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clude(틀:구당서)] [include(틀:신당서)] ||<-2> '''청수문충남(淸水文忠男)[br]{{{+1 李元紘 | 이원굉}}}''' || || '''작호''' ||<(> 청수현남^^(淸水縣男)^^ || || '''시호''' ||<(> 문충^^(文忠)^^ || || '''성''' ||<(> 이(李) || || '''이름''' ||<(> 원굉(元紘) || || '''자''' ||<(> 대강(大綱) || || '''부친''' ||<(> 이도광(李道廣) || || '''조부''' ||<(> 이관(李寬) || || '''증조부''' ||<(> 이찬(李粲) || || '''출생''' ||<(> ? ~ 733년 || || '''본적''' ||<(> 활주(滑州) 백마현(白馬縣) || [목차] [clearfix] == 개요 == 중국 [[당나라]] 중기의 재상으로, 관리 시절에 “남산은 옮길 수 있어도, 판결은 고칠 수 없다(南山或可改移, 判不可搖也)”라는 말을 남겼으며, 당의 황제 [[현종(당)|현종]]이 그를 재상으로 임용했다. [[이원굉|동명이인의 인물]]과 한자 표기는 동일하다. 자는 대강(大綱)이다. == 생애 == 이원굉은 조상이 활주(滑州) 출신이지만, 집안이 대대로 만년현(萬年縣)에 살았다. 이원굉의 조상은 본래 성씨가 병씨(丙氏)였지만, 증조부인 병찬(丙粲)이 [[고조(당)|고조]]가 거병할 때 가담하여 종정경으로 임명되고 응국공(應國公)이라는 작위를 받았으며 이씨 성을 하사받아 이씨가 되었다. 이원굉은 젊은 시절에 신중하고 돈후한 성품을 지녔고, 경주(涇州) 사병참군(司兵參軍)으로 관직을 시작하였으며, 옹주(雍州) 사호참군(司戶參軍), 호치현령(好畤縣令), 윤주(潤州) 사마(司馬)를 역임하였다. 이원굉은 역임한 관직마다 명성과 공적을 얻었다. 그리고 [[현종(당)|현종]] 개원 연간에 들어서서, 이원굉은 만년현령이 되었다. 이원굉은 현령으로 있으면서 부역을 공평하게 징수하여 더한 명성을 얻었고, 뒤에 경조윤(京兆尹)으로 발탁되었다. 이원굉은 경조윤으로서 삼보 지방의 강과 개천을 트이게 하라는 명을 받았다. 당시 왕공과 귀족들이 수로 기슭에 큰 수차를 세우며 백성들의 농사를 어렵게 하였는데, 이원굉은 관리에게 명하여 수차들을 모두 헐어버렸고, 관개 사업을 실시하여 백성들로부터 수많은 칭송을 받았다. 이원굉은 뒤에 공부시랑(工部侍郎), 병부시랑(兵部侍郎), 이부시랑(吏部侍郎)을 역임하였다. 725년, 당시 호부시랑으로 있었던 양창(楊瑒)과 백지신(白知愼)이 직무상의 과실로 인해 자사로 좌천되자, 현종은 호부의 직무를 감당할 수 있는 인물을 대신들에게 물어보았는데, 수많은 대신들이 이원굉을 천거하였다. 현종은 이원굉을 호부상서로 임명하려고 하였지만, 당시 재상은 이원굉의 경력이 짧다고 이야기해서, 결국 이원굉을 중대부(中大夫), 호부시랑으로 임명하였다. 이원굉은 시정의 득실을 논하여 현종으로부터 많은 칭찬을 받았다. 이원굉은 이후 중서시랑, 동중서문하평장사가 되었으며, 또한 은청광록대부가 더해지고 청수현남(淸水縣男)이라는 작위를 받아 재상의 자리에 올랐다. 이후 수도의 관리들이 받은 직전(職田)을 폐지하면서 조정 대신들이 관중에 둔전(屯田)을 실시하자고 주청하자, 이원굉은 관보에 둔전을 설치하는 것에 대한 폐해를 지적하며 둔전을 반대하기도 했다. 이원굉은 이후 재상이 된 [[두섬]]과 불화하여, 두섬과 많은 부분에서 이견을 보이며 대립하다가, 결국 729년에 조주(曹州) 자사로 좌천되었다. 이원굉은 포주(蒲州) 자사로 전임되었지만 병으로 인해 직무에서 물러났다. 이원굉은 733년에 태자첨사(太子詹事)로 기용되었지만 10일 뒤에 병으로 사망하여 태자소부(太子少傅)로 추증되었고, 문충(文忠)이라는 시호를 받았다. == 여담 == * '''“남산은 옮길 수 있어도, 판결은 고칠 수 없다.(南山可移 判不可搖)”''' 전술하였듯 “남산은 옮길 수 있어도, 판결은 고칠 수 없다”는 말을 남긴 인물인데, 맥락은 이러하다. [[태평공주]]의 권세가 절정에 달하던 당시 태평공주가 어떤 승려와 사찰의 맷돌을 놓고 싸움을 벌였는데, 당시 옹주 사호였던 이원굉은 맷돌을 승려에게 돌려주라고 판결하였다. 두회정(竇懷貞)은 당시 옹주 장사로 있었는데, 태평공주의 권세를 두려워하여 이원굉에게 판결을 고치라고 재촉하였다. 하지만 이원굉은 오히려 '''“남산은 옮길 수 있어도, 판결은 고칠 수 없다”'''라는 문구를 판결문 뒤에 적으면서 물러서지 않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 '''검소한 재상''' 이원굉은 검소하게 살았는데 자신의 저택을 보수하지 않았고, 자신이 받은 녹봉과 하사품은 친족들에게 나누어주었다. 이원굉의 검소한 성품에 대해 송경(宋璟)은 “송요(宋遙)의 뛰어난 재능을 끌어들여 유황(劉晃)의 탐오를 물리쳤고, 지위가 높아져 나라의 재상이 되었음에도 집에는 저축하여 모은 재산이 없었다. 비록 계문자(季文子)의 덕이 있다고 하더라도 어찌 더할 나위가 없겠는가!”라고 평가하였다. == 둘러보기 == [include(틀:당시기사)] [각주] [include(틀:문서 가져옴, title=이원굉, version=55, paragraph=1.2)] [[분류:수당시대/인물]][[분류:733년 사망]][[분류:안양시(중국) 출신 인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