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clude(틀:상위 문서, top1=이영우)] [목차] == 아마추어 시절 == [[선린인터넷고등학교 야구부|선린상업고등학교]]와 [[건국대학교 야구부|건국대학교]] 체육교육학과(1992학번)를 졸업하였다. 1학년 때부터 주전 중견수를 맡으며 3년 선배 이종범과 힘을 합쳐 건국대가 추계리그와 선수권대회에서 우승하는데 기여했고, 2학년부터 4학년까지 국가대표로 활약하며 [[1994 히로시마 아시안 게임]] 은메달에 기여한다. == 프로 시절 == === 1996 시즌 === 1996년 신인 드래프트에서 고향팀 [[LG 트윈스]]로부터 외면받은 뒤[* 사실 외면해도 이상하지는 않았던 게, LG는 전통적으로 좌타 외야수 왕국인데다가, 이미 2년 전에 이영우와 비슷한 플레이 스타일에 한살 어린 김재현이 좌익수 겸 2번타자 자리에 말뚝박은 상황이었다. 문제는 이영우를 거르고 뽑았던 게 공만 빠른 우투수인 희대의 먹튀 이정길이었다는 것(...)], 2차지명 2순위에서 [[한화 이글스]]의 지명을 받으며 프로생활을 시작한다. 화려한 학창시절에 비해서는 비교적 초라한(?) 프로생활의 시작이었다. 그러나 자신을 1차지명과 2차 1순위에서 외면한 다른 팀 코칭스태프들에게 보란듯이 데뷔 첫 해부터 1군 114경기를 출장한다. 시즌 최종 성적은 '''타율 .269 출루율 .360 장타율 .414 8홈런 39타점 12도루'''. 아주 뛰어난 건 아니지만, 신인 1년차로선 쏠쏠한 활약이었다. 특히 타율보다 1할 가까이 높은 출루율, BB/K가 0.80에 육박한 점을 보면 신인으로써 훌륭했다고 볼 수 있다. 그런데 이같은 활약에도 주목을 별로 못 받았다. 일단 팀 내 최고 유망주였던 1차 지명자 [[홍원기]]가 같은 해 데뷔했던 데다가, 정작 팀에서 가장 좋은 활약을 펼친 신인은 이영우도 아니고 [[홍원기]]도 아닌 '''[[송지만]]'''이라는 매우 알쏭달쏭한 결과였기 때문. 게다가 한 팀에 너무 한꺼번에 신인 유망주가 [[갑툭튀]]한 탓인지 이 당시 언론과 팬들은 이 세 선수와 [[임수민(야구선수)|임수민]]까지 패키지로 묶어 '''신인 4인방'''이라 불렀다. 덕분에 이영우 개인에 대한 관심은 상대적으로 적었다. 거기다가 같은 해 [[KBO 리그|한국프로야구]] 역사상 가장 센세이셔널한 신인 중 한 명이었던 [[박재홍(야구)|어느 빵의 황제]]가 등장하여 KBO 역사상 최초의 [[30-30]]을 기록했다. 신인상은 당연히 [[송지만]]도 아니고 [[홍원기]]도 아니고 이영우도 아닌 그분에게 돌아갔다. 어쨌든 이 당시 [[한화 이글스]]에 신인 4인방이 한꺼번에 등장할 수 있었던 까닭은 당시 팀 타선이 완벽하게 [[시망]] 상태였기 때문. 이전 해인 1995년 [[한화 이글스]]에서 20홈런 이상을 기록한 타자는 오직 [[장종훈]]뿐이었고, 3할 이상을 기록한 타자도 오직 [[장종훈]]뿐이라는 그야말로 눈물겨운 상황이었다(...). 그러니까 2010, 2012년 한화의 투수진이 '''[[류현진]]과 나머지들'''이라면, 1995년 한화의 타선은 '''[[장종훈]]과 나머지들'''이었던 셈. 이로 인해 [[강병철]] 감독은 [[강병철의 양아들|젊은 선수들에게 적극적으로 출장 기회를 주었고]], 덕분에 이영우는 일찍부터 1군에서 주전으로 기용되었다. 