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clude(틀:문묘 배향 18현)] [include(틀:종묘 배향공신)] ---- ||<-2>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양동마을 무첨당.jpg|width=100%]]}}} || || '''성명''' ||이적(李迪) → 이언적(李彦迪) || || '''자''' ||복고(復古) || || '''호''' ||회재(晦齋)·자계옹(紫溪翁) || || '''시호''' ||문원공(文元公) || || '''본관''' ||[[여주 이씨]] || ||<|2> '''출생''' ||[[1491년]]([[성종(조선)|성종]] 22) [[11월 25일]] || ||[[조선]] [[경상북도|경상도]] [[경주시|경주부]] 양좌촌(良佐村) 서백당(書百堂) || ||<|2> '''사망''' ||[[1553년]]([[명종(조선)|명종]] 8) [[11월 23일]] (향년 61세) || ||[[조선]] [[평안북도|평안도]] [[강계군|강계]] || || '''국적''' ||[[파일:조선 어기.svg|width=28]] [[조선]] || || '''부모''' ||부친 - 이번(李蕃, {{{-3 1463 ~ 1500}}}) 모친 - [[경주 손씨]](慶州 孫氏, {{{-3 ? ~ 1548}}}) : 손소(孫昭)의 딸 || || '''형제자매''' ||남동생 - 이언괄(李彦适, {{{-3 1494 ~ 1553}}}) || || '''부인''' ||[[함양 박씨]] - 박숭부(朴崇阜)의 딸 || || '''자녀''' ||(양자) - 이응인(李應仁) || [목차] [clearfix] == 개요 == [[조선]]의 대표적인 유학자, 정치가. 본관은 [[여주 이씨]]. 호는 회재(晦齋)[* [[주자(철학자)|주희]]를 따르겠다는 의미다. 주희의 호는 회암(晦庵)이다.], 자계옹(紫溪翁).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인 경주시 양동마을에서 출생. 영남 [[남인]]의 선구자이자 조선 시대 최초의 [[철학]]적 사유인 태극 논쟁을 벌인 [[성리학]]의 태두로 이선기후설(理先氣後設)과 이기불상잡설(理氣不相雜說)을 강조하는 사상을 확립했으며 이는 이황에게 계승되어 [[영남]] 학파의 근간이 되었다. 동시에 그는 의정부 종1품 [[좌찬성]], [[이조판서]], [[예조판서]], [[대사헌]], [[대사성]], 한성부 판윤, [[경상도]] [[관찰사]] 등 고위직을 역임하며 사후 [[영의정]]으로 증직된 [[정치인]]이기도 했다. 학문적 업적으로 그는 동방 5현이자 동국 18현으로서 [[문묘]], 정치적 업적으로 [[명종(조선)|명종]]의 [[배향공신]]이 되어 [[종묘]]에도 모셔졌었다. 명종이 영녕전으로 체천(遞遷)되면서 이언적의 신주는 여주이씨 종가로 옮겨갔다. 현재 문묘(대성전)와 종묘(공신당)에 모두 이름을 올린 사람은 [[이황]], [[이이(조선)|이이]], [[김집]], [[송시열]], [[박세채]] 뿐이다. == 생애 == 본래 이름은 이적(李迪)이었으나 후에 [[피휘]]로 인해 [[중종(조선)|중종]]이 선비 언(彦)을 이름에 포함하여 [[개명]]하도록 명했다. [[경주시|경주]] [[양동마을]]에서 태어났으며 어머니는 [[경주 손씨]]이다. 당시에는 남귀여가혼이 일반적이었기 때문에 외가인 서백당에서 태어났다.[* 태어난 산실인 서백당에 관해서는 [[양동마을]] 건물 내력 참조. 재미있는 이야기가 얽혀 있다.] 아버지는 [[성균관]] 생원으로 [[서울특별시|한양]]에서 유학하며 문과를 준비했는데 이언적이 10세 때인 1500년 [[요절]]했다. 이후 외삼촌 [[손중돈]](孫仲暾)의 임지를 따라다니며 문하에서 수학하였는데 손중돈은 [[김종직]]의 [[제자]]로 의정부 우참찬, 이조판서까지 올라갔을 정도로 명망 높은 사람이었다. 외할아버지는 [[손소(조선)|손소]]로 [[이시애의 난]]을 진압한 공으로 적개공신 2등에 책록된 사람이었다. 18세 때인 1508년 함양 박씨와 [[혼인]]하였고 20세 때인 1510년 외할머니 풍덕 류씨가 [[별세]]하면서 별급으로 종가(宗家)인 양동마을 무첨당(無忝堂)[* 시경(詩經) 소완(小宛)의 '夙興夜寐(숙흥야매) 無忝爾所生(무첨이소생)'에서 따온 것으로 조상에게 한 점 부끄럼 없는 삶을 살겠다는 뜻이다.]을 짓고 분가하였다. 젊었을 때 인근 사찰인 정혜사에서 학문을 닦았다. 당시에는 유불(儒佛)이 상호 보완 관계였기 때문에 이러한 학업이 가능했다. 23세에 생원시에 합격하여 성균관에서 수학하였고 24세에 문과에 급제하였다. 