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clude(틀:대한민국 학술원 회원)] ---- [[파일:external/dimg.donga.com/6949619.1.jpg]] 李相殷 [[1905년]] [[7월 19일]] ~ [[1976년]] [[12월 29일]][* 음력 [[11월 9일]].] [목차] == 개요 == 대한민국의 철학자, 교육자. 본관은 [[양성 이씨|양성]](陽城)[* 판사파 26세 상(相) 항렬.][* [[http://www.newsfc.co.kr/news/articleView.html?idxno=12244|#]]], 호는 경로(卿輅)이다. == 생애 == 1905년 7월 19일 [[함경남도]] [[정평군]] 파춘면 화동리(현 정평군 화동리)에서 아버지 이수영(李秀永, 1889년 8월 3일생)과 어머니 [[청주 한씨]] 한국찬(韓國瓚)의 딸 사이의 5남 1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https://m.cafe.daum.net/smoohwa/brGN/138?listURI=%2Fsmoohwa%2FbrGN|#]] 어려서부터 한학을 익혔으며, 15세 되던 1919년 [[청주 한씨]] 한격순(韓格順, 1903년 11월 21일생)[* 한시연(韓始淵, 1887년생)과 [[경주 김씨]] 김영규(金永奎)의 딸 사이의 2남 3녀 중 장녀이다.]과 혼인하였다. 17세 되던 1921년 [[중국]] 유학을 떠나 1922년 9월 [[베이징]] 안휘중학(安徽中學)에 입학하여 다니다가 이듬해인 1923년 9월 [[톈진]]의 난카이중학(南開中學)에 전학하여 다녔다. 1925년 9월 고급 1학년 수료자격으로 [[베이징대학]](北京大學) 예과에 응시, 합격하여 다녔다. 1927년 9월 예과를 수료한 뒤 베이징대학 [[철학과]]에 입학하여 1931년 9월 졸업하고 귀국하였다. 귀국 후에는 [[경기도]] [[경성부]] [[가회동]](현 [[서울특별시]] [[종로구]] [[가회동]])에 본적을 옮겼다. 1932년 [[홍익대학교사범대학부속고등학교|경성외국어학원]](京城外國語學院)[* 1943년 9월 [[일본 제국|일제]]가 영어 교육을 금지시키자 성북중학원(城北中學園)으로 변경하였다가 그해 12월 경북중학원(京北中學園)으로 개칭하였다. [[8.15 광복]] 후 잠시 휴원되었다가 1949년 9월 성북중학원으로 다시 개원하였고, 1954년 4월 재단법인 계원학원 산하 성북중학교와 성북고등학교로 개편되었다. 1970년 [[학교법인 홍익학원]]에서 계원학원을 흡수·합병하고, 1972년 6월 교명을 홍익고등학교로 변경하였다. 1977년 3월 교명을 다시 [[홍익대학교사범대학부속고등학교]]로 개칭했다.[[https://archive.sb.go.kr/isbcc/home/u/story/view/942.do|#]]] 강사가 되었다가 이듬해인 1933년 3월 경성부 주재 중국총영사관에서 한문비서(韓文秘書)로 채용되어 1945년 8월까지 재직하기도 하였다. 또한 1933년 4월부터 1940년까지 [[보성전문학교]] 강사로 위촉되어 활동했다. 1945년 한중문화협회(韓中文化協會)를 창설하여 기관지 『한중문화(韓中文化)』를 발간하였으며, 그 해 우익정당조직에 참가하였다가 정치활동에 뜻을 버리고 1945년 11월 보성전문학교에 돌아와 교수로 임용되었다. 1946년부터 퇴임하던 1970년까지 [[고려대학교 문과대학]] 철학과 교수로 재직하였다. 이 기간 중 1947년 9월 고려대학교 학생감을 겸임했고, 1952년 9월부터 1960년 3월까지 8년간 고려대학교 문과대학장을 지냈다. 그리고 1956년 6월에는 중국학회를 조직, 초대회장에 임명되어 1962년 5월까지 재임하였고, 1956년 7월에는 한국철학회 부회장에 취임했다. 1956년 [[미국 국무부]] 초청 교환교수로 도미하여 [[하버드대학교]]·[[예일대학교]] 등에서 동서비교철학을 연구하였다. 그 후 귀국하여 고려대학교 부설 아세아문제연구소의 초대 소장에 취임하였다. 연구소가 설립된 1957년 9월부터 1969년까지 13년간 소장으로 재직하면서 이 연구소 발전에 크게 기여하였다. 주요 사회활동으로는 한글전용반대운동을 들 수 있다. 그리고 1960년 [[3.15 부정선거]]에 항거하는 재경교수단궐기대회 소집인의 일원으로 그해 4월 25일 [[4.19 혁명]] 당시 시국선언문을 기초하고, 교수단 시위에 앞장섰다. 그 덕분에 [[5.16 군사정변]] 후에는 정치교수명단에 포함되기도 하였다. 중국철학연구에 힘을 기울여 중국철학의 현대적 의의를 모색하는 데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1960년 4월 23일 [[대한민국 학술원]] 추천회원에 임명되고, 그 해 한국휴머니스트회 회장이 되었으며, 58세 되던 1962년 5월 [[고려대학교]]로부터 명예 철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1963년에는 한중협회호적장학금관리위원, 갑오혁명기념사업협회 이사와 부회장에 추천되었다. 1965년 7월에는 한국 [[유네스코]] 위원에 위촉되었다. 1976년 12월 29일 [[서울특별시]] [[서대문구]] [[갈현동(서울)|갈현동]][* 현 [[은평구]] [[갈현동(서울)|갈현동]]] 자택에서 [[숙환]]으로 별세했다.[[https://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aver?articleId=1976123000209207011&editNo=2&printCount=1&publishDate=1976-12-30&officeId=00020&pageNo=7&printNo=16999&publishType=00020|#]] 저서로는 『현대와 동양사상』(1963)·『퇴계의 생애와 사상』(1973)·『유학(儒學)과 동양문화』(1976) 등이 있다. '맹자의 성선설에 관한 연구'(1955)·'휴머니즘에서 본 유교사상'(1961) 외 많은 논문이 있다. [[분류:인문과학 교수]][[분류:대한민국의 철학자]][[분류:정평군 출신 인물]][[분류:양성 이씨]][[분류:1905년 출생]][[분류:1976년 사망]][[분류:베이징대학 출신]][[분류:고려대학교 재직]][[분류:홍익대학교 재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