1996년에는 부상이었던 장종훈을 대신해 1루수로 팀내에서 가장 많이 출전하였다. === 1997 시즌 === 이후 신인 2년차였던 1997년에는 [[소포모어 징크스]]를 보이며 '''타율 .202'''로 부진, 1년 만에 주전 자리를 빼앗긴다. 그런데 이영우 대신 주전을 다시 꿰찬 [[정영규]] 역시 '''타율 .235'''를 기록하며 이영우와 별로 다를 게 없는 모습을 보여 주었다. === 1998 시즌 === 그리고 신인 3년차인 1998년 [[정영규]]는 [[동봉철]]을 상대로 시즌 중 트레이드되는데, [[동봉철]] 역시 [[정영규]]와 마찬가지로 부진한 모습을 보여 주면서 결국 한화의 코너 외야수 한 자리를 당해 타율 .273의 3년차 이영우가 꿰차게 된다. 그리고 [[동봉철]]은 시즌이 끝나고 임창식을 상대로 [[쌍방울 레이더스]]에 트레이드된 후 부상으로 선수 생활을 마감했다. === 전성기 === 이듬해 신인 4년차인 1999년, 그야말로 [[요시 그란도시즌|포텐샬이 대폭발한다]]. 이 해 성적은 타율 .334 13홈런 49타점 83득점 142안타. 특히 타율은 타격 6위의 훌륭한 성적. 이듬해인 2000년에도 .318로 타격 10위를 차지했고, 장타력도 늘어나 25홈런도 쳤다. 그리고 2004년까지 '''매년 기본이 3할 1푼, 못 쳐도 2할 9푼의 정확성과 잘 치면 25홈런, 못 쳐도 15홈런의 갭파워를 선보이며 맹활약한다.''' 일률적으로 비교하긴 어렵지만, [[장성호]]와 비슷한 타입이었다고 보면 될 듯하다.[* 2001년에는 왼쪽 허벅지 근육이 파열되는 부상을 입어 타율이 0.286까지 떨어졌으나 OPS는 0.871을 기록했다.][* 다만 꾸준함 면에서는 양준혁이 10년연속 타율 3할에 실패할 당시로 한정하면 장성호를 따라갈 자가 없었다.] 전성기(1999년~2004년) 동안의 시즌 평균 성적은 다음과 같다. * 129.8게임, 142.5안타, 17.7홈런, 60.2타점, 87.7득점, 14도루, 9.2도실 * 타율 .312, 출루율 .410, 장타율 .508 '''테이블세터의 [[OPS]]가 .918 이었다'''! 다만 주루플레이는 부진했다. 팀 사정상 주로 1번, 2번 타자로 출전하면서 도루를 하긴 했는데 매년 15~20개 가량의 도루를 하면서 도루 실패도 매년 두 자리수에 가까왔다는 게 문제였다. 예를 들어, 2004년엔 '''도루 20개'''를 기록하면서 커리어하이를 찍는데, '''도루실패도 12개'''를 기록했고, 심지어 2000년엔 '''7도루 12도실'''을 기록하며 당최 도루를 왜 하는지 사람 알쏭달쏭하게 만드는 주루능력을 선보였다. --아예 장성호처럼 도루시도를 하지 말든가-- 이로 인해 당시 팬들 사이에선 이영우가 팀을 위해 도루를 안 하는게 더 낫다는 평가가 절대적이었다. 사실, 일반적으로 도루 성공율이 70% 이상이면 팀에 도움이 되고 65~70이면 그래도 투수를 괴롭히기 때문에 반반이라 보는데, 이영우는 통산 112도루 81도실로 도루 성공율은 달랑 '''58%'''이다. 덧붙여서, 통산 100개 이상의 도루를 기록한 타자 중 이영우보다 성공률이 낮은 타자는 '''없다'''. 심지어 양준혁도 62%다. 수비능력을 말하자면... 신인 시절에는 [[중견수]]를 보기도 했으나 [[제이 데이비스]]가 들어온 이후로는 주욱 '''붙박이 [[좌익수]]'''였다. 