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wiki style="margin: -5px -10px; padding: 5px 10px; background-image: linear-gradient(115deg, #cd313a 50%, #0047a0 50%)" '''[[독립유공자|{{{#ffffff 대한민국의 독립유공자}}}]]'''[br] {{{#ffffff '''{{{+1 이목호}}}'''[br]'''李穆鎬'''}}}}}} || ||<-2> {{{#!wiki style="margin: -6px -10px" [[파일:이목호.jpg|width=100%]]}}} || || '''이명''' ||이협(李鋏)[* [[http://andong.grandculture.net/andong/toc/GC02401717|#]]] || || '''자 / 호''' ||응오(應五) / 학산(鶴山) || || '''본관''' ||[[진성 이씨]][* 주촌종파(周村宗派)-정로위공파(定虜衛公派)-아호파(鵝湖派) 20세 호(鎬) 항렬.] || ||<|2> '''출생''' ||[[1879년]] || ||[[경상도]] [[안동시|안동대도호부]] 임북면 미지리[br](현 [[경상북도]] [[안동시]] 예안면 미질리)[* 출생지인 미질리 852번지는 1973년 [[안동댐]] 건설로 수몰되었다.] || ||<|2> '''사망''' ||[[1919년]] [[1월 25일]] || ||[[중화민국]] [[봉천성]] 동변도 유하현[br](현 [[중국]] [[지린성]] [[퉁화시]] 류허현) || || '''묘소''' ||[[경상북도]] [[안동시]] 예안면 미질리 || || '''상훈''' ||건국훈장 애국장 || [목차] [clearfix] == 개요 == [[대한민국]]의 [[독립유공자]].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받았다. [[독립유공자]] [[이운호]]는 그의 4촌 형이다. == 생애 == 1879년 경상도 안동대도호부 임북면 미지리(현 경상북도 안동시 예안면 미질리)에서 아버지 이중표(李中杓, 1839 ~ 1904. 1. 11)와 어머니 [[안동 권씨]](? ~ ?. 1. 17)[* 권재일(權載一)의 딸이다.] 사이의 3남 1녀 중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1907년 3월 7일 안동군 주사(主事)에 [[http://db.itkc.or.kr/inLink?DCI=ITKC_ST_Z0_A44_03A_07A_00100_2006_210_XML|임명되어]] 재직하면서 [[이상룡]] 등의 독립운동을 비밀리에 지원했고, 1909년 7월 25일 [[http://db.itkc.or.kr/inLink?DCI=ITKC_ST_ZA_A03_07A_25A_00030_2015_005_XML|사직했다]]. 이후 이상룡 등을 지원한 사실이 발각되어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얼마간 구류를 살기도 했으며, 석방된 뒤에는 은거하다가 1910년 [[경술국치]]를 당하자 1911년 이상룡·[[김동삼]] 등과 함께 마침내 [[청나라]] [[봉천성]] 동변도(東邊道) 해룡부(海龍府) 유하현(柳河縣) 삼원보(三源堡)의 추가가(鄒家街)[* 현 [[중화인민공화국]] [[지린성]] [[퉁화시]](通化市) 류허현(柳河縣) 쩌우자촌(鄒家村). 싼위앤푸조선족진(三源浦朝鮮族鎭)과의 거리는 약 6km에 불과하다.]로 망명했다. 그는 이곳에서 [[신흥무관학교]]를 졸업하고 이상룡·김동삼과 함께 독립운동에 종사하다가, 그해 [[베이징]]으로 가서 [[선통제]]의 내종숙(內從叔)[* 조부 [[아이신기오로 이후완]]의 여동생의 아들]인 영검지(英劒之)를 만나 조선에 닥친 일을 논하고 침략자 일본에 대한 격퇴를 강력히 요청했으나, 이듬해인 1912년 [[신해혁명]]이 일어나 뜻을 이루지 못했다. 그 뒤 신흥무관학교가 이전한 [[선양시|봉천부]](奉天府) 통화현(通化縣) 합니하(哈泥河)[* 현 [[중화인민공화국]] [[지린성]] [[퉁화시]] 퉁화현(通化縣) 광화진(光華鎭) 광화촌(光華村) 제7촌민소조(第七村民小組).]로 가서 독립군 기지를 구축하고 독립운동을 함께 할 동지를 규합하는 등 활동을 계속했다. 그러나 일이 뜻대로 되지 않은 것에 울분을 참지 못하고 늘 번민하다가 1919년 1월 25일 봉천성 동변도 유하현에서 끝내 순국했다. 그의 유해는 이듬해인 1920년 5월 국내로 봉환되어 고향 마을에 안장되었다. 1983년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독립운동 공적을 인정받아 건국포장에 추서되었고, 이어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에 추서되었다. [[분류:한국의 독립운동가]][[분류:진성 이씨]][[분류:안동시 출신 인물]][[분류:1879년 출생]][[분류:1919년 사망]][[분류:건국훈장 애국장]][[분류:신흥무관학교 출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