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clude(틀:조선 시대의 실패한 내란)] [목차] [clearfix] == 개요 == [[조선]]의 [[무신]] [[이징옥]]이 일으킨 [[반란]]. [[이시애의 난]]과 더불어 [[조선 세조|세조]] 시기의 대표적인 [[내란]]이다. == 진행 == [[단종(조선)|단종]] 원년 [[계유정난]]이 일어나 [[김종서(조선)|김종서]]가 살해되고, [[수양대군]]이 김종서와 [[황보인]], [[정분]], [[안평대군]] 등 고명대신과 반대파 [[왕족]] 및 측근 인물들을 숙청하면서, 이징옥도 궁지에 몰리게 되었다.[* 실록 기록을 보면 계유정난 이전부터 [[한명회]], 홍달손이 대놓고 이징옥도 김종서, 황보인, 안평대군 등과 함께 역모를 꾸미는 무리라 말하고 수양도 동의하는 장면이 나온다. 즉 이징옥이 계유정난 후 적극적으로 수양파로 전향하지 않는 한 가만히 있거나 벼슬을 버리고 낙향해도 숙청이 안될 가능성은 거의 없었을 것이다.] 수양대군은 김종서 측근인 이징옥이 [[역모]]를 일으킬 가능성이 있다고 여겨서 파면하고, 함경도 도절제사에 박호문(朴浩文)을 임명했다. [[이괄의 난|이징옥은 후임 함경도 도절제사로 온 박호문[* 과거 김종서를 모함했던 인물이다.]에게 직위를 인계하고 한양으로 돌아오던 중에 수양대군의 정변 소식과 김종서의 죽음을 듣자 상황을 파악하고[* 한양으로 가면 그를 기다리는 건 죽음 잘해봐야 [[숙청]] 뿐이다. 이징옥으로서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다시 돌아가 박호문을 살해한 다음[* 이징옥한테 참수된다.] 군사를 일으켜]] 북방으로 가서 [[여진족]]을 끌어들여 '''스스로 [[황제]]를 칭하며''' 옛 [[금나라]] 수도 [[오국부|오국성]]에다가 [[금나라|대금(大金)]]을 세우고 [[반란]]을 도모하려 한다. 그러나 그의 계획은 부하 [[정종]]과 이행검의 배신으로 실패하고 만다. [[조선왕조실록]]에 따르면 반란 이후 항상 무장한 상태로 잠도 안자고 있어서, 부하 '정종'은 날씨가 추우니 부하들이 술을 먹게 해달라고 요청했고 이징옥도 이를 승낙하고, 정종이 술을 바쳐서 막 마시려는 찰나에 부하들이 화살을 날렸고 화살을 맞고 도망치던 중에 추격자에 의해 암살당했다고 한다. [[야사]]에서도 비슷하게 전개되었는데 [[수양대군]]의 밀계를 받은 병사 두 명이 그를 살해하려고 잠입하여 술에 취해 잠든 그의 오른팔을 잘랐다. 이에 이징옥은 [[역관광|오히려 칼을 빼앗아 역으로 그들을 죽이고]] 밖으로 나왔는데 회령부사 정종과 호군 이행검이 잠입시킨 군사들이 이징옥을 살해하기 위해 포진해 있었다. [[이징옥]]은 오른팔이 잘린 상태에서 칼 한자루 뿐인 맨몸으로 수백명이나 쓰러뜨리면서 사투를 벌이다가 다음 날아온 화살들에 전신을 맞으면서 처참하게 최후를 맞았다.[* 야사에는 이 때 그의 나이가 24세였다고 적혀 있는데 이징옥의 활약 연대로 봐서는 틀린 기록이다. 활약 연대로 유추해 보면 1400년 전후로 출생한 것으로 추정되는데 야사의 24세(二十四)라는 기록을 54세(五十四)의 오기로 보는 시각도 있다.] 