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clude(틀:역대 대한민국 임시정부 법무부장)] ||<-2> {{{#!wiki style="margin: -5px -10px; padding: 5px 10px; background-image: linear-gradient(115deg, #cd313a 50%, #0047a0 50%)" '''[[독립유공자|{{{#fff 대한민국의 독립유공자}}}]][br]{{{+1 이유필}}}[br]李裕弼'''}}} || ||<-2>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CGBDEFNISVUWJWFNCDPBW4UM4E.jpg|width=100%]]}}} || || '''이명''' ||이우필(李祐弼) || || '''호''' ||춘산(春山) || || '''본관''' ||[[경주 이씨]][* <춘산 이유필 연구>(이현희, 1994)에 의하면 평리공파 39세손이라고 한다. 중시조 39세라는 의미로 보인다.] || ||<|2> '''출생''' ||[[1885년]] [[11월 28일]] || ||[[평안도]] [[의주목]] 주내방 서문동[br](현 [[평안북도]] [[의주군]] 의주읍) || ||<|2> '''사망''' ||[[1945년]] [[11월 28일]][* 서울현충원묘적부에는 11월 29일에 별세한 것으로 기재되어 있다.] (60세) || ||[[황해도]] [[벽성군]] 청단 || || '''학력''' ||[[서울대학교 법과대학|경성법학전문학교]] {{{-2 (졸업)}}} || || '''가족''' ||아버지 이기초(이계초)[* <춘산 이유필 연구>(이현희, 1994)에 의하면 이기초(李基初) 또는 이계초(李啓初)라고 한다.][br]아들 이만영, 이회영[* [[우당 이회영]]과는 동명이인이다.], 이준영[br]며느리 오혜식 || || '''묘소''' ||[[국립서울현충원]] 임시정부요인 묘역-14호 || || '''상훈''' ||건국훈장 독립장 || [목차] [clearfix] == 개요 == [[대한민국]]의 [[독립유공자]]. 1963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받았다. == 생애 == 1885년 11월 28일 평안도 의주목 주내방 서문동(현 평안북도 의주군 의주읍)에서 태어났다. 경성법학전문학교를 졸업했다. [[신민회]]에 참가했다가 [[105인 사건]]에 연루되어 [[전라남도]] [[진도군]]에 유배되었다. [[1919년]] [[3.1 운동]] 때 고향 [[의주군]]에서 시위를 주도했다가 [[상하이]]로 망명한다. [[1919년]] [[4월]]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설립되자 내무비서국장에 임명되었다. [[1920년]] [[8월]] 미국회의원단이 한국을 시찰 할 때 [[안창호]], [[여운형]], [[여운홍]], [[손두환]]등과 함께 접대, 한국의 독립운동을 설명하고 지원을 요청했다. [[1922년]] [[10월]] [[김구]], [[손정도]], [[양기하]]등과 함께 한국노병회를 조직하고 이사, 경리부장, 이사장을 역암했다. [[1923년]] 교민단단장 겸 인성학교 교장으로 인권옹호, 독립운동가 자제 교육을 담당했으며 도서관 신축, 보습과 설립등에 활동을 했다. 그뒤 교민단 회계검사원, 임시정부 내무총장등을 역임했다. [[1924년]] 교민단 주최로 [[3.1절|3.1절 기념식]]을 하자 사회자를 맡아 무궁화를 선창했으며 [[한국독립당]]의 기관지 상해한문의 사장을 맡았다. [[1926년]] 임시정부 국무원 겸 재무장이 되었다. 또한 한때 [[일본 제국 육군/헌병|헌병]]에게 체포되었다가 풀려났는데 상당히 쉽게 풀려나 밀정으로 의심받았다. [[1932년]] [[윤봉길 의거]] 당시 체포, 3년형을 선고받고 만기출소했다. 그러나 [[대한민국 임시정부|임시정부]]의 [[거물]]에게 불과 3년 형이 선고된 것을 이상하게 생각한 이들이 이유필이 [[변절]]한 게 아니냐는 의문을 제기했고 결국 이유필은 억울하게도 [[대한민국 임시정부|임시정부]]에서 제명되고 말았다. 그러나 [[1990년대]] 초 일제의 기밀문서에서 "이유필을 처벌하지 않고 석방해 이를 이용하면 한국통치상 유리하다"라는 문구가 발견되어 친일논란이 해소되었다. [[8.15 광복]] 후에는 고향 의주군에서 거주하다가 북한 지역에 [[소련군정]]이 실시되면서 남한으로 월남하기 위해 이동하던 중 11월 28일 [[황해도]] [[청단군]]에서 심장마비로 사망했다. == 여담 == [[1963년]]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그의 유해는 1994년 3월 30일 [[국립서울현충원]] 임시정부요인 묘역에 이장되었다. [[분류:한국의 독립운동가]][[분류:경주 이씨 평리성암공파]][[분류:의주군 출신 인물]][[분류:1885년 출생]][[분류:1945년 사망]][[분류:일제강점기의 인물]][[분류:서울대학교 출신/전신 학교/법학전문대학원]][[분류:국립서울현충원 안장자]][[분류:건국훈장 독립장]][[분류:심장마비로 죽은 인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