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류:동진 및 오호십육국시대/인물]][[분류:남북조시대/인물]][[분류:407년 출생]][[분류:459년 사망]][[분류:농서 이씨]] [include(틀:위서(북조))] [include(틀:남사)] ||<-2> '''{{{+1 李寶[br]이보}}}''' || || '''시호''' ||선(宣) || || '''작위''' ||양하현자(陽夏縣子) || || '''성''' ||이(李) || || '''이름''' ||보(寶) || || '''자''' ||회소(懷素) || || '''생몰''' ||407년 ~ 459년 || || '''부친''' ||이번(李翻) || || '''조부''' ||[[이고(서량)|이고]](李暠) || || '''본관''' ||농서군(隴西郡) 적도현(狄道縣) || [목차] [clearfix] == 개요 == [[오호십육국시대]] [[서량]], [[북위]]의 인물로 자는 회소(懷素). 아명은 연손(衍孫)이었다. == 생애 == 농서군(隴西郡) 적도현(狄道縣) 출신으로, [[서량]]의 초대 국왕인 무소왕(武昭王) [[이고(서량)|이고]]의 손자이자 이번(李翻)의 아들이었다. 이보는 침착하고 단정했으며, 용맹하고 위무를 잘 했다. 420년, 서량이 [[북량]]의 침공으로 멸망하자, 이보는 고장(姑臧)으로 이주하였다. 이후 이보는 외숙부인 당계(唐契)를 따라 이오(伊吾)로 망명하여 [[유연 제국]]에 신종하였다. 이보를 따른 유민들이 거의 2,000명이나 되었다. 이보는 공손히 예를 갖추며 대접하고 그들의 인심을 얻었으며, 한편으로 북량에 대한 복수심을 품고 있었다. 이후 442년, [[북위]]의 [[태무제]]가 [[저거무휘]]를 토벌할 때 저거무휘가 성을 버리고 달아나자, 이보는 이오에서 돈황으로 돌아가 성곽을 수리하며 부흥의 기회를 노렸으며, 아우인 이회달(李懷達)을 북위로 보내 귀순할 뜻을 밝혔다. 태무제는 이보의 충심을 칭찬하여 이회달을 산기상시(散騎常侍), 돈황태수(敦煌太守)로 임명했다. 또한 이보를 사지절(使持節), 시중(侍中), 도독서수제군사(都督西垂諸軍事), 진서대장군(鎭西大將軍), 개부의동삼사(開府儀同三司) 겸 호서융교위(護西戎校尉), 사주목(沙州牧), 돈황공(敦煌公)으로 삼은 뒤 돈황의 수비를 맡겼으며, 4품 이하의 관료들은 황제의 뜻에 따라 직접 임명할 수 있게 하였다. 이보는 444년에 입조하여 평성에 머물며 외도대관(外都大官)으로 임명되었다. 진남장군(鎭南將軍), 병주자사(幷州刺史)를 지내다가 내도대관(內都大官)으로 제수되었으며, 사마문사를 대신하여 회황(懷荒)에 진수하다가 진북장군(鎭北將軍)으로 전임되었다. 이후 459년에 죽어서 진북장군으로 추증되고 선(宣)이라는 시호를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