이러한 이언적의 수학 과정을 두고 ‘학문연원수수설(學門淵源授受說)’을 낳게 하였다. 27세에는 [[손숙돈]](孫叔暾)[* 손중돈의 아우.]과 [[조한보]](曺漢輔) 사이에서 일어난 [[무극]]과 [[태극]]에 관한 논쟁[* 자신의 성리학적 견해를 밝히면서 성리학자로서의 명성을 쌓았다. 이 논쟁은 이후 일어난 사단칠정 논쟁의 시발점이 되었다.]에 뛰어들었으며 이 근간이 이황에게 계승되어 영남 학파의 학문적 근간이 되었다. 37세에는 세자시강원문학이 되어 세자 [[인종(조선)|인종]]의 [[스승]]이 되었다. 이후 사헌부지평, 이조정랑, 사헌부장령, 밀양도호부사 등 여러 [[관직]]을 거쳐 1530년 사간원 사간이 되었다. 그러나 사간원 사간을 역임할 당시 권신 [[김안로]](金安老)의 등용에 반대했다가 김안로가 [[외척]]이 되어 부상한 직후 성균관 사예로 좌천되었다. 이후 낙향하여 자옥산에 별장인 독락당[* 진심장구 상의 독락 장에서 인용하였다. 진심장구 상의 독락 장(8장)에서 나온 '古之賢士何獨不然. 樂其道而忘人之勢'라는 구절을 신조로 삼았다.]을 짓고 학문 활동에 전념하였다. 그가 종가인 무첨당으로 가지 않고 은둔한 것은 관직에서 사실상 쫓겨난 [[신분]]이었기 때문에 [[가족]]과 친인척들에게 피해가 미칠까 우려해서였다. 주자를 독자적으로 [[해석]]한 그의 학문관은 《대학장구보유(大學章句補遺)》와 《속대학혹문(續大學或問)》에 나와 있다. 그는 주자가 다시 살아나온다고 해도 자신의 해석에 동의할 것이라는 자신감을 보이기도 했다. 1537년 김안로의 실각 이후 복귀하여 [[조광조]]의 복권과 [[사림]]의 등용을 요청하였다. 홍문관 응교를 거쳐 1538년 홍문관 직제학에 임명되었다가 [[전주시|전주]]부윤이 되었으며 일강십목소(一綱十目疏)를 올려 올바른 [[정치]]의 도리를 논하였다. 1539년 세자시강원우부빈객이 되어 다시 세자 [[교육]]을 담당했다. 1542년 이조판서, 예조판서, 형조판서 등 요직을 거쳐 1544년 의정부 좌찬성에 이르렀고 인종 승하 후 [[원상제|원상(院相)]]이 되어 [[국정]]을 총괄하였다. 1545년 [[을사사화]]가 일어나자 권신 [[윤원형]](尹元衡)은 사림파를 축출하려 한다. 이에 이언적은 의금부판사가 되어 사림 [[윤임]](尹任)파를 심문하는 역할을 맡았으나 그 해 12월 관직에서 물러난 후 [[고향]]으로 돌아갔다. 1547년 [[양재역 벽서 사건]]으로 인해 [[평안북도]] [[강계군|강계]]로 유배되는데 이후 저술 활동에 전념하였다. 63세에 《중용구경연의(中庸九經衍義)》을 저술하다 1553년 [[사망]]한다. 저서에는 《회재집(晦齋集)》, 《구인록(求仁錄)》, 《대학장구보유(大學章句補遺)》, 《봉선잡의(奉先雜儀)》 등이 있다. 자식이 없어서 사촌인 이통(李通)의 아들인 이응인을 양자로 들였다. 이황은 그의 저술을 접하고 크게 영향을 받고 찬탄하여 직접 행장(行狀)을 지었다. [[명나라]] 사신이 왔을 때 조선에도 주자를 훌륭하게 해석한 [[학자]]가 있는지 물었을 때 이언적의 저술을 보여주기도 했다. [[선조(조선)|선조]] 즉위 이후 1568년 그의 유문을 수집하라는 명령이 있었으며 1569년 대광보국숭록대부 의정부 영의정에 추증하고 그의 종가인 양동마을 무첨당에 [[제사]]를 지내게 하였다. 또한 [[시호]]가 문원(文元)으로 내려졌고 종묘에 배향되는 [[종묘배향공신]]의 은전이 내려졌으며 1610년 문묘에 종사되었다. 핵심적인 공을 세운 인물은 이언적의 손자인 수졸당 [[이의잠]](李宜潛)으로 선조가 [[서인]]들에 의해 부화뇌동하여 을사사화 당시 이언적의 소위 모호하다는 행적을 핑계로 그의 문묘 종사를 반대할 때 외종매부이기도 한 서애 [[유성룡]]을 움직여 변무(辨誣)하게 했고 백사 [[이항복]]이 <[[명종실록]]> 기록을 살펴 이언적의 무고함을 변백하자 그로부터는 이언적의 묘지명을 얻어내었으며 [[옥산서원]] 원장으로서 이언적의 문집 간행을 주도하는 등 조부의 현양과 가학의 전수에 핵심이었다. == 관련 문화재 == 이언적 종가 종택(宗宅)은 [[경주시|경주]] [[양동마을]] 무첨당이며, 현재 종손(宗孫) 혹은 주손(胄孫) 이지락(李址洛)씨가 살고 있는데 그는 17대 종손이다. == 둘러보기 == [include(틀:사림파)] [각주] [[분류:조선의 문관]][[분류:조선의 성리학자]][[분류:1491년 출생]][[분류:1553년 사망]][[분류:경주시 출신 인물]][[분류:여주 이씨]][[분류:개명한 인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