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clude(틀:다른 뜻1, other1=동명의 가수, rd1=이하늘)] ||<-2>
[[파일:70635_87728_3427.jpg|width=100%]] || || '''이름''' ||이근배(李根培) || || '''국적''' ||[[대한민국]] [[파일:대한민국 국기.svg|width=28]] || || '''본관''' ||[[경주 이씨]][* [[https://www.cctoday.co.kr/news/articleView.html?idxno=134292|#]]] || ||<|2> '''출생''' ||[[1940년]][* 호적상 생년월일로 실제로는 1939년생이다.] [[3월 1일]] ([age(1940-03-01)]세) || ||[[충청남도]] [[당진시|당진군]] [[송산면(당진)|송산면]] 삼월리 209번지[* [[https://www.cctoday.co.kr/news/articleView.html?idxno=134292|#]]] || || '''학력''' ||[[당진정보고등학교|당진상업고등학교]] {{{-2 ([[졸업]])}}}[br][[서라벌예술대학]] {{{-2 ([[문예창작과]] 58 / [[학사]])}}} || || '''등단''' ||경향신문 신춘문예 「묘비명」, 서울신문 신춘문예 「벽」, 조선일보 신춘문예 「압록강」 당선 (1961) || ||<-5>
'''제15회 만해대상 문학부문 수상''' || || 존 롤스턴 솔, 정진규 [br] (2010) || → || '''이근배, [[모옌]] [br] (2011)''' || → || 수아드 알 사바, 김재홍 [br] (2012) || ||<-5> '''제27회 정지용문학상 수상 「사랑 세 쪽」 ''' || || 나태주 [br] (2014) || → || '''이근배 [br] (2015)''' || → || 신달자 [br] (2016) || ||<-5> '''대한민국 은관[[문화훈장]] 수상''' || [목차] [clearfix] == 개요 == >살다가 보면 >넘어지지 않을 곳에서 >넘어질 때가 있다 >사랑을 말하지 않을 곳에서 >사랑을 말할 때가 있다 >눈물을 보이지 않을 곳에서 >눈물을 보일 때가 있다 >살다가 보면 >사랑하는 사람을 >사랑하지 않기 위해서 >떠나보낼 때가 있다 >떠나보내지 않을 것을 >떠나보내고 >어둠 속에 갇혀 >짐승스런 시간을 >살 때가 있다 >살다가 보면 >---- >이근배의 시, '살다가 보면' - [[한국]] 문단을 대표하는 [[시인(문학)|시인]]중 한 명으로 '''시조 작단의 좌장'''으로 평가받는 시인이다. == 생애 == [[1940년]][* 본래 1939년생이나, 호적에 이와 같이 정리되어 있다.] [[3월 1일]], [[충청남도]] [[당진시|당진군]](현 [[당진시]]) [[송산면(당진)|송산면]] 사월리 209번지에서 [[독립유공자]]인 아버지 [[https://e-gonghun.mpva.go.kr/user/ContribuReportDetail.do?goTocode=20001&pageTitle=Report&mngNo=42699|이선준]](李銑濬)과 어머니 장순의(張順儀)[* 장후재(張厚載)의 셋째 딸이다.] 사이의 [[외아들]]로 태어났다. 조부 이각현(李覺鉉)은 한학자로 당진 지역 유도회 회장을 역임했으며, 아버지 이선준이 [[8.15 광복]] 후 [[남조선로동당]]에 입당해 [[https://www.cctoday.co.kr/news/articleView.html?idxno=134292|활동하다가]] 국민학교 5학년 되던 1950년 [[6.25 전쟁]] 때 아버지가 [[행방불명]]되자 이후 줄곧 조부의 가르침을 받고 자랐다. 이후 [[당진정보고등학교|당진상업고등학교]]와 [[서라벌예술대학]] [[문예창작과]][* [[중앙대학교]] [[문예창작학과]]의 전신. 과거 [[서울대학교/학부|서울대학교 문리과대학]]과 더불어 '한국 문학의 사관학교'라고 불릴 정도로 막강 문맥을 자랑한다.]를 졸업하였다. 중학교 2학년 무렵부터 아버지가 보던 일본책 여백에 펜촉으로 소설을 쓰기 시작하였다고 한다. 고등학교 1학년 때, 프랑스의 18세 소설가 [[프랑수아즈 사강]]이 「슬픔이여 안녕」이라는 소설로 세계적 베스트셀러가 되고 있다는 [[동아일보]]의 기사를 읽고 자신이 먼저 그런 소설을 써야 했다는 생각에 공부를 더 해보고 싶어 무작정 서울로 도망을 갔다는 일화가 있다. 집안에서는 [[공주사범대학]](현 [[국립공주대학교/학부/사범대학|공주대학교 사범대학]])를 가길 원했는데, 당시만 하더라도 학교 선생이나 공무원이면 당시 어른들이 바라는 최고의 직업이었다. ~~어쩐지 지금과 크게 다르지 않다~~ 그러나 이근배는 선생이 되긴 싫었고 그는 신문에서 서라벌예술대학교 [[문예창작과]]에서 장학생을 모집한다는 광고를 보고 자기가 장학생 선발과정에서 장학생이 되면 보내달라고 그의 조부에게 간청하였다고 한다. 