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clude(틀:선원선계)] ---- ||<-3> {{{#!wiki style="margin: -5px -10px; padding: 7px 10px; background-image: linear-gradient(to right, #972000, #bf1400 20%, #bf1400 80%, #972000)" {{{#ffd400 '''조선 시조고의 곤손자'''[br]{{{+1 '''이긍휴 | 李兢休'''}}}}}}}}} || ||<-2><:><#bf1400> {{{#gold '''관직'''}}} ||<(> {{{#000000,#fff 사공(司空)}}} || ||<-2><:><#bf1400> {{{#gold '''본관'''}}} ||<(> {{{#000000,#fff [[전주 이씨]]}}} || ||<-2><:><#bf1400> {{{#gold '''휘'''}}} ||<(> {{{#000000,#fff 긍휴(兢休)}}} || ||<-2><:><#bf1400> {{{#gold '''부친'''}}} ||<(> {{{#000000,#fff [[이입전]]}}} || ||<-2><:><#bf1400> {{{#gold '''모친'''}}} ||<(> {{{#000000,#fff 백씨(白氏)}}} || ||<-2><:><#bf1400> {{{#gold '''부인'''}}} ||<(> {{{#000000,#fff 이씨(李氏)[* 이대광(李大光)의 딸이다.] }}} || ||<-2><:><#bf1400> {{{#gold '''자녀'''}}} ||<(> {{{#000000,#fff [[이염순]] 외 6남[* 《동국세기》및《충효전》에서]}}} || ||<-2><:><#bf1400> {{{#gold '''17대손'''}}} ||<(> {{{#000000,#fff [[태조(조선)|태조]]}}} || ||<-2><:><#bf1400> {{{#gold '''생몰년도'''}}} ||<(> {{{#000000,#fff 미상}}} || [목차] [clearfix] == 개요 == [[조선]]의 [[국성]] [[전주 이씨]]의 [[시조]] [[이한(신라)|이한]]의 내손자. == 상세 == [[이입전]]의 아들로 처음으로 고려에 벼슬하여 사공(司空)을 지냈다. 배위는 정언(正言) 벼슬을 지낸 이대광(李大光)의 딸이다. 고려시대의 '사공'은 3공(三公)의 하나로 정1품이었는데, 임금의 자문에 응하고 나라를 대표하는 관직이었다. 또 '정언'은 고려 중서문하성(中書門下省)의 낭사(郞舍) 벼슬로 종6품이었으며, 임금에게 간언(諫言)을 올리는 일을 맡았다. 《완산실록》에는 이런 일화가 곁들여 있다. >이긍휴는 중국에 건너가 26세에 문과에 급제하여 예천태수(醴川太守)가 되었다가, 7년 후에 우리 나라로 돌아와 몇 해 동안 계셨다. 이후 다시 중국으로 들어가 관사재(觀史齋)에 계시다가 객사하셨다. 이에 부인 이씨가 7세가 된 아들 염순(廉順)을 데리고 중국 조정에 밤낮으로 호곡하며 호소했다. 이때 완탑촌(完塔村)에서 자는데 밤에 꿈 속에서 6금불(六金佛)이 와 하는 말이 "해골이 항주(杭州) 탁산(卓山) 밑에 버려져 있다.” 라고 했다. 그래서 부처의 힘으로 시체를 찾고, 또 천자의 명으로 우리 나라로 모셔와 선영에 장례지냈다. 그리고 《동국세기》와 《충효전》에도 이와 비슷한 일화가 적혀 있다. 이 두 책에는 이긍휴가 도민(道敏)으로 표기되어 있는데, 이긍휴는 호탕하고 방랑벽이 있어 중국에 건너가 삼성문(三省門 : 三聖門)에서 수업(受業)하여 천문지리에 달통했고, 9년(또는 8년) 만에 귀국하여 시조의 묘를 향린산(香麟山 : 香因山)으로 이장한 후 훗날을 기약했다고 한다. [각주] [[분류:고려의 인물]][[분류:몰년 미상]][[분류:전주 이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