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류:대한제국 황실의 후손]][[분류:은언궁 종주]][[분류:조선귀족 자작]][[분류:1872년 출생]][[분류:1937년 사망]][[분류:대한제국의 인물]][[분류:일제강점기의 인물]] [include(틀:다른 뜻1, other1=친일반민족행위자의 대명사인 인물, rd1=이완용)] [include(틀:조선귀족)] ---- [include(틀:역대 은언궁 주인)] ---- ||<-2> [[조선귀족|{{{#fff '''조선귀족 후작'''}}}]] || ||<-2> {{{#!wiki style="margin: -5px -10px; padding: 5px 10px; background-image: linear-gradient(to right, #355E80, #4682b4 20%, #4682b4 80%, #355E80); color: #FFD400" '''은언궁 5대 궁주'''}}} || ||<-2> '''{{{#fff 대한제국 장조의 5대손[* 실제로는 조선 중종의 14대손이다. 후술하겠지만, 그가 장조(사도세자)의 서장자 은언군의 양손자로 입적하였기에, 은언군 일가의 마지막 군주(추존 군주 포함)이었던 장조(사도세자)를 기준으로 적었다. 수정하지 말 것.][br]{{{+1 이완용 | 李完鎔}}}}}}''' || ||<-2> {{{#!wiki style="margin: -6px -10px" [[파일:이완용 자작.jpg|width=100%]][br]{{{-1 《조선귀족열전》에 실린 이완용의 사진}}}}}} || || '''출생''' ||[[1872년]] [[12월 13일]]|| ||<|2> '''사망''' ||[[1937년]] [[2월 4일]] (향년 64세)|| ||[[경기도]] [[경성부]] 관철정 41번지[br](現 [[서울특별시]] [[종로구]] [[관철동]])|| || '''묘소''' ||경기도 [[고양시|고양군]] 연희면 아미동|| || '''본관''' ||[[전주 이씨]](全州)|| ||<|3> '''가족''' ||양아버지 [[덕안군]][br]양어머니 정부인 [[달성 서씨]]|| ||친아버지 이재경(李載經)[* [[덕흥대원군]]의 12대손.][br]친어머니 [[청송 심씨]]|| ||배우자 [[문화 류씨]][br]적자 이해만(李海滿)[br]서자 이해구(李海龜) || [목차] [clearfix] == 개요 == [[대한제국]]의 [[황족]] 출신 관료이자 [[조선귀족]] 작위를 받은 [[친일반민족행위자]]. [[사도세자]]의 3남인 [[은언군]]의 양현손자, [[상계군]]의 양증손자, [[익평군]]의 양손자, [[덕안군]]의 양자이다. 은언군의 제사를 받드는 봉사손이었다. '''[[매국노]]의 대명사''' [[이완용]]과 [[동명이인]]이다. 다만 이름 끝 글자의 한자가 다르다. 흔히 우리가 아는 이완용은 李完'''用'''으로 쓰지만 이 문서의 이완용은 李完'''鎔'''으로 쓴다. 그러나 공교롭게도 두 이완용 모두 [[친일반민족행위자]]다. 황실의 후손임에도 [[작호]]를 받지 못했다. 왜냐하면 족보 상 이완용의 가계에서 마지막으로 왕[* [[추존]] 왕 포함.]이었던 사람은 5대조 [[사도세자|장조(사도세자)]]인데, 법적으로 임금의 4대손까지만 [[황족]]으로 인정했기 때문이다. == 생애 == === 조선 · 대한제국 시기 === 1872년([[고종(대한제국)|고종]] 9년) 12월 13일에 태어났다. 친아버지는 [[덕흥대원군]]의 12대손으로 부사과를 지낸 이재경이고, 친어머니는 [[청송 심씨]]이다. 22살이던 1893년(고종 30년)에 [[은언군]]의 사손 [[덕안군]]의 아들인 이언용이 요절하여 [[고종(대한제국)|고종]]의 명으로 덕안군의 양자가 되었다.[* 덕안군 역시 실제로는 덕흥대원군파이다. 실제 혈통 상으로는 무려 21촌으로 둘의 가계는 [[덕흥대원군]]의 증손자 대에서 갈라졌다. 덕안군은 덕흥대원군의 3대 종손 [[응천군]]의 9대손이고 이완용은 응천군의 동생 밀산군의 10대손이다.] 