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류:고려의 인물]][[분류:조선의 왕족]][[분류:조선의 왕자군]][[분류:전주 이씨 완풍대군파]][[분류:1354년 출생]][[분류:1417년 사망]][[분류:금야군 출신 인물]][[분류:조선 정사공신(태조)]][[분류:조선 좌명공신]] [include(틀:종묘 배향공신)] || '''{{{#F0AD73 이천우 관련 틀}}}''' || || {{{#!folding [ 펼치기 · 접기 ] ---- [include(틀:조선 정사공신(태조))] ---- [include(틀:종묘 배향공신)] ---- [include(틀:조선 좌명공신)] ---- }}} || ---- [[파일:external/e23d059a3d3c1f4e3e19beca42caf098df28d17f2bea311a3434e17707767fbd.jpg]] 李天祐 1354년 ~ 1417년 [목차] == 개요 == [[여말선초|고려 말 조선 초]]의 문신. [[이자춘]]의 손자이며 태조 이성계의 백형 [[이원계]]의 차남이다. [[태조(조선)|태조 이성계]]의 조카이다. 본관은 [[전주 이씨]]. [[계모]]인 남평 문씨는 [[목화]]로 잘 알려진 [[문익점]]의 딸이다. 즉 이천우는 문익점의 의붓외손자인 셈이다. [[민제]]의 사위이기도 하는데, 즉 [[태종(조선)|태종 이방원]]의 사촌형이면서 동서지간이다. 다만 조선왕조 실록과 선원속보[* 완풍군파속보 기준]에는 이천우의 두 번째 부인 황보씨에 대한 기록이 있으나 누구의 딸인지는 기록이 없고, 여흥 민씨 세보에는 민제의 딸이 3명(조박의 처, [[원경왕후]], 노한의 처)으로만 기록되어 있어 자세한 내용을 알 수 없다. == [[조사의의 난]] == 1402년 [[조사의의 난]] 당시 박순ㆍ송류 등과 함께 선발대로 나갔으나 초기에 강력한 [[조사의]]에게 패배했다. 이천우가 초반에 보낸 기병 백여 명은 조사의에게 잡혔으며, 다음날 전투에서 포위당했다가 아들을 포함한 10여 명의 기병과 겨우 탈출하였다.[[http://sillok.history.go.kr/id/kca_10211019_003|참고1]][[http://sillok.history.go.kr/id/kca_10211020_002|참고2]] == 대중매체 == [[인지도]]가 높은 인물은 아니라서 그런지 [[여말선초]]를 배경으로 한 [[드라마]]에서 비중이 있게 나온건 <[[용의 눈물]]> 뿐이고 <[[육룡이 나르샤]]>에서는 [[카메오]] 수준으로 출연하는 정도.[* <용의 눈물>은 159부작의 장편 [[대하사극]]이고 <육룡이 나르샤>는 50부작이다. 그만큼 뒤로 갈수록 [[사극]] 제작 여건이 안 좋아졌음을 알 수 있는 대목. 무엇보다 <육룡이 나르샤>는 실존과 가상, 역할들이 겹친 인물들이 나오는 경우가 많아서 이천우의 경우는 드러낸 경우가 없다고 볼 수 있다.] * 1996년 [[KBS]] 드라마 <[[용의 눈물]]>에서는 배우 김옥만[* 2000년 [[KBS]] 드라마 <[[태조 왕건]]>에서는 [[충주시|충주]] 지역의 장군이던 금식 역, 2001년 [[SBS]] 드라마 <[[여인천하]]>에서는 [[류순정]] 역.]이 연기했다. [[이방원(용의 눈물)|이방원]]의 사촌이라는 사실은 [[사병]] 혁파에 저항하다 귀양가기 전까지는 크게 언급되지 않는다.