사후 시신은 [[거열형]]으로 찢겨졌으며 목은 베여져 3일간 [[효수]]되었다가 [[한양]]으로 보내져 조정에 바쳐졌다. == [[미스터리 관련 정보|미스터리]] == 반란이라곤 해도 이징옥의 난이라 불린 이 사건은 사실상 이징옥에게는 선택의 여지가 없어 궁지에 몰린 이징옥의 '''[[최후의 발악]]'''적 성격이 강하다. 다만 아무리 궁지에 물렸다지만 출신도 [[경상도]] 출신이라 지연도 없고 [[4군 6진]] 개척 토벌로 [[여진족]]들에게는 공포와 증오의 대상이라 인맥도 전혀 없고 사이도 영 안 좋은 인간이 갑자기 대금 황제를 자칭한 일이나, 이징옥의 아들이 이징옥의 [[첩]] 혹은 그냥 친한 [[기생]]을 [[황후]]라 말하는 점, 이징옥이 살해된 직후 조선 상황을 알기 힘들었을[* 단종실록에는 단종 2년(1454년) 단종이 청계산에서 사냥하는데 마침 여진족으로써 사냥 행차를 따라 왔던 동속로첩목아(童速魯帖木兒) 등이 "'''우리는 [[이성계|태상왕]]께서 다시 나오신 줄 알고 이렇게 찾아뵈었다'''"라고 대답했다고 나와 있다.(출처: [[http://sillok.history.go.kr/id/kfa_10212017_001|단종실록 12권, 단종 2년 12월 17일 계사 1번째기사 1454년 명 경태(景泰) 5년]]) 태조가 죽은 것이 언제인데(...)] 야인들이 수양대군[* 당시는 계유정난이 끝난지 보름도 안된 시점이었고 수양대군도 조선 중앙정계에나 잘 알려져 있었지 크게 [[전국구]]적으로 알려진 사람도 아니였다.]을 칭송했다는 기록 등 현실적으로 너무 어처구니 없는 [[단종실록]]의 기록 때문에 이징옥의 난을 세조의 조작으로 평가하는 사람도 있다. 애초에 이징옥이 '''무력으로 [[조선 세조|세조]]를 몰아내고 [[단종복위운동|단종을 복위시키려 했던 것]]'''을 세조측에서의 [[역사왜곡]]이라는 주장도 있을 정도. [[채제공]]은 자신의 문집 번암집에서 '''이징옥의 난은 [[단종복위운동]]으로 이징옥이 [[칭제건원]]한 적은 없다'''고 주장한다. === 번암선생집의 기록 === >李節度澄玉者。梁山人。自少武勇絶人。兄澄石亦以力爲州里所伏。其母欲見生野豕。澄石卽日射一豕而歸。澄玉出門二日。始徒手還。母訝之。澄玉與其母出外庭。一大豕臥於場。脅息瞪目。其狀甚獰。蓋澄玉必欲令母目見生豕。跡而逐之。超山越壑。竆日夜蹴迫。必使疲頓氣盡而至於是也。每射虎。張目叱之。虎便闔眼。低首而走。金宗瑞以江界府使。知澄玉忠且勇。擧以自代。時年二十二。未幾陞拜北方節度使。璽書諭曰。卿之威武大振。雖古人無以過之。虜皆讋服。予甚嘉之。須體寡人之至意。永作北鄙之良將。以副予心。旣莅營。選六鎭藩胡驍敢善騎射者三千。皆隷牙下分爲隊。每廵列邑也。使之各出境迎送焉。光廟受禪。密遣朴好問代之。澄玉疑之曰。曾有密敎。非國有大事不召我。今佗將之匿聲來代。何也。於是捽下新節度問之。好問不敢諱。遂殺之。謀擧兵直指京師。約其麾下曰。吾渡江請命于天朝。復上王事蔑不濟矣。決以明日行。鍾城府使鄭種知其謀。是夜使人伏於板上。乘其熟睡斫右臂。澄玉驚起奪其劒。赤身飛出。左手擊殺百餘人。身亦被亂箭死之。年二十四。忠臣義士聞之。莫不暗暗流涕。光廟三年。爲冤死人招魂。設供於東鶴寺。特書李澄玉於錦城大君及六臣列。嗚呼。聖人之不以嫌害義。以勸千古爲人臣者盡心所事之忠。其意不亦宏達乎哉。 >이 [[절도사|절도]](李節度) 징옥(澄玉)이라는 자는 양산(梁山) 사람으로 어려서부터 무용(武勇)이 보통 사람보다 뛰어났다. 