이것만으로 감이 올 것이다. 혹자는 그의 수비범위가 세발자국이라고... === 몰락 === [[2004년 프로야구 병역비리 사건]]이 터진다. 사건 초기만 해도 당시 만 31살의 스타플레이어 이영우가 이 사건에 연루되었으리라 생각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으나... 당시 병역 비리가 발각된 선수 중에서 이영우가 '''만 31세'''로 최고령자였다. 그러니까 걸어다니는 커트라인이었던 셈(...). 이렇게 나이가 나이인지라 팬들 중에 이영우가 이 사건에 연루되었으리라 예상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게다가 사건에 '''연루된 선수 중에서 이영우가 최고의 스타플레이어였다.''' 수치를 통해 비교해보자. * 사건에 연루된 선수 중 모든 타자(1군에서 단 한 경기라도 뛴 타자. 총15명)의 2004년까지 통산 홈런: 166개 * 이영우가 2004년까지 기록한 통산 홈런: 126개 ~~본격 15:1의 기상~~ 이 중에서 이영우 다음 2인자(...)였던 [[정성훈]]의 42홈런을 제외하면, 124:126으로 이영우가 아슬아슬하게 승리(?)를 거둔다. 특히 아쉬운 점은 이영우는 당시 [[KBO FA제도|FA]]를 단 1년 앞두고 있었다는 것. 게다가 이영우는 비리로 병역 면탈을 했음이 뒤늦게 밝혀져 별도의 사법적 처벌 없이 only 신검만 다시 받으라는 처분이 내려진 것이고, 그 재검을 통해 [[사회복무요원|공익]]근무[* 이영우가 부산 아시안 게임 금메달 획득으로 병역 특례를 받은 것으로 알려져 있으나 전혀 그렇지 않다. [[정대현(1978)|정대현]]과 마찬가지로 기자들이 잘못 알고 있는 사례.] 처분이 내려진 것이다. 잘못한 게 맞긴 하지만 운이 지지리 없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이전까지 팀에 대한 공헌도와 FA를 코 앞에 두고 쪽박을 차게된 점(...)을 감안해 구단에서 2005년 연봉으로 2004년보다 8% 인상된 2억7천만을 안겨주었다는 것. 그야말로 베테랑에게 대인배 of 대인배[* 단, 군보류 수당이 적용되어 연봉의 25%만 지급되므로 알고 보면 대인배라고 보기도 어렵다.]스러운 한화 구단다웠다. === 공익근무 후 === 이런 우여곡절을 거쳐 이영우는 2년간 공익근무를 마친 뒤 만 34살의 나이로 복귀한다. 올드팬들은 부활 이영우를 외치며 응원했으나, 정말로 만 34세 + 2년 공백의 타자가 예전같은 활약상을 보일 것으로 믿진 않았다. 그래도 2007년부터 2009년까지 풀타임 주전은 아니지만 사실상 주전으로 매년 1군에서 80~90경기 가량 출전하며 어느정도 제 몫을 해준다. 이 3년동안의 성적은 타율 .267 출루율 .334 장타율 .378 9홈런으로 백업으론 그럭저럭 성적이긴 한데, 과거 이영우의 활약상을 아는 팬들에겐 그야말로 피눈물나는 성적. 한 마디로 말해 감각이 떨어졌다는 것. 그나마 일말의 기대감을 가질 수 있었던 이유 중 하나는 매년 성적이 향상되고 있었다는 점이었다. * 2007년 - 97게임 타율 .238 출루율 .320 장타율 .313 0홈런 * 2008년 - 89게임 타율 .288 출루율 .345 장타율 .402 2홈런 * 2009년 - 93게임 타율 .277 출루율 .345 장타율 .427 7홈런 그러나 문제는 역시 수비. 