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0년]] ~ [[1986년]] [목차] == 개요 == [[친일반민족행위자]] [[이용구]]의 아들이다. == 생애 == 1909년 대한제국 한성부에서 이용구와 2번째 부인 [[이화사]](李華師) 사이에서 태어났다. 세 살 때 [[이용구]]가 죽은 이후 [[일본]]의 [[나고야]]에서 자랐다. 그를 낳기 전에 조카인 이현규(李顯奎)를 [[양자(가족)|양자]]로 두었으나 이석규를 [[늦둥이]]로 보고 바로 [[파양]]하였다. 일본 이름이 여러 가지가 있는데 大東碩奎, 大東國男, 佐藤國郞이다. [[성씨]]에서부터 알 수 있다시피 죽을 때까지 대동아 공영을 주장했다. 특히 '大東國男'는 '대동국의 남아'라는 뜻이다. [[1937년]] 귀국해 아버지가 창설한 [[시천교]]를 [[대동일진회]]로 재발족해 [[창씨개명]]을 강권하는 등의 활동을 했다. 1939년 일한합병 공로자 감사 위령제를 개최해 [[이용구]], [[송병준]], [[이완용]] 등의 제사를 지냈다. [[광복]] 후 [[일본]]으로 건너가 이용구 전기[* 이용구의 생애(李容九の生涯), 時事通新社, 1961.] 등을 저술하였다. 또한 [[일제]]와 아버지 [[이용구]]를 옹호하는 활동을 하였다. 1986년 일본에서 사망했다. 향년 76세. 그는 아버지 이용구가 평생 송병준의 농간 속에 이용만 당했다고 주장하였다.[[http://pub.chosun.com/client/news/viw.asp?cate=C06&nNewsNumb=20150818038&nidx=18039|#]] 2002년 민족정기를 세우는 국회의원 모임이 발표한 친일파 708인 명단과 2008년 공개된 민족문제연구소의 친일인명사전 수록자 명단에 그와 그의 아버지인 이용구와 함께 선정되었다. [각주][include(틀:문서 가져옴, title=이용구, version=142, paragraph=2)] [[분류:일제강점기의 인물]][[분류:서울특별시 출신 인물]][[분류:한국계 일본인]][[분류:벽진 이씨]][[분류:1910년 출생]][[분류:1986년 사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