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성명 ||이대위(李大偉) || || 이명 ||이원규(李元奎) || || 생몰 ||[[1896년]] [[10월 12일]] ~ [[1982년]] [[10월 5일]] || || [[출생지]] ||[[평안북도]] [[용천군]] || || 사망지 ||[[서울특별시]] || || 추서 ||건국훈장 애족장 || 이대위는 1896년 10월 12일 평안북도 용천군에서 태어났다. 그는 평북 선천의 신성중학교를 졸업하고 1911년 [[105인 사건]]으로 일제 경찰에게 붙잡혔으나 탈주하여 만주로 건너갔다. 1920년 북경대학 재학 중 [[이용설]]·문승찬(文承贊) 등과 함께 고려기독교청년회(高麗基督敎靑年會)를 조직하여 한국인 유학생의 어학교육과 숙식을 주선하는 한편 [[신채호]]·한진산(韓震山)·서일숙(徐日肅) 등과 함께 화북 일대에서 활동하다 연해주에 거주하는 교포들과 연계하기 위해 서일숙을 연해주로 파송했다. 1922년 북경에서 개최된 세계기독학생대회(WSCF)에 한국대표로 [[이상재]]가 참석하자, 그는 [[대한민국 임시정부]] 의정원 원장 [[손정도]]와 함께 북경에 파견되어 이상재가 임시정부에서 활동하도록 권유하였다. 또한 [[YMCA]] 학생부 간사를 맡았던 그는 동회에서 실시한 해외훈련에 뽑혀 1924년 미국에 파견되어 예일대·콜롬비아대학 신학부에서 공부하면서 1926년 8월 [[흥사단]]에 가입하여 동포들의 항일의식 고취에 노력하였다. 1927년 7월 귀국한 그는 동년 8월 수양동우회(修養同友會)에 가입하여 김종덕(金鍾悳)·[[조병옥]]·박현환(朴賢煥) 등과 함께 혁명투사 양성에 매진할 것을 결의하고 청년운동, 직업학교 설치, 보건운동의 홀동계획을 협의하였다. 그는 동회에서 활동하는 한편 YMCA의 농촌사업 연구를 위해 1927∼1929년 3년간 이기태와 함께 농촌운동 선전 및 농촌지도자 강습을 위해 전국을 순회하였다. 1937년 5월 17일 청년운동과 [[수양동우회 사건]]으로 붙잡힌 그는 [[서대문형무소]]에서 2년간 옥고를 치른후 재판 결과 무죄를 언도받고 석방되었다. 이후에는 1939년 일제의 [[신사참배]] 강요를 거부하고 은거 생활을 했으며, 해방 후에는 서울에서 조용히 지내다 1982년 10월 5일에 사망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63년 이대위에게 대통령표창을 수여헀고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 [[분류:용천군 출신 인물]][[분류:1896년 출생]][[분류:1982년 사망]][[분류:건국훈장 애족장]][[분류:나무위키 독립운동가 프로젝트]][[분류:한국의 독립운동가]][[분류:실향민]] [include(틀:문서 가져옴, title=이대위, version=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