전술했듯이 이영우는 붙박이 좌익수(...)일 정도로 수비능력은 낮은 편이었는데, 나이를 먹은데다 2년의 공백기까지 가졌으니... 결국 그렇잖아도 막장인 [[한화 이글스]] 수비에 막장 한 조각을 더할 뿐이었다. [[가네모토 도모아키]]처럼 좌익수 앞에 떨어지는 공도 [[유격수]]가 중계를 해야 할 정도였으니... 복귀 후 3년 동안 [[숙녀]]어깨에서 [[소녀]]어깨를 거쳐 급기야는 [[유녀]]어깨(...)로 3단 변신하는 모습을 보여주며,[* 사실 복귀 이후 심각한 어깨 부상에 시달리기 시작했다. 이를 알고 있던 모 감독은 아예 한화와 경기할 땐 아예 좌익수 쪽으로 공을 많이 보내라고 했을 정도.] 결국 [[지명타자]] 말고 제대로 소화해낼 수 있는 포지션이 없는 상태가 되었다. 뭐, 이렇게 전부 본인 책임처럼 적어놨지만 [[김인식]] 감독의 혹사 역시 이영우가 몰락하게 된 이유중 하나. [[김인식]] 감독 항목 참조. 2007년에는 0홈런으로 마감하고 마는데, 사실 2007년 6월 28일에 기아를 상대로 역전 만루홈런을 때린 바 있다. 군 제대 후 때린 첫 홈런이자 개인통산 3번째 만루홈런이었지만, 3회 쏟아진 거짓말 같은 폭우로 노게임 된 것. 2008년 4월 11일에는 오심으로 인해 홈런 한개를 도둑맞았다. [* 결국 그해 5월 7일에 127호 홈런을 쳐냈고, 이 홈런은 126호를 친 이후 1,325일 만에 생산한 홈런이다.] == 은퇴 == 2010 시즌이 시작되고 예전같지는 않지만 그래도 어느 정도 제몫을 해주면서 팬들은 이영우가 타선에 어느 정도 보탬이 될 것이라 기대했다. 팀 상황이 ~~[[막장]]~~ 그다지 좋지 않은 가운데 [[이도형]]과 [[플래툰(야구)|플래툰]]으로 지명타자 자리를 채워줄 수 있을 것으로 예상되었으나, * 개막 직후 달랑 3경기 지명타자로 선발 출장하더니 갑자기 4월말까지 행방불명 * 4월 21일 복귀, 열흘동안 거의 매경기 대타로 출장하더니 5월이 되자 행방불명 이때 남긴 성적은 21타수 2안타로 달랑 '''9푼5리'''(...)이다. 그리고 이영우가 자취를 감춘 5월부터 [[한대화|입담만 좋은 팀의 신임감독]]의 [[장성호|예전 이영우와 비슷한 타입의 좌타자]]를 사달라는 징징거림이 심해졌다. 단, 한대화의 장징징(...)은 오프시즌부터 시작되었다. 단지 이영우가 더이상 통하기 어렵다는 게 확인된 5월부터 ~~구단 무시하고~~ 기자들에게 장징징을 2배로 시전하기 시작했던 것. 사실 장성호가 한화에 입단하면 이영우의 입지가 필연적으로 좁아질 수밖에 없는데, 둘이 서로 비슷한 타입의 좌타자인데다가 둘 다 ~~수비가 막장~~ 수비가 좋은 편이 아니라 맡을 수 있는 포지션이 [[지명타자]], [[1루수]], 가끔 눈 질끈 감고 [[좌익수]](...)로 완전히 겹치기 때문. 게다가 장성호는 이영우에 비하면 나이도 어리고 몸은 더 튼튼했고 부상으로 신음한 적은 없었다. 그러다가 '''결국 2010년 9월 중순, 현역 은퇴를 선언한다.''' 은퇴식은 9월 18일. [[분류:야구선수/커리어]] [include(틀:문서 가져옴, title=이영우, version=27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