그리고 그는 장학생 선발과정에서 을류 장학생[* 갑류는 전액 장학생이고 을류 장학생은 반액만 내주는 장학생.]이 되었고 서라벌예술대학 문예창작과 58학번으로 진학을 허락받을 수 있었다. 서라벌예대 재학시절 [[김동리]]에게서 소설을, [[서정주]]에게서 시를 사사했다. 1960년 [[서정주]]의 서문이 실린 첫 시집 <사랑을 연주하는 꽃나무>를 출간한 이후에, 1961년 경향신문 [[신춘문예]] [[시조(문학)|시조]] <묘비명>이 당선된 것을 시작으로 같은 해에 [[서울신문]] 신춘문예 시조 <벽>과 조선일보 신춘문예 시조 <압록강>이 당선되어 정식으로 등단했다. 이근배 시인의 서라벌예대 재학 시절 시 창작 강의를 하던 [[박목월]] 시인은 서울신문 신춘문예 시상식 장소에서 “오 바로 너였구나. 어쩐지 시어가 참 곱고 신선해서 네가 아닌가 했었다.”라며 칭찬을 하기도 했다고 한다. 1962년에는 동아일보 신춘문예 시조 <보신각종>이 당선되었고, [[조선일보]] 신춘문예 동시 <달맞이꽃>가 당선되었으며 1964년 [[한국일보]] 신춘문예 시 <북위선>기 당선됨으로써 문단 최초 신춘문예 5관왕이라는 기록을 세웠다. ~~5개나?~~ == 수상 == ||
[[1983년]] || 가람시조문학상 || || [[1983년]] || 가람문학상 || || [[1987년]] || 중앙시조대상 || || [[1987년]] || 한국문화작가상 || || [[1997년]] || 육당문화상 || || [[1999년]] || 월하문학상 || || [[2000년]] || 편운문학상 || || [[2002년]] || 현대불교문학상 || || [[2007년]] || 제5회 유심작품상 시조부문 || || [[2010년]] || 제9회 고산문학상 시조부문 || || [[2011년]] || 제 15회 만해대상 문학부문 || || [[2011년]] || 은관문화훈장 || || [[2014년]] || 제46회 한국시인협회상 || || [[2014년]] || 제4호 이설주문학상 || || [[2015년]] || 제27회 정지용문학상 || || [[2017년]] || 제7회 한국시조대상 || || [[2017년]] || 제4회 심훈문학대상 || == 경력 == ||
[[1972년]] || 한국시인협회 상임위원 || || [[1972년]] || 한국문인협회 이사 || || [[1972년]] || 한국시조시인협회 부회장 || || [[1973년]] ~ [[1975년]] || 한국문인협회 시조분과위원회 위원장 || || [[1983년]] || 한국문인협회 부이사장 || || [[1994년]] ~ [[1996년]] || 한국시조시인협회 회장 || || [[1997년]] ~ [[2009년]] || 지용회 회장 || || [[2002년]] ~ [[2003년]] || 한국시인협회 회장 || || [[2003년]] ~ || 만해시인학교 교장 || || [[2008년]] ~ || 대한민국예술원회원 || || [[2015년]] ~ [[2017년]] || 대한민국예술원 부회장 || || [[2019년]] ~ || 대한민국예술원 회장 || == 시집 == <사랑을 연주하는 꽃나무> (1960) <노래여 노래여> (1981) <동해 바다 속의 돌거북이 하는 말> (1982) <한강> (1985) <사람들이 새가 되고 싶은 까닭을 안다> (2004) <추사를 훔치다> (2013) == 벼루 수집가 == [[파일:27961641.1[1].jpg|width=60%]] 시, 시조에서의 문학적 성취 외에 문화 [[예술]]계에서 자타가 인정하는 명품 [[벼루]] 컬렉터로도 유명하다. [[유학]]자인 할아버지와 면암 [[최익현]]의 수제자였던 외할아버지의 영향으로 어릴 적부터 붓글씨를 익혀 왔는데, 1973년 [[창덕궁]]에서 문화재관리국 주최로 열린 벼루전시회가 계기가 되어 40년 넘는 세월동안 벼루를 수집하였다. 한국 벼루 500여 점, 중국 벼루 500여 점, 합쳐서 총 1000여 점에 달하는 벼루를 갖고 있다. [[당(통일왕조)]], [[북송]], [[명나라]], [[청나라]]대 벼루와 [[강희제]], [[옹정제]], [[건륭제]] 등 황제가 사용하던 벼루, 조맹부 주이존 유용 옹방강 완원 [[이홍장]] 등 명사들이 사용했다는 기록이 새겨진 벼루를 여럿 갖고 있다고 한다. ~~흠좀무~~ 벼루에 대한 애정 때문에 스스로를 연벽묵치((硯癖墨痴)[* 문방사우에 빠지는 어리석음]라고 평하기도 하였고 벼루에 관한 연작시만 무려 80편 정도를 썼다. == 관련 문서 == * [[작가/목록]] [[분류:대한민국의 시인]][[분류:경주 이씨]][[분류:당진시 출신 인물]][[분류:1940년 출생]][[분류:서라벌예술대학 출신]][[분류:은관문화훈장]][[분류:독립유공자 후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