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류:남북조시대/인물]][[분류:493년 출생]][[분류:530년 사망]][[분류:암살된 인물]][[분류:신저우시 출신 인물]][[분류:추존된 왕]] [include(틀:위서(북조))] [include(틀:북사)] [목차] == 개요 == 爾朱榮[* 이씨가 아니라 [[복성]]인 '''이주씨'''이다.] 493~530 [[중국]] [[위진남북조시대]] [[북위]] 말기의 [[군벌]]이자 권신. 자는 천보(天寶)였으며, 시호는 진무왕(晉武王)이었다. 북수용(北秀容)[* 현 [[산시성(산서성)|산서]](山西) 신저우시의 일부] 사람으로 선대는 '''글호부'''(契胡部)[* 혹은 '''해란'''(奚丹). [[흉노]]계의 일파인 [[갈족]]의 후예로써 선비족에 동화되었다. 후대에 흥기한 [[거란]]족의 선조로 간주된다. '거란'(契丹)이 한 글자씩 공교롭게도 들어 있다.]의 유력 부족인 이주부(爾朱部)의 [[추장]]이라고 일컬어졌다. 선조가 이주천(爾朱川)[* 지금의 산서성 서북부 유경신지(流經神池), 오채(五寨), 보덕현(保德縣)의 주가천(朱家川).]에 거주한 까닭에 '''이주'''(爾朱)를 성씨로 삼았다. 나중에 '''[[육진의 난|육진의 대란]]'''을 진압하고 '''하음의 변'''을 통해 북위 말기의 권신이 되었다. 얼핏 보기엔 《[[삼국지연의]]》에 나오는 후한 말기의 간신 [[동탁]]과 포지션이 비슷했고 이는 북위 황실도 그렇게 생각했던 바지만, 군사적 능력, 인격, 자제력, 정치적 감각 모든 면에서 동탁의 [[상위호환]]인 상당한 능력자였다. 훗날 이주씨를 멸망시키는 [[고환(남북조시대)|고환]]의 위험성도 이미 알아차리고 있었던 걸로 봐선 상당한 걸물이었다.[* 심지어 그의 휘하에 있었던 사람 중 3명이 황제가 되었다.] 하지만 실은 만만찮은 인물이었던 경종 [[효장제]] 원자유(제10대)를 단순 찌질이로 얕보고, 대비하지 않은 탓에 어이없게 당하고 말았다. == 생애 == 부친은 이주신흥(爾朱新興)으로 역사에서 이르기를 >"가세가 호족으로 점유하여 재화가 풍성했다." 라고 했으며 >"조정에서 매양 정벌함에 있어 사가의 말을 늘 헌납하고, 겸하여 물자와 식량을 구비해 군용으로 도왔다." 고 하니 이런 공로로 산기상시(散騎常侍), 평북장군(平北將軍)에 임명되었다. 이주영은 깨끗하고 미려한 용모에, 궁술과 수렵을 좋아하고, 자못 병법에 밝았다. 젊어서는 북위에 사관하고 용맹과감하여 제9대 숙종 [[효명제]](孝明帝) 시대에는 유격장군(遊擊將軍)이 되었다. 북위 후기의 정권에서 '''[[육진의 난]]'''을 진압한다는 명분을 내걸고 기병하고는 신속히 군사적 역량을 키워 유격장군(遊擊將軍)·관군장군(冠軍將軍)·평북장군(平北將軍)·북도도독(北道都督)에 임명되었다. 정광(正光) 연간(520~525)에는 육진의 난을 평정하는 무공을 세웠고, 이에 의해 거기장군(車騎將軍)·대도독(大都督)·통령병사분광항운육주제군사(統領並·肆·汾·廣·恒·雲六州諸軍事)가 더해졌다. 육진의 난이 일어난 당시 곳곳에서 반란이 일어났고, 난을 일으킨 당사자들끼리 세력을 키우기 위해 서로 싸우는가 하면 관군에 대항할 때는 힘을 합쳐서 대응하는 등, 흡사 후한 말기 [[황건적의 난]]이 일어났을 때를 방불케하는 상황이었는데, 이주영은 군사적인 지휘에서는 썩 뛰어나지 못했던 동탁과는 달리 지휘관으로서의 자질도 대단한 편이었다. 직접 지휘하는 작전 대부분에서 승리를 거두었고 인재를 알아보는 눈도 뛰어났다. 이 시기에 맞아들인 부하들이 바로 [[우문태]], [[고환(남북조시대)|고환]], [[후경]] 등 훗날 북위와 [[양(남조)|양나라]]를 뒤흔들게 되는 사람들이었다. 