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wiki style="margin: -5px -10px; padding: 5px 10px; background-image: linear-gradient(115deg, #cd313a 50%, #0047a0 50%)" '''[[독립유공자|{{{#ffffff 대한민국의 독립유공자}}}]]'''[br] {{{#ffffff '''{{{+1 이남규}}}'''[br]'''李南奎'''}}}}}} || || '''초명''' ||이종태(李鍾泰) || || '''본관''' ||[[함평 이씨]][* 현감공(縣監公) 손무(孫茂)파 27세 규(奎) 항렬.] || ||<|2> '''출생''' ||[[1867년]][* [[https://e-gonghun.mpva.go.kr/user/ContribuReportDetail.do?goTocode=20001&pageTitle=Report&mngNo=3034|독립유공자 공적정보]]에는 1856년생으로 기재돼 있으나, 『[[http://people.aks.ac.kr/front/dirSer/exm/exmView.aks?exmId=EXM_SA_6JOc_1894_039384|상지즉조32년갑오식년사마방목(上之卽祚三十二年甲午式年司馬榜目)]]』 및 함평이씨대동보 권13 1709쪽에는 1867년생으로 등재돼 있어 이를 따른다.] [[8월 26일]] || ||[[전라도]] [[함평군|함평현]] [[나산면|식지면]] 수하리[br](現 [[전라남도]] [[함평군]] [[나산면]] 수하리) || ||<|2> '''사망''' ||[[1907년]] [[11월 7일]] (향년 40세) || ||[[전라북도]] [[고창군]] || || '''묘소'''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2묘역-126호 || || '''상훈''' ||[[건국훈장]] 애국장 추서 || [목차] [clearfix] == 개요 == [[대한민국]]의 [[독립유공자]].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되었다. == 생애 == 1867년 8월 26일 [[전라도]] [[함평군|함평현]] [[나산면|식지면]](現 [[전라남도]] [[함평군]] [[나산면]]) 수하리에서 아버지 이경인(李景寅, 1851 ~ 1895. 2. 27)[* 초명 이현인(李鉉寅), 자는 진구(珍九).]과 어머니 [[밀양 박씨]](1850 ~ 1886. 6. 19)[* 박진환(朴晋煥)의 딸이다.] 사이에서 5형제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출생 이후 11촌 지간의 족숙(族叔) 이현근(李鉉根, 1832 ~ 1878. 2. 2)[* 자는 의여(意如).]에 입양되었으며, 전라도 [[무주군|무주현]](現 [[전라북도]] [[무주군]])으로 이주했다. 아버지 이경인은 1877년([[고종(조선)|고종]] 14) [[경기도]] [[수원시|수원유수부]]에서 심한 기근이 들자, 1만 냥을 의연금으로 [[http://db.itkc.or.kr/inLink?DCI=ITKC_ST_Z0_A14_04A_16A_00120_2004_067_XML|기부하였다]]. 이에 대한 포상으로 장흥고 주부(長興庫主簿, 종6품)에 [[http://db.itkc.or.kr/inLink?DCI=ITKC_ST_Z0_A14_04A_28A_00160_2004_067_XML|임명되면서]] 관직에 진출했다. 이때 또한 [[전라도]]에도 기근에 대한 의연금 2,000냥을 [[http://db.itkc.or.kr/inLink?DCI=ITKC_ST_Z0_A14_08A_21A_00180_2004_069_XML|기부하기도 했다]]. 1887년(고종 24) 고창현감(高敞縣監)에 [[http://db.itkc.or.kr/inLink?DCI=ITKC_ST_Z0_A24_12A_28A_00330_2003_126_XML|임명되었으나]] 1888년 총무관 겸 전운어사(總務官兼轉運御史) 홍종영(洪鍾永)의 탄핵으로 사고가 있을 때 관련 아전과 향임(鄕任)을 제때 파견하지 않아 일 처리를 그르치고, 무뢰배가 진(鎭)의 장교(將校)를 구타했음에도 제대로 처리하지 않았음이 드러나 [[http://db.itkc.or.kr/inLink?DCI=ITKC_ST_Z0_A25_06A_03A_00300_2003_129_XML|파직되었다]]. 