이완용은 이언용과 같은 [[항렬]]이기에 이언용을 대체한 양자로 온 것이다. 저런 경우에는, 보통 이언용의 양자를 구하며, 이완용의 입양같은 경우는 드문 사례이다. 음서로 관직생활을 시작했다. [[홍릉]], [[예릉]]의 [[참봉]]을 지내고 능령을 거쳐 비서원승, 봉상사부제조, [[중추원(대한제국)|중추원]] 의관 등을 지냈다. 군수로도 여러 번 임명받아 삭녕, [[통진군|통진]], [[중화군|중화]], [[수원시|수원]]군수를 역임했다. [[비인군]]과 [[익산군]] 군수로도 임명받았지만 저 땐 부임하기 전에 새 벼슬을 받아 실제로 역임하지는 못했다. 이후에도 내부 회계국장[* 주임관 5등.] 겸 시종원 시종, 강화부윤, 종정원경, 동지돈녕원사[*A 칙임관 4등.], 태복사장[*A 칙임관 4등.], 봉상사제조[* 칙임관 3등.] 등 주요 보직을 역임했다. 품계 또한 높아서 최종적으로 종2품 가의대부에 올랐다. === [[일제강점기]] === [[경술국치|한일병탄]] 이후 1910년 10월 7일에 [[일본 정부]]에게서 훈1등 [[자작(작위)|자작]] 작위와 은사금 3만원을 받았다. 1912년에는 일본 정부에게서 한국병합기념장을 받았다. 이후 선대 왕들의 생일에 선원전을 봉심하고[[http://sillok.history.go.kr/id/kzc_10610028_001|#]][[http://sillok.history.go.kr/id/kzc_10809017_001|#]] 종척집사, 장의위원, 수빈원 등[[http://sillok.history.go.kr/id/kzc_11905010_002|#]] [[왕공족|이왕가]] 내의 의례 행사들에 참여하며 그럭저럭 잘 살았다. 1918년에는 아들의 결혼으로[[http://sillok.history.go.kr/id/kzc_11106004_003|#]], 1919년에는 모친상으로[[http://sillok.history.go.kr/id/kzc_11203027_001|#]][* 생모가 아닌 덕안군의 부인 서씨.] [[순종(대한제국)|순종]]에게서 각각 100원과 200원을 받았다. == 사후 == 1937년 2월 4일에 [[경기도]] [[경성부]] 관철정 41번지[* 현재 [[서울특별시]] [[종로구]] 관철동.] 자택에서 사망했다. 묘는 경기도 [[고양시]] 연희면 아미동에 있다. 2002년 [[대한민국 국회]]의 민족정기를 세우는 국회의원모임에서 발표한 '친일파 708인 명단', 2008년 [[민족문제연구소]]에서 발표한 '[[친일인명사전]] 수록예정자 명단', 2007년 대한민국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가 발표한 '친일반민족행위 195인 명단'에 이름이 올랐다. == 여담 == * 1919년 1월 21일 [[고종(대한제국)|고종]]이 승하하던 날 [[덕수궁]] 당직사관이었다. == 가족과 후손 == 부인 [[문화 류씨]] ^^(1873 ~ ?)^^ 사이에서 아들 이해만[* 1900년(광무 3년)에 편찬된 《선원속보(璿源續譜)》에서는 이름이 보이지 않는다.]을 얻었고, 이름이 전해지지 않는 첩 사이에서 아들 이해구를 얻었다.[* 이해구가 먼저 태어나고, 한참 뒤에 이해만이 태어났다.] 그러나 이해만은 1936년에 자식 없이 죽었다. 그래서 [[철종(조선)|철종]]의 생가 [[누동궁]] 사손 [[청풍군(1890)|이해승]]의 아들 이택주가 사후 양자로 입양왔다. 이해만은 이완용보다 먼저 죽었기 때문에 이완용 사후 이택주가 바로 자작 작위를 물려받았다. 이택주는 [[6.25 전쟁]] 때 사망했다. 슬하에 이우석, 이우용 두 아들을 두었으며 현재는 이우석의 장남 이성기가 은언군가의 종손으로 있다.[[https://ko.wikipedia.org/wiki/이택주|#]] 그 밖의 다른 가문의 일원들에 대해선 알려진 것이 없다. [각주] [include(틀:문서 가져옴, title=덕안군, version=37, title2=이기용(1889), version2=3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