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류:조선의 문관]][[분류:공조판서]][[분류:1556년 출생]][[분류:1637년 사망]][[분류:벽진 이씨]][[분류:서울특별시의 유형문화재]] [목차] [clearfix] == 개요 == 조선 중기의 문신. 이름은 이상길(李尙吉), 본관은 [[벽진 이씨|벽진(碧珍)]]이며 [[자(이름)|자]]는 사우(士祐), [[아호|호]]는 동천(東川), [[시호]]는 충숙(忠肅)이다. == 생애 == 1556년([[명종(조선)|명종]] 11년)에 [[한성부]]에서 태어났다. 14세이던 1579년([[선조(조선)|선조]] 13년)에 [[진사]]시에 합격하고, 6년 뒤에 문과에 을과로 급제했다. 감찰을 시작으로 관직 생활을 시작했고, 이후 [[호조(조선)|호조]]와 [[병조]]의 좌랑 직을 거쳐 [[사간원]]의 정언 직과 지제교 직을 맡아 일했다. [[임진왜란]] 때에는 예조 좌랑으로서 [[선조(조선)|선조]]의 어가를 따라갔고, 어가가 [[평양부|평양]]에 도착할 무렵에 강원감사로부터 종사관으로 임명받았다. 1594년(선조 27년)에는 [[병조]] 정랑과 [[익산시|익산]] 군수 직을 제수받았고, [[정유재란]]이 일어나자 [[군사]]들을 모아 [[남원시|남원]]으로 내려가 [[명나라]] 군과 합류하여 [[남원성 전투]]에서 왜군과 싸웠다. 이때 이상길의 부대에서 탈영한 사람이 아무도 없는 것을 본 명나라 군이 감탄하며 상을 주었다. 전쟁이 끝난 직후인 1599년(선조 32년)에는 [[전라도]] 광주목의 [[목사(관직)|목사]]로 부임했는데 이때 백성들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민생 안정에 힘을 기울여 백성들의 마음을 얻었다. 그래서 그 공로로 조정에서 그의 품계를 정3품 통정대부로 승격시켰다. 1602년(선조 35년)에는 [[사헌부]]의 [[탄핵]]을 받아 [[황해도]] [[풍천군|풍천]]으로 귀양갔다. 왜냐하면 그가 사간원 정언으로 있던 시절에 [[정여립의 난]]이 일어났는데, 그때 [[정인홍]], 최영경 등을 [[정여립]] 일당으로 몰았고 최영경이 그 여파로 옥사했기 때문이었다.[[http://sillok.history.go.kr/id/kna_13503001_002|#]] 6년 가까이 유배 생활을 하다가 1607년(선조 40년)에 풀려났다. 이후에는 강원도 회양부사, 평안도 안주목사, 평안도 용천부사 등 다시 지방관으로서 활동했다. 1616년(광해군 8년)에는 호조 참의로 임명받기도 했다. 그러나 하필 과거에 악연이 있었던 정인홍이 당시 실세였기 때문에 결국 얼마 못 가서 파직당하고 말았다.[[http://sillok.history.go.kr/id/kob_10701029_001|#]] 이후 동지사로 임명받아 [[명나라]]에 다녀오고, 서도 독운사 직을 제수받아 [[황해도]] 지역에서 군인들의 급료로 쓸 식량을 실어다 주는 일을 관리 감독했다. 용천 부사로 있던 1621년(광해군 13년)에 [[청나라|후금]]에 쫓긴 [[명나라]] 장수 [[모문룡]]이 [[압록강]] 하구에 있는 조선 영토 [[가도]]에 주둔하자 모문룡을 설득하려 했다.[[http://sillok.history.go.kr/id/kob_11310030_003|#]] [[인조]]가 즉위한 후에는 동부승지에 제수받았다가 곧 병조 참의로 임명받고 얼마 지나지 않아 접반사로서 모문룡을 상대하는 조선 측 대표가 되었다. 이후 평안감사로 임명받았는데, 재직 중이던 1624년(인조 2년)에 [[이괄의 난]]이 일어나자 [[안주시|안주]]에서 이괄 가족들의 목을 베는 등 반란 진압에 앞장섰다. 그 공로로 훗날 종2품 가의대부 품계를 받았다. 1년 뒤 평안감사 직에서 물러났는데 인조는 이상길이 일을 잘했다고 하여 다시 임명하려 했으나 이상길이 사양하여 무산되었고, 대신 호조참판 겸 부총관 직을 맡게 되었다. 1626년(인조 4년)에는 [[모문룡]]이 군사를 일으킬 것이라는 유언비어가 돌아 민심이 흉흉해지자 [[인조]]의 명을 받고 모문룡의 동태를 살폈다. 