그러던 중 [[효명제]](孝明帝) 건의(建義) 원년(528), 무천진(武川鎭)에 있다가 생모 [[영태후]]의 전횡을 제거하라는 효명제의 밀조를 받았으나 음모가 노출되어 효명제는 영태후에게 독살되고 말았다. 이를 알게 된 이주영은 [[고환(남북조시대)|고환]](高歡)을 선봉으로 삼아 휘하 기마 유목민을 통솔하고서 효명제의 종제인 [[효장제]](孝莊帝) 원자유(元子攸)를 세워 수도 [[낙양]](洛陽)을 공격했다. 당시 [[비구니]]가 되어 살게 해달라는 영태후 호씨의 요청을 거절하고 영태후가 세운 효명제의 당질 소공제(少恭帝) [[원조(북위)|원조]](元釗)와 함께 [[황하]]에 처넣고 아울러 원씨 황족 및 백관 등 북위의 [[높으신 분들]] 2,000여 명을 하음(河陰)[* 지금의 [[하남성|하남]](河南) 맹진현(孟津縣)]에 끌어내어, 철기로 포위하고 모두 죽였다. 이를 역사에서는 '''하음의 변'''(河陰之變)이라고 한다. 이때 효장제 원자유의 형과 동생까지 별 핑계없이 죽였는데 이는 효장제가 기어오르지 못하게 겁을 주는 의미도 있었다. 수도 낙양과 읍(邑)의 사대부가 열에 하나 없이 인솔하여 모두 도피해 감히 나오는 자가 없고, 호위는 공허하여 관(官)이 폐허가 되었다는 기록이 있으나, 거기까지는 동탁과 어느 정도 비슷했지만 동탁의 사례를 잘 알고 있었던 이주영은 낙양을 싸그리 쓸어버리려다가 측근의 간언을 듣고 철회했다. 이후 그는 자기가 '하음의 변'에서 죽인 이들에게 시호를 올려주거나 장례 비용을 지원하는 등 나름 후회하는 제스처도 할 수 있는 한 최대한 취했고, 그러자 낙양의 민심도 어느 정도 그럭저럭 수습되었다. 또한 이주영은 살아남은 기존 관원들에게 파격적인 승진 조치도 선사했다. 얼마 뒤 효장제에게 자기 딸 이주영아(爾朱英娥)[* 이 여인도 아주 인생이 기구했다. 효장제와의 첫 아이는 사촌인 [[이주조]]가 죽여버렸고, 이후 비구니가 되었다가 고환의 첩이 되어 두 아들까지 낳았다. 하지만 의붓아들인 [[고양(북제)|고양]](북제 제1대 현조 문선제)에게 강간당할 위기에 몰리자 자살하고 말았다.]를 시집보내 국구(國舅)가 되었으며, 나아가 도독중외제군사(都督中外諸軍事), 대장군(大將軍), 상서령(尙書令), 영군장군(領軍將軍)에 취임했다. 이윽고 대[[승상]](大丞相) 태원왕(太原王)으로 책봉받고는 적자인 이주보리(爾朱菩提)[* 여기서 '제'([[提]])는 [[범어]]를 빌려 적은 글씨이니 '리'로 읽어야 한다.]와 함께 제위를 찬탈할 기회를 엿보았다. 이주영의 제위 찬탈은 실현되지 않았지만 동년 8월에는 [[후경]](侯景)을 선봉으로 삼아 [[갈영(북위)|갈영]](葛榮)이 영도하는 [[하북성|하북]](河北)의 봉기를 진압해 멸하고 북진(北鎭)의 난(육진의 난)을 평정했다(528). 이윽고 북위 황족인 북해왕(北海王) [[원호(북위)|원호]](元顥)[* 북위 제6대 현조 [[헌문제]]의 손자이고, 북해평왕(北海平王) 상(詳)의 아들로 제10대 경종 [[효장제]]의 [[사촌|종형제]]였다.]를 옹위하고 침공해온 [[양(육조)|양나라]]의 장군 [[진경지]](陳慶之)의 [[대통북벌|북벌군]]을 깨뜨리고 천주대장군(天柱大將軍)을 칭하면서 천자의 장인로서의 전횡이 극에 달하게 되었다. 그래도 사위인 효장제의 통치 행위를 대놓고 방해하지는 않았으며, >"그렇게 원하는 대로 할거면 짐을 폐위하고, 당신이 직접 황제를 하라." 고 효장제가 대놓고 말하며 불만을 표시할 때도 일단 그럴 때는 물러서서 사죄하는 등, 《삼국지연의》의 동탁, 조조, 사마사, 사마소 등이나 남조의 [[무제(유송)|유유]], [[고제(남제)|소도성]] 등과는 달리 지킬 수 있는 선은 꽤 지킨 편이었다. 이런 면에서는 오히려 [[동진]]의 권신이었던 [[환온]]과 비슷한 유형이 아니었을까 싶다. 또한 딸이자 효장제의 아내였던, 당시 10대 후반 나이의 이주황후[* 이주영아]가 자신의 권위를 믿고 남편을 항상 업신여겼는데, 이에 대해 이주영의 조카인 [[이주조]]가 점잖게 사촌인 이주황후에게 선을 지키라고 훈계하는 일도 있었다. 