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wiki style="margin: -5px -10px; padding: 5px 10px; background-image: linear-gradient(115deg, #cd313a 50%, #0047a0 50%)" '''[[독립유공자|{{{#ffffff 대한민국의 독립유공자}}}]]'''[br] {{{#ffffff '''{{{+1 이종성}}}'''[br]'''李鍾誠'''}}}}}} || || '''본관''' ||[[이(성씨)|흥양 이씨]][* [[http://muju.grandculture.net/muju/toc/GC06500725|#]]. 무주파 26세 종(鍾) 항렬.] || ||<|2> '''출생''' ||[[1871년]] [[5월 8일]] || ||[[전라도]] [[무주군|무주현]] 풍남면 철목리[br](현 [[전라북도]] [[무주군]] [[무풍면]] 철목리)[* [[http://muju.grandculture.net/muju/popup/multimedia/GC065P02585|#]]] || ||<|2> '''사망''' ||[[1910년]] [[4월 18일]][* 흥양이씨족보 1권 73쪽에는 1908년 4월 17일에 별세한 것으로 기재되어 있다.] || ||[[전라북도]] [[무주군]] 풍동면 문평리 흑석산 계곡[br](현 [[전라북도]] [[무주군]] [[무풍면]] 현내리 문평마을) || || '''묘소''' ||[[전라북도]] [[무주군]] [[무풍면]] 현내리 서당골마을 || || '''상훈''' ||건국훈장 애국장 || [목차] [clearfix] == 개요 == [[대한민국]]의 [[독립유공자]].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받았다. == 생애 == 1871년 5월 8일 전라도 무주현 풍남면 철목리(현 전라북도 무주군 무풍면 철목리)에서 아버지 이시봉(李時鳳, 1849년생)과 어머니 [[김해 김씨]](? ~ ?. 3. 8) 김달형(金達亨)의 딸 사이의 두 아들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그는 1908년 [[의병장]] [[문태수]] 의진에 입대하여 아장(亞將)에 선임되었다. 그 뒤 전라북도 무주군과 [[경상남도]] [[함양군]]·[[함양군|안의군]]에서 의병을 모집하는 데에 일조했으며, 같은 해 2월 18일 60여 명의 의병을 인솔하고 그 선봉장이 되어서 무주 주재소를 습격했다. 이듬해인 1909년 [[박춘실]] 의진과 연합하여 100여 명의 의병을 이끌고 [[덕유산]] 일대를 점령했는데, 그해 5월 8일 오후 4시에 남원경찰서 소속 켄마(間馬) 상등병 등 5명과 장수 주재소 일본인 순사 2명과 교전 끝에 13명의 사상자를 내고 [[http://db.history.go.kr/id/kd_014_0010_0140_0350|퇴각하였으며]], 그해 8월 중순에는 문태수 휘하에서 [[충청북도]] [[영동군]]·[[영동군|청산군]]·[[옥천군]] 등지에서 활약했다. 또한 같은 해 10월 30일 30여 명의 의병들과 함께 옥천군 이남일소면 강청리(현 옥천군 [[이원면]] 강청리) [[이원역]]을 습격하여 방화하고, 일본인 3명을 납치하기도 했다. 11월에는 무주군을 근거로 [[전라북도]] [[금산군]], 충청북도 영동군·청산군·옥천군 등지에서 일본군과 교전했다. 그러다가 1910년 4월 18일 밤 무주군 풍동면 문평리(현 무주군 무풍면 현내리 문평마을) 흑석산(黑石山) 계곡에서 소수의 의병과 함께 매복하고 있다가 일본군의 습격으로 교전 도중 전사했다. 1977년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건국포장을 추서받았고, 1990년에는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받았다. [[분류:한국의 독립운동가]][[분류:조선 의병장]][[분류:흥양 이씨]][[분류:무주군 출신 인물]][[분류:1871년 출생]][[분류:1910년 사망]][[분류:건국훈장 애국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