다음해인 1627년(인조 5년)에 [[정묘호란]]이 발발하자 군량미 수천 석을 수운을 통해 [[인조]]가 피신해있던 [[강화도]]로 보냈고 [[용천]]에서 청나라 군과 싸워 승리했다. 이듬해에는 예조 참판 직을 맡았고 전주부윤으로 부임했으나 하필 그 시기에 부 내에서 역모를 꾀하다 사형당한 사람이 있어 얼마 못가 파직당하고 말았다. 1632년(인조 10년)에는 [[병조]] 참판 직을 맡았고 대사간과 대사헌도 두 번 지냈다. 3년 뒤인 1635년(인조 13년)에는 80세가 되어 기로소에 들어갔으며, 자헌대부 품계를 수여받고 [[공조판서]]를 역임했다. 1636년(인조 14년) 말에 [[병자호란]]이 일어났다. 이상길은 이때 [[종묘]]와 [[사직]]의 위패를 들고 [[강화도]]로 피난갔다. 다음해인 1637년(인조 15년) 1월에 조선의 패배가 가까워지자 이에 부끄러움을 느껴 목을 매어 [[순국|순절]]했다. 향년 82세였다.[* 당시 나이 셈법인 [[세는나이]]를 적용한 기준이다. 만으로는 80세이다.] == 사후 == [[인조]]는 그의 죽음을 애석하게 여겨, [[좌의정]] 직을 추증했고 [[강화도]]에 있는 충렬사에 그의 위패를 받들어 모시게 했다. 인조의 아들 [[효종(조선)|효종]]은 1657년(효종 8년)에 시호 '충숙(忠肅)'을 하사했으며, 그 때 시장[* 諡狀. 어느 신하에게 시호를 내려달라고 왕에게 건의할 때 그 신하의 생존 행적을 적어 올린 글.]을 [[김육]]이 적었다. 1666년(현종 7년)에는 [[효종(조선)|효종]]의 아들 [[현종(조선)|현종]]이 그의 신위를 [[불천위]][* 5대가 지나도 계속 [[제사]]를 지낼 수 있게 나라에서 정한 신위.]로 지정하고 [[사당]] 안에 [[초상화]]를 모셔 보관하도록 했다. 사당은 원래 [[한성부]] [[가회동]]에 세웠는데, 훗날 [[순조]] 시기에 이상길의 종손이 남원으로 거처를 옮겼기 때문에 현재는 [[전라북도]] [[남원시]] 덕과면 사곡리에 자리하고 있다. == 영정 == ||<-5> [[파일:서울특별시 휘장_White.svg|width=30&height=30]] '''[[서울특별시의 유형문화재|{{{#ffffff 서울특별시의 유형문화재}}}]]''' || || 67호[* 68호 봉원사 대웅전은 화재로 불탔기 때문에 [[서울특별시]]에서 1993년 9월 23일에 해제했다.] ||<|2> ← || '''69호''' ||<|2> → || 70호 || || [[흥천사 명부전]] || '''충숙이공 영정''' || [[이상길(1556)#s-5|충숙공 이상길 묘역]] || ---- ||<-2> [[파일:서울특별시 휘장_White.svg|width=28]] '''[[서울특별시의 유형문화재|{{{#ffffff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 제69호}}}]]''' || ||<-2> {{{#fff {{{+1 '''충숙이공 영정'''}}}[br]{{{-1 忠肅李公影幀}}}}}} || ||<-2>{{{#!wiki style="margin: -10px"; margin-top: -5px; margin-bottom: 16px" [include(틀:지도, 장소=서울특별시 노원구 중계로 57, 너비=100%, 높이=100%)]}}}|| || '''{{{#fff 소재지}}}''' || [[서울특별시]] [[노원구]] 중계로 57 ([[하계동]]) || || '''{{{#fff 시대}}}''' || [[조선시대]] || || '''{{{#fff 분류}}}''' || 유물 / 일반회화 / 인물화 / 초상화 || || '''{{{#fff 수량 / 면적}}}''' || 1폭 || || '''{{{#fff 지정연도}}}''' || [[1988년]] [[4월 23일]] || || '''{{{#fff 관리자[br](관리단체)}}}''' || 이상원[[https://www.heritage.go.kr/heri/cul/culSelectDetail.do?pageNo=1_1_1_1&ccbaCpno=2111100690000|#]] ||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충숙이공영정.jpg|width=100%]]}}} || || {{{#F0AD73 ''' 이상길의 영정[* [[https://www.heritage.go.kr/heri/cul/imgHeritage.do?ccimId=1636224&ccbaKdcd=21&ccbaAsno=00690000&ccbaCtcd=11|사진 출처 - 문화재청 국가문화유산포털.]]] '''}}} || [clearfix] ---- 가로 93cm, 세로 186.5cm로, [[비단]]에 그렸다. 