형인 징석(澄石) 또한 힘으로 주리(州里)에서 탄복하였다. 그 어머니가 산 [[멧돼지]]를 보고 싶어 하였는데 징석이 그 날로 활로 멧돼지 한 마리를 쏘아 돌아왔다. 징옥은 문을 나선지 이틀 뒤에야 비로소 맨손으로 돌아왔다. 어머니가 묻자 징옥은 그 어머니와 함께 뒤뜰로 나왔다. 한 마리의 큰 멧돼지가 마당에 드러누워 있는데, 씨근거리며 눈을 부릅뜨고 있어 그 생김새가 매우 기괴하였다. 대개 징옥이 꼭 어머니로 하여금 산 멧돼지를 눈으로 보게 하기 위하여 뒤 밟아 쫒아, 어떤 때는 몰고 어떤 때는 역습을 당하면서, 산을 넘고 들을 건너면서 밤낮으로 발로 차고 협박하여 굴복시키고, 반드시 기진맥진하게 만든 다음에 발로 차서 몰고 온 것이었다. [[호랑이]]를 쏠 때마다 눈을 부릅뜨고 호통을 치면 호랑이가 눈을 감고 머리를 떨구고 달아났다. >김종서(金宗瑞)가 강계부사(江界府使)가 되어 징옥이 충성스럽고 또한 용맹함을 알고 자신의 후임으로 천거하였다. 이때 나이 스물둘이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지위가 올라서 [[병마절도사|북방절도사]](北方節度使)가 되었다. 새서(璽書)로 그를 효유하였다. >"경의 위엄과 무예가 크게 떨쳤으니 옛 사람이라 하여도 그보다 더하지는 못할 것이다. [[오랑캐]]들이 모두 와서 복속하였으니 내 매우 가상히 여긴다. 모름지기 과인의 지극한 뜻을 이루었다. 길이 북도(北鄙)의 양장(良將)으로 내 마음에 부합하라." >드디어 군영에 이르러 육진(六鎭)의 번호(藩胡)들로 날래고 용감하며 기사(騎射)를 잘하는 자 3천 명을 뽑아 모두 아장 아래에 나누어 예속시키고 부대로 삼았다. 열읍을 순시할 때마다 그들을 시켜서 각기 국경을 나가서 맞이하고 보내고 하였다. >광묘(세조)께서 선양을 받으시고 은밀히 박호문을 보내어 그를 대신하게 하였다. 징옥은 그를 의심하고 말하였다. >"일찍이 밀교(密敎)가 있기를 '국가에 큰 일이 없으면 나를 부르지 않겠다'고 하셨다. 지금 다른 장군이 그 온다는 소리도 숨기고 와서 나와 교대하려 하니 어째서인가?" >호문은 감히 숨기지 않았다. 마침내 그를 죽이고 모의하여 군사를 일으켜 곧장 경사로 나아가고자 하였고, 그 휘하에 약속하였다. >"내가 강을 넘어서 [[천조]]에 명을 청하면 상왕(단종)을 복위시키는 일은 어렵지 않을 것이다. 이를 날 밝는 대로 결행할 것이다." >종성부사 정종이 그 모의를 알고 그날 밤에 사람을 시켜서 판상에 숨어서 그가 깊이 잠든 틈에 그의 오른편 어깨를 찍어 끊었다. 징옥이 놀라 일어나서 그 칼을 빼어 맨몸으로 솟구쳐올라 왼손으로 수백 명을 쳐 죽이고, 그 자신도 어지러이 날아드는 화살에 맞아 죽었다. 이때 나이 24세였다. 충신 의사가 이를 듣고 암암리에 눈물 흘리지 않는 자 없었다. 광묘 3년([[1457년]])에 원통하게 죽은 자를 위해 초혼하고 그 공양을 동학사(東鶴寺)[* 계룡산 동학사. 이곳에 사육신의 위패를 모신 숙모단이 위치하고 있다.]에서 베풀었을 때, 특별히 이징옥을 [[금성대군]]과 [[사육신|여섯]] [[생육신|신하]]의 반열에 썼다. 