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wiki style="margin: -5px -10px; padding: 5px 10px; background-image: linear-gradient(115deg, #cd313a 50%, #0047a0 50%)" '''[[독립유공자|{{{#fff 대한민국의 독립유공자}}}]][br]{{{+1 이봉래 }}}[br]李鳳來'''}}} || || '''본관''' ||[[진성 이씨]] || ||<|2> '''출생''' ||[[1903년]] [[12월 25일]] || ||[[강원도]] [[삼척군]] [[근덕면]] 동막리[* [[진성 이씨]] 집성촌이다.] || ||<|2> '''사망''' ||[[1934년]] [[11월 10일]] || ||[[강원도]] [[삼척군]] || || '''가족''' ||아내 심녀[br]아들 이용운, 이건, 이상[br]딸 이금남, 이춘남 || || '''묘소'''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1-1묘역-492호 || || '''상훈''' ||건국훈장 애족장 || [목차] [clearfix] == 개요 == [[대한민국]]의 [[독립유공자]].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받았다. == 생애 == 이봉래는 1903년 12월 25일 강원도 [[삼척군]](현 [[삼척시]]) 근덕면 동막리에서 태어났다. 삼척청년동맹에 가입한 그는 1931년 11월 30일에 강원도 삼척군의 근덕(近德)에서 노곡(盧谷) 간의 도로공사 개설 때 근덕면사무소를 습격하여 수백 명의 군중과 함께 농민시위를 주도하다가 일경에 체포되었다. 1932년 12월 8일 함흥지방법원에서 소위 주거침입, 폭력 및 보안법 위반 등으로 징역 3년형을 선고받고 공소하여 1933년 12월 14일 경성복심법원에서 징역 2년 6월형이 확정되어 옥고를 치르던 중 고문을 받다가 1934년 11월 10일에 옥중 순국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0년 이봉래에게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 여담 == 후손들의 말에 의하면 부유한 집안이었던 그는 당시 동막리 일대에서 제일가는 부자였는데, 독립운동을 하기 위해 본인이 가지고 있던 땅을 다 팔아서 독립자금을 모아 독립운동에 보탰다고 한다. 2021년 6월 29일, 아들인 이상의 가문이 병역명문가에 선정되어 국무총리 표창을 받았다.[[https://www.mk.co.kr/news/politics/view/2021/06/628683/|#]] [[분류:한국의 독립운동가]][[분류:진성 이씨]][[분류:삼척시 출신 인물]][[분류:1903년 출생]][[분류:1934년 사망]][[분류:건국훈장 애족장]][[분류:국립대전현충원 안장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