그림 속에서 이상길은 연한 분홍빛의 단령과 검은 [[사모]]를 착용하고 몸을 약간 오른쪽으로 튼 채 [[의자]]에 앉은 모습을 하고 있다. == 묘역 == ||<-5>
[[파일:서울특별시 휘장_White.svg|width=30&height=30]] '''[[서울특별시의 유형문화재|{{{#ffffff 서울특별시의 유형문화재}}}]]''' || || 69호 ||<|2> ← || '''70호''' ||<|2> → || 71호 || || [[이상길(1556)#s-4|충숙이공 영정]] || '''충숙공 이상길 묘역''' || [[조선저축은행#s-3.1|옛 제일은행 본점]] || ---- ||<-2> [[파일:서울특별시 휘장_White.svg|width=28]] '''[[서울특별시의 유형문화재|{{{#ffffff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 제70호}}}]]''' || ||<-2> {{{#fff {{{+1 '''충숙공 이상길 묘역'''}}}[br]{{{-1 忠肅公 李尙吉 墓域}}}}}} || ||<-2>{{{#!wiki style="margin: -10px"; margin-top: -5px; margin-bottom: 16px" [include(틀:지도, 장소=서울특별시 노원구 중계로 57, 너비=100%, 높이=100%)]}}}|| || '''{{{#fff 소재지}}}''' || [[서울특별시]] [[노원구]] [[하계동]] 산 16-1번지 || || '''{{{#fff 시대}}}''' || [[조선시대]] || || '''{{{#fff 분류}}}''' || 기록유산 / 서각류 / 금석각류 / 비 || || '''{{{#fff 수량 / 면적}}}''' || 분묘 2基, 석물 7基, 토지 237.1㎡ || || '''{{{#fff 지정연도}}}''' || [[1988년]] [[4월 23일]] || || '''{{{#fff 관리자[br](관리단체)}}}''' || 벽진 이씨 충숙공파 종회 ||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충숙이공신도비.jpg|width=100%]]}}} ||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충숙이공신도비 (1).jpg|width=100%]]}}} || || {{{#F0AD73 ''' 이상길 묘역에 있는 이상길의 신도비와 비각[* [[https://www.heritage.go.kr/heri/cul/imgHeritage.do?ccimId=1636226&ccbaKdcd=21&ccbaAsno=00700000&ccbaCtcd=11|첫 번째 사진 출처 - 문화재청 국가문화유산포털.]][br][[https://www.heritage.go.kr/heri/cul/imgHeritage.do?ccimId=1636225&ccbaKdcd=21&ccbaAsno=00700000&ccbaCtcd=11|두 번째 사진 출처 - 문화재청 국가문화유산포털.]]] '''}}} || [clearfix] ---- 현재 [[서울특별시]] [[노원구]] [[하계동]]에 이상길의 묘가 있다. 이상길의 묘 동남쪽에 그의 일생과 업적을 적은 신도비가 있다. 받침돌 위에 비신을 올리고 그 위에 팔작지붕 형태의 머릿돌을 올린 모습이다. [[송시열]]이 비문을 짓고, [[송준길]]이 글씨를 썼다. 현재 신도비를 보호하기 위한 비각이 세워져있는데 이는 조선시대가 아니라 현대에 들어 지은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