오호라, 성인이 그 꺼리는 바를 가지고 의를 해치지 않으심으로 하여 천고에 인신된 자에게 그 마음을 다해 힘쓰는 충성을 권하게 하셨으니, 그 뜻이 또한 멀리까지 미치지 않을 것인가. >----- >번암선생집(樊巖先生集)권55 전(傳) 이절도전(李節度傳)[[https://db.itkc.or.kr/dir/item?itemId=MO#/dir/node?dataId=ITKC_MO_0543A_0590_020_0020&solrQ=query%E2%80%A0%EC%9D%B4%EC%A7%95%EC%98%A5$solr_sortField%E2%80%A0$solr_sortOrder%E2%80%A0$solr_secId%E2%80%A0MO_BD$solr_toalCount%E2%80%A024$solr_curPos%E2%80%A07$solr_solrId%E2%80%A0BD_ITKC_MO_0543A_0590_020_0020|#]] == 이후 == 이후 [[연좌제]]로 그의 장남 이자원(滋源)과 차남 이윤원(潤源)은 처형 또는 이징옥과 함께 살해되었고, 딸은 [[노비]]로 분배되었다. 당시 8세였던 셋째 아들 이연원(淵源)은 [[유모]]가 구출하여 은신, [[경상북도]] [[경주시|경주]] [[토함산]] 서편 아래 상신곡에 숨어들어, 은거하여 본관을 초계라 칭하고 세계를 이어갔다가(경주시 외동읍 신계리), 그의 후손들은 [[순조]](純祖) 때 다시 세상에 나왔다. 이징옥의 형 이징석과 동생 이징규는 이징옥과 달리 계유정난에 가담했기에 [[공신]]에 책봉되었는데 이 사건으로 체포되었으나 형식적이었을 뿐 전부터 이징옥과 사이가 안좋았고 적극적으로 난을 토벌하기도 하여서 세조가 그들을 연좌하지 않았기에 석방되어 무탈하게 지내게 된다. [[계룡산]] 동학사 숙모전에 배향되었고, [[강원도]] [[영월군]] [[장릉(영월)|장릉]]의 단종 배식단 사우에 배향되었다. 1698년([[조선 숙종|숙종]] 24) 《장릉지(莊陵誌)》에 신원상소(伸寃上疏)가 올려졌으며 여러 차례 논의 끝에 1791년([[정조(조선)|정조]] 15년) 관작이 회복되고 충강(忠剛)의 시호가 내려졌다. 이어 장릉배식단(莊陵配食壇)에 배향되었다. 그러나 정조 사후 [[노론]]이 집권한 후에 다시 관작이 추탈되었다. 1908년([[융희]] 2년) 4월 30일에야 [[내각총리대신]] [[이완용]](...)의 건의로 복권되었다. 당시 이완용은 과거의 인물들의 신원을 회복하고 시호를 붙여주는 명예회복 사업을 활발하게 시행했는데 이징옥도 여기에 포함된 것. == 대중매체 == [[이징옥]]이 조선시대를 다룬 TV [[사극]]에서는 그다지 주목받지 못하거나 영 폄하에 가깝게 묘사되기에 이징옥의 난 또한 초인적인 용력과 관련된 일화가 많이 남아있는 데에다 황제국을 칭했다는 등, 극화하기 좋은 매우 흥미로운 요소들을 잘 갖췄음에도 이 시대를 다룬 [[사극]]에서는 그저 그런 역사적 헤프닝 정도로 등장한다. * [[고우영]]의 만화 오백년에서는 이징옥의 난에 대해서 자세히 다룬다. 그리고 이징옥 반란이 성공하여 [[만주]]에 [[크고 아름다운]] 나라를 세워 국세를 떨쳤으면 어땠을까에 대한 [[대체역사]]적 상상을 늘어놓다가 결론은 '''"[[아시발꿈|꿈깨!]]"'''(...) * [[파천무]]에서는 김종서의 죽음을 알게 된 이징옥이 처음에는 김종서의 복수를 위해 군사를 일으키지만, 당장 자신이 이끄는 군사만으로 곧바로 한양까지 밀고 들어가기 어렵다는 생각에 노선을 바꿔 '''스스로 황제가 되어 북쪽을 싹 정리한 뒤 대제국을 세워 그 전력을 동원해 수양대군까지 죽이겠다'''며 대금국을 세우는 것으로 나온다. 