李萬 (? ~ 1393) [목차] == 개요 == [[조선]]의 인물. [[내시]]로 1393년 음력 6월 19일에 태조([[이성계]])의 명으로 참수당하고 [[의안대군(이방석)|세자 이방석]](의안대군)의 [[부인]]인 [[현빈 유씨]]가 쫓겨났는데, 이에 대한 상세한 기록이 없지만 내시, 세자빈이 처벌받은 일로 볼 때 '''[[간통]]''' 사건인 것으로 보인다. 음력 6월 21일에 [[대간]], [[형조]] 등에서 상언을 올렸는데, "나라 사람들이 이 일에 대해 이유를 알지 못해 두려워한다"면서 "형조, [[한성부]] 등을 통해 [[국문]]을 해서 나라 사람들의 의심을 없애도록 해야 한다"고 했다. 그러나 [[이성계]]는 이 일을 감추려고 했는지 노하면서 홍보, 이조, 이수, 이원, 노상 등을 [[순군만호부|순군옥]]에 가두었다. 이들 뿐만 아니라 음력 6월 22일에는 "[[현빈 유씨]]의 일을 함부로 논한 대간, 형조의 관원들을 순군옥에 가둔다"고 해서 이황, 민여익, 정탁, 이지강, 윤장, 왕비, 이서, [[조사의]], 최사의, 민사정, [[박포]], 진경, 이치, 유선 등을 순군옥에 가두게 했다. 사건에 대해 정확한 기록이 없기 때문에 어떻게 내시와 세자빈 간에 [[간음]]이 벌어졌는지 알 수 없으나, 아주 불가능한 것만은 아니다. 일단 '''고려의 [[내시]]는 [[환관]]이 아니었다.''' 조선 초 기존의 [[내시부]]와 환관조직을 통합하면서 잠시 '''[[불알]] 달린 [[내시]]들'''이 존재했다고 추정되고 있고, 꼭 그렇지 않더라도 [[조선]]에서는 [[고환]]만 제거하고 [[음경]]은 남겨두는 방식으로 환관을 만들었기 때문에, [[2차 성징]]이 나타난 이후 [[거세]]했다면 ~~[[내가 고자라니]]~~ 어느정도 [[발기]]능력을 보전하여 [[불륜]] [[성관계]]가 가능했을 수도 있다. 이만과 현빈 유씨의 불미스러운 사건은 유씨가 폐출되어 이미 기반이 [[영 좋지 않은]] 의안대군의 권위를 더욱 훼손시켜 결국 의안대군이 폐세자 당하여 살해되고 말았던 [[제1차 왕자의 난]]을 일으키는 원인 중의 하나로 작용하게 되었다. == 대중매체에서의 묘사 == [[사극]] [[용의 눈물]]에서는 전자의 설을 채택해 "고려조 때 입궁한 내시라 사내 구실이 가능했다"고 설명했다. 그리고 이후에 세자빈과 이만의 기록이 없음을 비롯하여 유씨는 폐위되어 친정으로 쫓겨나 목을 매고 자살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공구리|이만은 아예 겨울날 차가운 얼음강 위에 자루에 넣은 채로 강에 내던지는 것으로 조용히 제거된다.]] [각주][include(틀:문서 가져옴, title=이만, version=43)] [[분류:조선의 환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