1894년 [[동학 농민 혁명]]이 일어난 뒤 45촌 지간의 족질(族姪)인 고군산진 수군첨절제사(古群山鎭水軍僉節制使) 이태형(李泰亨, 1841 ~ 1894. 12. 25)[* 족보명 이계균(李啓均), 자는 상삼(相三).]이 후방에서 동학농민군에 가축 및 식량 등 군수물자를 지원해주는 정황을 알아내자 이를 관아에 밀고해 그가 처형되는 데 일조했다. 동학 농민 혁명이 진압된 뒤 1895년 2월 27일 전라도 함평현을 방문해 읍내 기성면 서부리(現 함평군 [[함평읍]] 내교리 서부마을)[* 지금의 [[https://naver.me/5izpahIg|함평농협본점]] 자리]에서 연회를 벌이던 중 이태형의 장남 이두회에 발각되어 살해당했다. 1894년(고종 31) 식년 [[생원|생원시]]에 3등 38위로 [[http://people.aks.ac.kr/front/dirSer/exm/exmView.aks?exmId=EXM_SA_6JOc_1894_039384|입격했다]]. 1907년 [[정미 7조약]]이 체결되고 이어 [[대한제국 군대 해산]]이 단행되자, 통분함을 이기지 못하고 음력 8월 8일(양력 9월 15일) [[장성군]] 서이면 관정리(現 [[장성군]] [[황룡면]] 관동리 관정골) 수연산(隨緣山) [[http://www.jstnews.co.kr/news/articleView.html?idxno=3720|석수암]](石水菴)에서 [[기삼연]]을 만나 의논한 뒤 의병진을 창설했다. 이때 후군장(後軍將)에 임명되었고, 이후 [[나주시|나주군]](現 [[나주시]]), [[광주광역시|광주군]](現 [[광주광역시]]), [[담양군]] 등지에서 [[일본 제국 육군]] 및 관군과 접전해 전적을 올렸다. 이후 [[고부군]]에 있던 일본 제국 육군 [[헌병대]]사령부를 공격하기 위해 1907년 음력 9월 23일(양력 10월 29일) 기삼연과 함께 [[고창군]] [[고수면|고사면]] 칠성리(現 [[고창군]] [[고수면]] 은사리 칠성마을) [[https://terms.naver.com/entry.naver?cid=46648&docId=554684&categoryId=46648|문수사]](文殊寺)로 진군하던 중 이를 발견한 일본 제국 육군 및 관군의 습격을 받아 접전하여 큰 피해를 주었다. 1907년 음력 9월 24일(양력 10월 30일) 호남창의동맹이 창설되자 재차 기삼연 의병장의 후군장에 선임되었다. 이어 고창군 천남면 읍내(現 고창군 [[고창읍]] 읍내리)에서 [[고창읍성]]을 함락시키고 읍성 아래에서 의병진의 후군(後軍)을 지휘했다. 그러나 다시 관군에 읍성이 함락되었고 이때 중상을 입어 몸을 숨겼다. 그러나 어느 여인의 밀고로 일본 제국 육군에 체포된 뒤 1907년 11월 7일 처형되어 그 자리에서 순국했다. 1977년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독립운동 공적을 인정받아 건국포장이 추서되었고, 1990년에는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되었다. 유해는 당초 함평군 함평읍 내교리 대화마을에 안장되었다가 1994년 3월 11일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2묘역에 이장되었다. == 여담 == * 1954년 또는 1955년에 종손(從孫)[* 첫째 남동생 이철규(李喆奎, 1873 ~ 1899. 11. 3)의 손자] 이정근(李正根, 1924. 3. 6 ~ )[* 족보명은 이재근(李載根).]이 아버지 이경인이 밀고해 처형되게 만든 이태형의 손자 [[이성우(1896)|이성우]]를 전라남도 [[광주광역시|광주시]](現 [[광주광역시]])에서 만나 과거의 앙금을 풀고 화해했다. 이후 이성우의 장남 이일행(李一行, 1931. 12. 5 ~ 2006) 또한 [[서울특별시]]에서 이정근을 만나 재차 화해했다. [[분류:한국의 독립운동가]][[분류:함평군 출신 인물]][[분류:함평 이씨]][[분류:1867년 출생]][[분류:1907년 사망]][[분류:건국훈장 애국장]][[분류:국립대전현충원 안장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