이후 이징옥이 황제를 자칭했다는 소식이 한양까지 전해지자 모든 대소신료들이 기막혀 하는 가운데 "역적놈이지만 황제를 자칭하다니 그건 사내답다"고 하는 [[홍윤성]]의 반응이 압권. 이후 수양대군파의 계략으로 부하들 간에 내분이 일어나 사망한다. * [[한명회(드라마)|한명회]]에서는 '''아주 악의적으로 [[역사왜곡]]'''을 해놔서 황제가 되었다고 실실 웃어제끼기나 하는 한심한 모습에 최후 장면도 마치 만취 노숙자처럼 만들어놨다. [[이징옥]]의 기록상 모습과 지나치게 차이가 심할 정도로 사람 하나를 비하해놓았다. 당시 이 드라마를 통해 이징옥의 코믹한 모습만을 기억한 어린이들이 나중에 이징옥의 실제 행적을 찾아보고는 그 괴리감에 놀랄 정도였다. '''[[한명회]] 미화 드라마의 한계.''' * [[왕과 비]]에서도 등장하였으나 '''[[세조(조선)|세조]] 미화 드라마답게 [[악역]]'''에 가깝게 그려지며, 청렴한 인품이나 공적은 전혀 묘사되지 않은 채 김종서 사망 이후 포악한 성격으로 그려진다. 무엇보다 이징옥이 난을 일으키는 바람에 정치적 수세에 몰려있던 수양대군이 전화위복을 맞게 되었다는 식으로 묘사되어, 결과적으로 [[단종(조선)|단종]]의 앞날에 악영향만 끼치게 된다. 하지만 의외로 최후에는 자신의 한계와 처지를 깨닫고 담담하게 최후를 맞는다. 담당 배우는 [[송용태]]. 재미있게도 이 배우는 한명회에서 이징옥을 암살하는 정종 역을 맡았었기에 예전의 자신이 지금의 자신을 죽이는 [[배우 개그]]가 되었다. * [[이원호(소설가)|이원호]]의 [[대체역사물]] [[반역]]에서의 주 배경. 이징옥의 난이 실패하고 여진족과 같이 있느라 살아남은 이징옥의 막내아들 이반이 장성 후 복수를 위해 조선에 들어와 이징옥을 배신한 부하들을 죽이고 세조에게 엿을 먹인 후 느닷없이 세조 잘 먹고 잘 살아라 하고 부르짖은 후 만주로 뛰쳐나와 부하들을 이끌고 대금국의 황제를 자칭하며 일본 먹고 [[명나라|명]] 먹고 [[중동]] 싹 쓸어버린 뒤 [[유럽]]까지 먹는다.(...) 이원호의 소설답게 고증은 먹는 거고 당연히(?) [[베드신]]만 주구장창 나온다. 각국의 공주, 왕비(!) 하나하나 침대 밑에(...) 무릎꿇리는 절륜한 테크닉의 표현은 참으로 훌륭하다. [[양판소|양산형]] 대역 괴작 중 하나이다. == 같이보기 == * [[이징옥]] * [[계유정난]] * [[단종복위운동]] * [[사육신]] * [[피끝마을]] * ~~[[후금]]~~ == 둘러보기 == ||<-5><:> '''[[이징옥의 난|{{{#ffd400 대금의 역대 황제}}}]]''' || ||<:> 건국 || {{{+1 ←}}} ||<:> '''초대 [[이징옥]]''' || {{{+1 →}}} ||<:> 멸망 || [각주][include(틀:문서 가져옴, title=이징옥, version=200)] [[분류:조선(15세기)]][[분류:조선의 내란]][[분류:15세기 사건 사고]][[분류:실패한 쿠데타 및 반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