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wiki style="margin: -5px -10px; padding: 5px 10px; background-image: linear-gradient(115deg, #cd313a 50%, #0047a0 50%)" '''[[독립유공자|{{{#ffffff 대한민국의 독립유공자}}}]]'''[br] {{{#ffffff '''{{{+1 이수각}}}'''[br]'''李壽珏'''}}}}}} || || '''자''' ||양옥(兩玉) || || '''본관''' ||[[재령 이씨]][* 영해파(寧海派)-석계공파(石溪公派) 22세 수(壽) 항렬.] || ||<|2> '''출생''' ||[[1872년]] [[7월 13일]] || ||[[경상도]] [[영덕군|영해도호부]] 서면 신리동[br](現 [[경상북도]] [[영덕군]] [[창수면]] 신리리)[* [[https://theme.archives.go.kr/next/indy/viewIndyDetail.do?archiveId=0001165795&evntId=&evntdowngbn=N&indpnId=0000107557&actionType=det&flag=2&search_region=|1919년 9월 30일 수형인명부]]에 따르면, 창수면 신리리는 출생지고 창수면 창수리는 본적/주소지이다.] || ||<|2> '''사망''' ||[[1923년]][*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44811|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https://e-gonghun.mpva.go.kr/user/ContribuReportDetail.do?goTocode=20001&pageTitle=Report&mngNo=615|독립유공자 공적정보]]에는 1955년에 별세했다고 적혀 있으며, 재령이씨영해파보 권3 8쪽에는 1936년 12월 22일 별세한 것으로 등재돼 있다.] [[4월 9일]] (향년 82세) || ||[[강원도]] [[삼척군]] 삼척면 [[오분동|오분리]][br](現 [[강원도]] [[삼척시]] [[오분동]]) || || '''묘소''' ||[[경상북도]] [[영덕군]] [[창수면]] 신리리 || || '''상훈''' ||[[건국훈장]] 애국장 추서 || [목차] [clearfix] == 개요 == [[대한민국]]의 [[독립유공자]].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되었다. == 생애 == [[1872년]] [[7월 13일]] [[경상도]] [[영덕군|영해도호부]] 서면 신리동(現 [[경상북도]] [[영덕군]] [[창수면]] 신리리)에서 아버지 이약영(李若榮)과 어머니 [[무안 박씨]][* 박시영(朴始永)의 딸이다.] 사이에서 3형제 중 막내 아들로 태어났다. 이후 영덕군 창수면 창수리 317번지로 이주해 [[https://e-gonghun.mpva.go.kr/user/ContribuReportDetail.do?goTocode=20001&pageTitle=Report&mngNo=615|본적을 두었다]]. [[1919년]] [[3월 18일]] 인근의 [[영해면]] 성내동에서 장날을 이용하여 2천여명의 군중이 독립만세운동을 벌인 것에 자극을 받아 큰조카 [[https://e-gonghun.mpva.go.kr/user/ContribuReportDetail.do?goTocode=20001&pageTitle=Report&mngNo=7996|이현설]](李鉉卨)[* 이수각의 둘째 형 이수철(李壽喆, 1852 ~ 1925. 11. 9)의 차남인데, 출생 이후 큰형 이수인(李壽仁, 1850 ~ ?. 10. 23)에게 입양되었다.]을 비롯해 19촌 지간의 족질(族姪)[[https://e-gonghun.mpva.go.kr/user/ContribuReportDetail.do?goTocode=20001&pageTitle=Report&mngNo=7997|이현우]](李鉉祐)[* 영해파(寧海派)-석계공파(石溪公派)-평재공파(平齋公派) 후손이다.]·[[https://e-gonghun.mpva.go.kr/user/ContribuReportDetail.do?goTocode=20001&pageTitle=Report&mngNo=7673|권재형]](權在衡)과 함께 이튿날인 [[3월 19일]]에 고향인 창수동 헌병주재소 근방에서 독립만세운동을 일으키기로 결의하였다. 그리고 창수면 관내 각 마을의 주민들에게 독립만세운동의 취지를 설명하고 참여해 줄 것을 당부하였다. 거사 당일인 [[3월 19일]] 창수면 헌병주재소 앞에 200여 명의 시위군중이 모였는데, 이때 그는 군중의 선두에 서서 독립만세를 선창하여 군중의 분위기를 돋우었다. 또 앞장서서 주재소로 진격하여 투석과 [[몽둥이]]로 사무실·객사·주임순사의 집 등을 파괴하고 주재소의 공문서를 파기하는 등 격렬한 독립만세운동을 전개했다. 그러나 곧 [[체포]]되어 [[1919년]] [[4월 5일]] 대구지방법원 경주지청에서 이른 바 [[소요죄|소요]] 혐의로 대구지방법원 검사국에 [[https://theme.archives.go.kr/next/indy/viewIndyDetail.do?archiveId=0001166301&evntId=&evntdowngbn=N&indpnId=0000145071&actionType=det&flag=4&search_region=|송치되었고]], 같은 해 [[6월 5일]] 대구지방법원에서 이른 바 소요·[[공무집행방해]]·[[주거침입]]·건조물손괴·[[기물손괴죄|기물손괴]]·공문서 훼기·상해·보안법 위반 등의 혐의로 [[징역]] 4년형을 [[https://theme.archives.go.kr/next/indy/viewIndyDetail.do?archiveId=0001352160&evntId=0034987824&evntdowngbn=Y&indpnId=0000019106&actionType=det&flag=1&search_region=|선고받았다]]. 이에 곧 공소하여 그해 [[9월 30일]] 대구복심법원에서 위와 같은 혐의에 대해 [[https://theme.archives.go.kr/next/indy/viewIndyDetail.do?archiveId=0001351682&evntId=0034984570&evntdowngbn=Y&indpnId=0000016073&actionType=det&flag=1&search_region=|원심 판결이 취소되었으나]] [[http://theme.archives.go.kr/next/indy/viewIndyDetail.do?archiveId=0001351682&evntId=0034984570&evntdowngbn=Y&indpnId=0000016073&actionType=det&flag=1&search_region=|형기는 그대로 유지돼]] 결국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에는 [[고문]] 후유증으로 [[지병]]을 얻어 고통받다가 [[1923년]] [[4월 9일]] 별세하였다. 후손은 [[강원도]] [[삼척군]] 삼척면 [[오분동|오분리]](現 [[삼척시]] [[오분동]])로 이주하여 살고 있다. [[1977년]]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독립운동 공적을 인정받아 건국포장이 추서되었으며,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되었다. [include(틀:문서 가져옴, title=이수각, version=2)][[분류:한국의 독립운동가]][[분류:영덕군 출신 인물]][[분류:재령 이씨]][[분류:1872년 출생]][[분류:1955년 사망]][[분류:건국훈장 애국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