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clude(틀:구당서)] [include(틀:신당서)] 李商隱, 812 ~ 858 자는 의산(義山), 호는 옥계생(玉谿生). [[당나라]] 말기 하남 출생. [[두목(당나라)|두목]]과 더불어 이두(李杜)[* 혹은 이백+두보를 대이두, 이상은+두목을 소이두라고 부르기도 한다.]로 부른다. 한미한 하급관리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10세 때 아버지가 죽음으로 인해 그는 큰아버지에게 생활을 의지하고 학문을 배우게 되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계를 위해 서책 필사업에 종사했다. 이로 인해 그는 관리가 되어 성공하려는 야망을 품게 되었다. 당시 정국은 진사 출신의 우승유파와 귀족 출신의 이덕유파로 나뉘어져 있었는데, 우승유파의 중진 영호초가 이상은을 거두어 그의 아들 영호도와 교제도 시키며 학문도 가르쳐주는 등 많이 밀어준 덕택에 26세 때 벼슬자리에 오르게 되었다. 그러나 이듬해 영호초가 죽고 나자 평소 이상은의 재능을 높이 사던 왕무원이 그에게 딸을 주며 거두어들였는데, 왕무원은 이덕유파였기에 이는 당파를 갈아탄 것이다. 어쨌든 이 덕에 문인관료의 교과서적 출세코스의 시작인 비서성 교서랑에 오르게 되었다. 그러나 이상은의 배반에 빡친 우승유파가 격렬히 반대하고 배은망덕한 놈이라고 비난하는 바람에 교서랑에 오른 바로 그 해 홍농위로 좌천당하며 성공가도와는 영원한 작별을 고하게 되었다. 5년 남짓한 시간이 흐르고 그나마 사위를 챙겨주던 왕무원 역시 세상을 떠나자 그는 남은 여생을 이 당파에 빌붙었다 쫓겨나면 저 당파의 바짓가랑이에 빌붙는 식으로 지냈다. 그의 쓸쓸한 여생을 상징하는 일화라면, 우승유파에서 일자리를 잃어버린 그가 영호도에게 가서 사정사정하자 영호도가 욕하고 비웃으면서도 비실권직 하나를 던져주는 장면이라고 할 수 있다. 그는 스스로를 '''달제어(獺祭魚)''', 식사를 하기 전에 사냥감을 가지런히 늘어놓는 [[수달]]에 시를 짓기 전 온갖 책들을 주변에 깔아놓는 스스로의 모습을 빗대어 자평했다. 후세에 평하길 그의 시체는 100가지 보석으로 만든 방과 1,000가지 실로 짠 그물 같으며, 옷 아래에는 화려하고 풍요로운 퇴폐와 권태의 분위기가 흐르고 있다고 했다. 한시에서 당이라고 하면 곧 한시의 성세를 가리킨다. 초당부터 성당을 지나 중당까지 드높은 경지에 다다른 여러 시인들이 출현했으며, 그 갖갖 시인들의 다종다양한 시풍으로 시의 정수를 화려하게 꽂피웠다. 당시의 최후를 뜻하는 만당시인인 이상은은 전대의 많은 거인들에게 고루 영향을 받았다. 영호초에게서 수학한 변려문을 통해 한, 위, 6조 고문을 비롯 [[한유]]와 [[유종원]]의 진수를 맛보았으며, 젊은 날에는 [[두보]]를 전거로 삼아 수련했으며 이하의 상징적 기법을 애호했다. 기발한 구상, 화려한 수사, 섬세한 시어, 변려문의 능란한 활용으로부터 나오는 아름다운 울림, 상징과 암시를 거듭 헤매이며 감춘 듯 드러낸 듯 몽롱한 분위기, 서적의 궁전을 노닐듯 경전과 잡문을 가리지 않고 채취한 전거를 기묘한 공상으로 부풀려 난삽한 한 구 한 절이 정교함으로 파격임에도 되려 말쑥하고 정격임에도 아른거리는 언어의 미로를 구축하여 완성된 한 수의 시는 기이한 낭만적 정서와 결합해 우수를 자아내는 절묘한 솜씨로 당대의 시인에게도 많은 영향을 끼침은 물론 시인 자신의 고적한 일생과 더불어 돌이키면 쓸쓸한 애수를 불러일으키는 바 북송 초에는 양억 등이 추앙, 서곤체로 불리며 유행하게 되었다. 송 중기에 이르러 구양수 매요신 등이 섬교한 시풍이 유행하는 것의 기원을 이상은으로 보고 커다란 비판을 가했으나, 뒤이어 [[왕안석]]이 이상은의 화려한 시어 뒤에 숨겨진 통찰력과 성실한 인격을 짚음으로 이후는 대개 이 평을 따르게 되었다. 문아하게 사랑을 읊은 시 때문에 후세에 그의 연애담도 후세 사람들 입에 많이 오르내리곤 했다. 이혼했는지 사별했는지 몰라도 왕무원의 딸과도 재혼이며 왕씨마저도 오래는 못 산 편이고[* 왕씨의 나이가 몇인지는 확인할 수 없지만 아마 혼인 당시 27세였던 남편과 또래였다면 40대 중반에 죽은 셈이고, 10대 후반에 결혼했다면 30대 후반에 간 셈.] 시인 자신도 얼마 지나지 않아 죽었다. 그의 여러 애정시에 등장하는 많은 인물상이 진실인지, 거짓인지, 일부만 그러한지는 알 수 없지만 말이다. 그의 시는 후대에도 애송되며, 드라마 허준과 신조협려에 삽입되었던 2편의 무제시[* 허준에 나오는 시의 원문은 다음과같다. 八世偸照鏡, 長眉已能畵。十世去踏靑, 芙蓉作裙衩。十二學彈箏, 銀甲不曾卸。十四臟六親, 懸知猶未嫁。十五泣春風, 背面鞦韆下。][* 신조협려에 나오는 시의 원문은 다음과 같다. 相見時難別亦難,東風無力百花殘。春蠶到死絲方盡,蠟炬成灰淚始乾。曉鏡但愁雲鬢改,夜吟應覺月光寒。蓬萊此去無多路,青鳥殷勤為探看。]가 우리나라에서는 가장 알려진 매체에 삽입된 예시일 것이다. [[삼국지연의]] 형성 연구에 자주 인용되는 시인이기도 하다. 아들 곤사를 소재로 한 교아시(驕兒詩)[* '驕'는 일반적으로 교만하다는 뜻이지만 시의 내용에 비추어 보면 여기에서는 사랑스럽다는 뜻이 맞다.]에서 '或謔'''張飛'''胡 或笑'''鄧艾'''吃'(혹은 [[장비]]의 수염을 놀리고, 혹은 [[등애]]가 말더듬는다고 웃기도 한다)는 구절이 나와 당나라 때 삼국 이야기의 일면을 엿볼 수 있기 때문. 참고로 이 시는 이상은의 [[팔불출]]기와 시인의 씁쓸한 인생을 슬며시 보여주는데, 어린 아들 자랑을 한참 늘어놓다가 자신의 꼬인 관직생활을 슬쩍 드러내며 아들이 자기처럼 관료가 되어서 고생하기보다는 오랑캐를 무찌르는 당당한 장수가 되기를 바라는 내용이기 때문이다. == 기타 == 이상은의 시는 중국에서 고등학교 때 배운다. [[분류:당나라의 시인]][[분류:수당시대/인물]][[분류:812년 출생]][[분류:858년 사망]] [include(틀:문서 가져옴, title=이상은, version=89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