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류:1775년 출생]][[분류:1817년 사망]][[분류:조선의 왕자]][[분류:조선의 왕족]][[분류:은언궁 종주]][[분류:서출]] [include(틀:역대 은언궁 주인)] ---- ||<-2> {{{#!wiki style="margin: -5px -10px; padding: 5px 10px; background-image: linear-gradient(to right, #355E80, #4682b4 20%, #4682b4 80%, #355E80); color: #FFD400" '''은언궁 제2대 궁주'''}}} || ||<-2> {{{#!wiki style="margin: -5px -10px; padding: 5px 10px; background-image: linear-gradient(to right, #190d43, #29176e 20%, #29176e 80%, #190d43); color: #FFD400" '''대한제국 장조의 손자[br]{{{+1 이성득 | 李成得}}}'''}}} || ||<-2> {{{#!wiki style="margin: -5px -10px; padding: 5px 10px; background-image: linear-gradient(to right, #751232, #94153e 20%, #94153e 80%, #751232); color: #FFD400" '''조선 장조의 손자[br]{{{+1 이성득 | 李成得}}}'''}}} || ||<|2> '''출생''' ||[[1775년]] || ||[[조선]] [[한성부]][br](現 [[서울특별시]] [[종로구]]) || ||<|2> '''사망''' ||[[1818년]] [[1월 3일]] (향년 43세) || ||[[조선]] [[강화도]] 관아[br](現 [[인천광역시]] [[강화군]]) || || '''묘소''' ||미상 || ||<-2> {{{#!wiki style="margin: 0 -10px -5px; min-height: 26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 '''본관''' ||[[전주 이씨]] || || '''휘''' ||성득(成得) || || '''부모''' ||부친 [[은언군]][br]적모 상산군부인 [[송(성씨)|진천 송씨]] || || '''형제자매''' ||8남 1녀 중 5남 || }}}}}}}}} || [목차] [clearfix] == 개요 == [[조선]] 후기의 왕족, 평민. [[사도세자]]의 서자인 [[은언군]] 이인의 서자로 생모는 미상이다. [[상계군]] 이담, 이창순, 이창덕의 이복 동생이자 [[풍계군]] 이당, [[전계대원군]] 이쾌득(이광)의 이복 형이다. == 생애 == [[은언군]]의 정실 부인 상산군부인 송씨 소생 아들 이창순과 이창덕[* 그의 이복 형들이다.]은 모두 일찍 죽었고, [[상계군]] 이담도 [[홍국영]]의 입양 사건으로 탄핵받다가 의문의 독살을 당했으므로, [[1812년]](순조 12) 당시 [[강화도]]에 유배된 이철득, [[풍계군|이당]], [[전계대원군|이쾌득]] 등 살아남은 [[은언군]]의 아들들 중에는 그가 최연장자였다. [[이쾌득]]은 [[전계대원군]] 이광으로 밝혀졌지만 [[1780년]]생 이철득은 1783년생인 풍계군과 출생년대가 맞지 않아 동일 인물로 보기 힘들다. [[상계군]] 이담 사건과 관련되어 일가족이 [[강화도]]로 유배갈 때 따라 유배되었다. 간간히 보이는 기록 외에는 그의 행적에 대한 것은 미상이다. 철종 즉위 후 은언군, 상계군에 관련된 자료들을 대량으로 말소시켰기 때문이다. 그는 한쪽 발과 한쪽 팔이 마비되었다는데 제때 진료를 받지 못했다. [[1817년]] [[11월 27일]] [[강화군/역사#s-8|강화부]] 관아에서 고문을 받다가 사망하였다. 그러나 철종 즉위 후 [[은언군]], [[상계군]]과 관련된 자료들을 대량으로 세초, 인멸해버려서 그가 어떤 이유로 관아에서 고문을 받았는지는 알수 없다. 당시 43세였고 그는 미혼이었다. == 기타 == 그의 죽음을 계기로 [[순조]]는 [[풍계군|이당]], 이철득, [[이쾌득]] 등 그의 동생들의 석방을 고민하다가 [[1820년]]과 [[1822년]] 일시적으로 풀어주었다.[* 그리고 그때 관례를 치루고 성인식을 했으며, 이당은 첩을 두고 서자를, 이쾌득은 이해동으로 바꿨다가 이광으로 이름을 바꾸고 장가를 간다.] 제일 늦게 석방된 인물은 이쾌득으로 1830년 석방되었다. 그가 [[은언군]]의 봉사손으로 정식 추대되지는 않았지만 [[은언군]]의 살아남은 자녀들 중에는 그가 최연장자였고 당연히 제사에 대한 권리는 조선시대 당시 법률상 그에게 있었다. 그러나 [[철종(조선)|철종]] 즉위 후 철종이 은언군 가문 사람들에게 [[시호]]나 [[군(작위)|작호]], [[품계]]를 추증했을 때 이성득은 제외당했고 봉사손도 지명받지 못했다.[* 이철득도 함께 제외되었다.] 그래서 은언군가의 후계는 이복형 [[상계군]]의 양자인 [[익평군]]이 이었고 이성득은 은언군가의 사손으로 제대로 인정받지 못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