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clude(틀:구당서)] [include(틀:신당서)] ||<-2> {{{#ece5b6 '''{{{+1 당나라의 대신[br]{{{+1 李適之 | 이적지}}}}}}'''}}} || || '''{{{#fff 작호}}}''' ||<(> 청화현공^^(淸和縣公)^^ || || '''{{{#fff 성}}}''' ||<(> 이(李) || || '''{{{#fff 이름}}}''' ||<(> 창(昌) → 적지(適之) || || '''{{{#fff 부친}}}''' ||<(> 이상(李象) || || '''{{{#fff 조부}}}''' ||<(> [[이승건]](李承乾) || || '''{{{#fff 증조부}}}''' ||<(> [[태종(당)|이세민]](李世民) || || '''{{{#fff 출생}}}''' ||<(> 694년 ~ 747년 || [목차] [clearfix] == 개요 == [[당나라]]의 재상이다. == 생애 == 이적지의 증조할아버지는 [[태종(당)|당태종]] 이세민으로, 할아버지는 태종의 폐태자 [[이승건]]으로, 아버지는 이상(李象)이다. 즉 이적지는 당나라의 종실이 된다. 이적지는 [[신룡정변]] 이후 좌위낭장에 임명되면서 본격적으로 관직 생활을 시작하였고, 개원 연간에는 통주(通州) 자사가 되어 실적을 쌓았다. 이후 급사중(給事中) 한조종(韓朝宗)이 안찰사(按察使)로 있으면서 특별히 표문을 올려 이적지를 천거하여, 이적지는 진주(秦州) 도독으로 발탁되었고, 섬주(陜州) 자사로 전임되고 입조하여 하남윤(河南尹)이 되었다. 이적지는 현종(당)|현종의 명을 받들어 곡수(谷水)와 낙수(洛水) 지역에 제방을 축조하고 치적을 쌓아 어사대부가 되었다. 739년, 이적지는 유주 대도독부 장사로 임명되어 절도사무를 맡아 공을 세웠다. 한편 이적지는 할아버지가 죄를 받아서 폐태자가 되어 죽고, 아버지가 [[측천무후]]로부터 쫓겨난 적이 있었기에, 이들의 장례를 태종의 무덤인 소릉에서 지내기를 주청하였다. 이에 이승건은 항산군왕으로 추존되고 시호를 민(愍)이라고 하였으며, 이상은 월주(越州) 도독, 순국공(郇國公)으로 추증되었다. 이적지는 이후 형부상서를 맡았다. 742년, 우선객이 죽자 이적지는 좌상을 맡았고 병부상서를 겸임하였으며 청화현공(淸和縣子)으로 책봉되었다. 이적지는 같은 종실 출신의 재상인 [[이임보]][* 이임보의 계보는 농서이씨 순왕파이다.]와 권력을 다투었는데, 이적지는 성격이 꼼꼼하지 못하여 자주 이임보의 꾀에 넘어갔다. 이임보는 이전에 이적지에게 “화산(華山)에 금광이 있어서 이를 채굴하면 가히 나라를 부유하게 만들 수 있는데, 주상께서는 아직 이를 모르고 계시오.”라고 말하였는데, 이적지는 이임보의 발언을 현종에게 알린다. 현종이 이임보에게 의견을 묻자, 이임보는 “신은 이를 오래 전에 알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화산은 폐하께서 태어나신 곳으로 제왕의 기운이 있는 곳인데, 마땅히 이곳을 굴착할 수 없기 때문에 신은 감히 말씀을 올리지 못했습니다.”라고 대답하였다. 현종은 이임보를 총애하였기에 이임보의 말을 신뢰하게 된다. 이윽고 이적지와 교유한 죄로 농우(隴右) 절도사 황보유명(皇甫惟明), 형부상서 위견(韋堅), 호부상서(戶部尙書) 배관(裴寬), 경조윤(京兆尹) 한조종이 모두 이임보에 의해 무고를 당하여 좌천되자, 이적지는 마음이 불안하여 산직으로 제수할 것을 청한다. 746년, 이적지는 지정사에서 파직되고 태자소보로 임명되어 이임보의 재앙을 벗어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이임보는 이적지를 가만히 내버려두지 않았다. 이적지는 결국 이임보의 무고로 의춘(宜春) 태수로 좌천되었다. 뒤에 어사 나희석(羅希奭)이 이임보의 명을 받고 위견, 노유림(盧幼臨), 배숙복(裴敦復), 이옹(李邕) 등을 유배지에서 살해하고 의춘군으로 당도하자, 이적지는 나희석이 왔음을 알고 독약을 마시고 죽었다. [[분류:수당시대/인물]][[분류:694년 출생]][[분류:747년 사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