://people.aks.ac.kr/front/dirSer/exm/exmView.aks?exmId=EXM_MN_6JOb_1574_003890|급제한 뒤]] [[성균관]] 학유(學諭:종9품)·검열(檢閱:정9품)·[[사간원]] 정언(正言:정6품)·[[형조]] 좌랑(정6품) 등을 역임하였다. 1584년에는 [[함경도]] [[암행어사]]로 나가 관북 지방민들의 구호 실태를 살피고 돌아와 영흥 부사에 임명되었다. 1586년 함경도 관찰사가 되었으며 1590년 [[전라도]] 관찰사로서 1589년 [[정여립]] 역모 사건에 연루된 인물들을 미온적으로 처리했다는 탄핵을 받고 삭직되었다. 1591년 호조 참판이 되었으며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조정에서는 변방 사정에 밝은 인물로 남쪽 삼도를 방어하게 하였는데 이 때 전라도 관찰사로 발탁되어 경상도 관찰사 김수(金睟) ·충청도 관찰사 윤선각(尹先覺)과 함께 삼도를 방어했다. 이 후 관군을 이끌고 북상하여 왜군과 맞서 싸웠으나, [[용인 전투]]에서 참패하였다. 이어 광주목사(光州牧使) [[권율]]을 전라도 도절제사(都節制使)로 삼으면서 [[웅치 전투|웅치(熊峙)에서 승리]]를 거두고 [[전주성 전투|전주에 침입한 왜군을 격퇴]]하기도 했으나, 앞서의 패전을 이유로 대간의 탄핵을 받고 파직되어 [[백의종군]]했다. 이후에도 패전을 이유로 [[의금부]]에 투옥, [[평안도]] [[벽동군]]에 유배되었다가 1594년 석방되어 고향으로 돌아갔다. 1607년 사망했으며 저서에 《우계집》이 있으며 맏형 이섭(李涉)의 장손자 이식(李植)이 행장을 썼다. [[이(성씨)|덕산 이씨]](德山 李氏) 이증영(李增榮)의 딸과 혼인하여 슬하에 3남 1녀를 뒀다. [각주][include(틀:문서 가져옴, title=이광, version=90)][include(틀:표절, version=1, source=두산백과)] [[분류:조선의 문관]][[분류:1541년 출생]][[분류:1607년 사망]][[분류:덕수 이씨]][[분류:임진왜란/군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