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fff {{{+1 이종수}}}[br]李鍾洙 }}}''' || ||<-2>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이종수.jpg|width=100%]]}}} || || '''호''' ||한산(閑山)|| || '''본관''' ||전주(全州)|| ||<|2> '''출생''' ||[[1906년]] 3월 20일(음력)|| ||[[평안남도]] [[대동군]] 추을미면 미림리[br](現 [[평양시]] [[사동구]] 미림동)|| ||<|2> '''사망''' ||[[1989년]] 11월 18일|| ||[[서울특별시]] [[마포구]] 성산동 49-8 자택[* [[https://www.joongang.co.kr/article/2413155|부고를 알리는 기사]]]|| || '''학력''' ||대동공립보통학교 {{{-2 (졸업)}}} [br][[평양고등보통학교]] {{{-2 (졸업)}}}[br][[구제고등학교|경성제국대학 예과]] {{{-2 ([[문과]] / [[수료]])}}}[br][[경성제국대학]] 법문학부 {{{-2 ([[영어영문학과|영어영문학전공]] / [[학사]])}}}|| [목차] [clearfix] == 개요 == [[일제강점기]] 조선, 대한민국의 영어영문학자이자 교육인. == 생애 == 1906년 3월 20일(음력) [[평안남도]] [[대동군]] 추을미면 미림리(현재 [[평양시]] [[사동구역]] 미림동)에서 부친 이완규(李完圭)와 모친 노영실(盧永實) 사이의 9남매 중 차남으로 출생했다. 1914년 4월 대동공립[[보통학교]]에 입학해 1919년 3월 졸업했고, 1919년 4월 [[평양고등보통학교|평양공립고등보통학교]]에 입학하여 1924년 3월 졸업했다. 그리고 1924년 5월 설립된 [[구제고등학교|경성제국대학 예과]]에 제1회 신입생(문과B조)으로 입학하였다. 이 때 이종수는 [[대학예과|예과]] 문과 A조(법문학부 법과 진학생반) 수석인 현민 [[유진오]]와 함께 문과 B조(법문학부 문과 진학생반) 수석으로 입학하여 경성일보 사장을 지낸 아베 미스이(阿部充家)의 초청으로 1924년 10월 조선호텔에 초대됐었다고 한다.[* 유진오 "양호기"(2019) 28~29쪽.] 그러나 [[대학예과]]에 입학한 직후인 1924년 5월(음력) 부친 이완규가 별세했다. 1926년 3월 예과를 수료한 이종수는 법문학부 문과로 진학한 후, 문학과 영어영문학 전공으로 진입했고 1929년 3월 경성제국대학 법문학부를 졸업하고 문학사를 받았다. 대학 졸업 후 1929년 4월부터 1931년 3월까지 목포공립상업학교([[목포상고]]) 교유로 근무했다. 목포상업학교를 사직한 후 경성으로 올라온 이종수는 대학 동기인 [[유진오]], 최창규, 김계숙 등과 함께 조선사회사정연구소를 설립하였다. 또 [[춘원 이광수]], [[주요한]]과 친분이 깊었던 그는 1931년 3월부터 1932년 10월까지 동광잡지사(東光雜誌社) 편집기자로 근무했고, [[조선일보]]로 옮겨서 1932년 11월부터 1934년 3월까지 조선일보사 기자로 활동했다. 이후 학업을 위해 조선일보사를 사직한 이종수는 1934년 4월 모교 경성제국대학 대학원에 입학하여 1937년 3월까지 연구생으로서 영문학연구실에서 연구했으며, 그동안 妻 최순경(東京吉祥寺音樂體育專門學校 졸업)과 혼인하고(1935.3.1) 1935년 12월부터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tem/E0027788|협성실업학교]]([[광신상업고등학교]]) 교원으로 근무했다. 1936년 5월 장녀 정은, 1938년 9월 차녀 영은이 태어났고 1939년 9월(음력) 모친이 별세했다. 1940년 4월 중앙상업학원 원장이 된 이종수는 1942년 3월 3녀 효은, 1944년 6월 4년 성은을 낳았고, 해방 직후인 1945년 10월 경성사범학교 교수로 부임했다. 이어 [[국대안]]에 따라 그의 모교인 [[경성제대]]를 중심으로 경성부와 근교 수원농전 등 관공립 [[구제전문학교]]와 경성사범학교 등을 통합하여 1946년 10월 국립서울대학교가 탄생함에 따라 이종수도 [[서울대학교 사범대학]] 교수가 되었다. 1947년 3월 장남 세경이 출생했고, [[6.25 전쟁]] 중인 1950년 10월 차남 보경이 태어날 때까지 이종수는 [[서울대학교 사범대학]] 학장서리(1948.5~6), 서울대학교 교무처장•대학원위원회 위원•평의원(1948.6~1949.3) 등을 역임했으며 환도 후인 1952년 7월 문교부 교수요목제정심의위원회 위원으로 위촉되었다. 1953년 9월부터 1954년 7월까지 1년간 미국 정부 초청으로 [[뉴멕시코 대학교]] 및 [[위스콘신 대학교]] 대학원에 유학하면서 영어영문학을 연구하였다. 귀국 후에도 서울대 교무처장, 사범대학장 등 학교 행정의 부담을 진 이종수는 1959~1960년 그리고 1962~1967년 [[유네스코]] 한국위원회 위원을 지내기도 했으며 [[홍익대학교]]•[[성균관대학교]]에 임시이사로 파견 근무한 바 있다. 그는 1962년 8월 [[근정훈장|청조소성훈장]](靑條素星勳章)을 받았고, 1963년부터 1971년까지 서울대학교 교육대학원장을 역임했다. 이 와중에 1966년에는 국제교원양성협의회(ICET) 집행위원으로서 8월에 열린 타이베이 대회에서 "한국교사교육의 전망"을 발표하였다. 1971년 2월 [[영남대학교]]에서 명예문학박사를 받았고 1971년 8월 25년간 근무한 서울대학교 교수에서 정년퇴임하였다. 학문적 업적으로는 한국셰익스피어협회의 창설 멤버로 활약[* 이때 이종수 교수와 함께 협회 창립에 참여한 사람이 [[권중휘]] 전 [[서울대학교/임원|서울대학교 총장]]이다. 권중휘 총장은 이종수 교수보다 딱 1살 많아서 친구 사이나 다름없었다.]하면서 〈멕베드〉·〈줄리어스 시이저〉 등 셰익스피어의 주요 작품과 쇼(Shaw, G. B.)의 〈인간과 초인간〉 등 극작품들을 주해, 번역하여 소개하는 한편, 영어교육에 관한 많은 저서와 논문들을 출간하였다. 셰익스피어작품의 주해와 번역은 그 정확함과 유려함으로 정평이 나 있다. 한편, 국내에서는 최초로 영어교수법의 이론과 실제를 본격적으로 다룬 저서로 인정받는 《영어학습지도법》과 《영한사전》, 중학교 및 고등학교 영어교과서 등을 출간하여 우리나라 영어교육 발전에 크게 기여하였다. [[분류:1906년 출생]][[분류:사동구역 출신 인물]][[분류:경성제국대학 출신]][[분류:서울대학교 출신/전신 학교/인문대학]][[분류:1989년 사망]][[분류:대한민국의 문학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