확실히 동탁보다 이주영이 정치감각이나 눈치가 꽤 뛰어났음을 알 수 있다. 하지만 효장제는 장인의 발호와 전횡을 늘 괴롭게 여겼고, 어디까지나 이주영은 [[망탁조의|동탁과 사마사 같은 인물]]임을 확신하고 있었다. 게다가 효장제는 이렇다할 지원 세력이나 후견 세력이 없고 너무 어렸던 동탁 당시의 [[헌제]] 유협과는 달리, 나이가 어느 정도 있었던데다가 능력이 나쁘지 않았고, 수도 낙양 내에서도 어느 정도 지지 세력을 확보하고 있었다. 그러던 중 효장제는 영안(永安) 3년(530) 9월, 이주황후[* 이주영아]가 임신 8개월 중이었으므로, 장인인 이주영에게 아들을 낳았다고 알리게 하고 동시에 암살을 노렸다. 한편 이주영은 외손자가 탄생했다는 소식을 접하고는 크게 기뻐하면서 딸의 상견을 위해 아들인 이주보리 및 본인 파벌의 [[종친]]인 상당무소왕(上黨武昭王) 원천목(元天穆)[* [[탁발울률|평문제]]의 곤손(昆孫), 고량신무왕(高涼神武王) 고(孤)의 [[내손]](來孫), 송자무후(松滋武侯) 도(度)의 [[증손]], 양양경후(襄陽景侯) 을근(乙斤)의 손자, 옹주자사(雍州刺史) 장생(長生)의 아들로 고조부는 알려지지 않았고, 제10대 경종 [[효장제]]의 16촌 고조부뻘이었다.] 등을 데리고 황궁에 도착했으나 효장제는 이를 기회로 궐내에서 이주 부자와 원천목 등을 주살했다.[* 《[[자치통감]]》에는 효장제 본인이 직접 맨 처음 칼로 찔렀다고 기록되어 있다.] 실제로 효장제와 그 측근들은 [[왕윤]]의 동탁 모살을 연구하여 이주영 살해를 계획했다. 단, 효장제와 측근들은 이주영을 살해하고, 나머지를 사면하면 거사가 성공할 수 있다고 여겼지만, 효장제에겐 헌제와는 달리 [[여포]] 같은 역할을 해줄 사람이 없었다. 그리고 그 결과는(…) 게다가 동탁은 그야말로 여러 면에서 막장의 극을 달렸지만 이주영은 그 정도까지는 아니었던지라 지지세력이나 인망이 동탁보다 훨씬 뛰어난 편이었다. 그리하여 이주영이 암살당한 이후, 일족인 [[이주조]](爾朱兆)·이주세륭(爾朱世隆)·이주천광(爾朱天光)·이주중원(爾朱仲遠) 등이 거병했다. 당시 이주영의 조카인 이주조가 [[병주]](幷州)에서 출병하여 원공(元恭)을 세우니 이가 [[절민제]](節閔帝)(제12대)이다. 효장제는 낙양이 함락되면서 폐위되었고 병주(幷州) 태원군(太原郡) 진양현(晉陽縣)으로 끌려가 시해되었다.[* 현 [[산시성(산서성)|산서성]] [[타이위안|태원]]] 나중에 선비화된 [[한족]] 고환이 이주영의 군대 200,000명을 거두어 [[기주]](冀州)를 점거함으로써 이주씨 일문은 멸족되었다. 북위는 내리막길에 들어서게 되었고, 나아가 [[동위]](東魏)와 [[서위]](西魏)로 분열하여 멸망하게 되었다. == 휘하의 인물 == 이주영 휘하의 중요 인물로는 [[고환(남북조시대)|고환]], [[우문태]], [[후경]] 등이 있는데 이들은 모두 새로운 왕조의 실질적인 창업자가 되거나 직접 황제가 되었다. 고환은 [[북제]](北齊)의 실질적인 창업자, 우문태는 [[북주]](北周)의 실질적인 창업자였으며 후경은 잠시나마 [[양(육조)|양나라]]의 [[양간문제|간문제 소강]]을 폐위하고 황제가 되었다. 하지만 고환이나 우문태와 달리 후경은 정치적으로 무능한 무장으로 벼랑끝에 몰려 질렀던 최후의 발악이 허약한 양나라를 무너뜨릴 줄은 몰랐다. 결국 왕조의 실질적인 창업자로 역사에 남은 고환 및 우문태와는 달리 후경은 후한(侯漢)를 세웠으나 즉위한지 얼마 안되어 제거됨으로써 역사에 반역자로 남게 되었다. [include(틀:문서 가져옴,title=이주영,version=8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