[* 22회에서 이방원이 [[박포]]를 통해 이천우를 소개받는 장면이 있는데 전후 맥락으로 보아 아무래도 처음에는 사촌간이라는 사실을 제작진 측에서 몰랐던 듯 하다.] [[상왕]]으로 물러난 [[이성계(용의 눈물)|이성계]]가 궁 밖으로 나가려 하자 금위장 신분이라 말리다 따귀를 얻어맞는 수난을 겪기도 한다.[* 사적으로는 아무래도 조카인데 조카가 자신의 자식을 지지하여 또다른 자식을 죽였으니 원망스러울만도 하다.] 이방원의 다른 [[공신]]들 중 [[조영무(용의 눈물)|조영무]]와 친밀하여 자주 붙어다니는 것으로 그려지는데 나름 공신임에도 이방원이 충분히 대접해주지 않는다고 느끼지만 [[2차 왕자의 난]] 당시 조영무와 [[콤비]]를 이루어 활약했다.[* 다만, 이방원에 대한 충성심은 조영무보다 밑인지라 전투 도중 [[회안대군|이방간]]의 군사에게 수적으로 크게 밀리자 "차라리 항복하자"고 제안하기도 했다. 물론 단순한 충성심 차이만이 아니라 이성계의 아들들과 사촌 형제라는 점도 작용했겠지만 말이다.] 이후 사병 혁파 시점에 이방원에게 반항하다 귀양 직전 불려온 술자리에서 귀양 간다는 말을 듣고는 험악한 인상을 마구 구기며 "이것이 어찌 사람이 할 수 있는 짓거리오이까", "저하께서는 인면수심이시옵니다!", "토끼 사냥이 끝나면 개를 삶아 먹는다더니... 우리 신세가 참으로 처량하구나"라고 울부짖는다. 이방원 본인도 이 말에 대해서는 딱히 변명하지 않고 하고 싶은 말을 계속하게 했으며 이후 공신들을 모두 귀양보내고 인면수심이라는 말을 곱씹으며 가슴 아파했다. 이후 귀양지에서 조온과 [[장기(보드 게임)|장기]]를 두며 세월을 보내다[* [[조온]]이 "곧 자신들을 죽이지 않겠느냐"며 불안해하는 것과는 달리 "죽이든 살리든 어차피 사병을 뺏긴 이상 죽은거나 다름없다"며 자포자기한 모습을 보인다.] 복직 소식을 받은 후에는 자신들의 사병을 빼앗아 위험 요소를 제거하고 자신들은 귀양보냈다 적당한 시점에 불러들여 감복케 하는 이방원의 [[정치]]력에 놀라며 "참으로 대단하신 분"이라며 경외심을 보인다. 조영무와 마찬가지로 [[조사의의 난]] 진압에 참여[* 다만, [[조사의(용의 눈물)|조사의]]로부터 "[[삼국지]]로 비유해서 [[장비]]라고 하면 딱 좋을 자"라는 평을 듣고 그 후 대패한다.]한 것을 마지막으로 정국이 안정화되면서 장수가 아닌 조정 대신 중 1명으로 꾸준히 [[얼굴]]을 내비친다. 정많고 소탈한 조영무와 달리 [[왕족]]으로서 태종의 [[왕권]] 강화 [[정책]]을 철저히 지지하며 민씨 4형제 [[숙청]]에 목소리를 높였고 세자인 [[양녕대군]]을 보필해 [[명나라]]에 사행을 다녀오기도 한다.[* 양녕대군이 명나라에 사신으로 갈 때에 이천우가 수행하는데 이 때 태종이 "완산군 이천우 백부께서 함께 가실 것"이라고 직접 말한다.] [[민무휼]], 민무회 형제를 처벌할 것을 주장하는 것을 끝으로 퇴장하는데 웬만한 인물들은 모두 졸기를 띄워 주는 와중에 언급도 되지 않고 사라진다.[* [[역사]]적으로는 민씨 형제 중 막내인 민무휼과 민무회가 사사되고 난 이듬해에 졸했는데 졸기가 없는게 이천우 하나는 아니나 비중을 생각하면 아쉬운 일.] * 2015년 [[SBS]] 드라마 <[[육룡이 나르샤]]>에서는 등장하기는 했으나 비중은 매우 낮다. [[1차 왕자의 난|무인정사]] 즈음에 등장했는데 사실 드라마 특성상 굳이 등장하지 않아도 상관없는 배역이 [[이름]]까지 달고 등장한건 당시 [[흑화]]하고 있던 [[정도전(용비어천가 시리즈)|정도전]]에게 불만을 품고 있던 종친 세력의 대표격 인물이라서인 듯하다. *2021년 [[태종 이방원(드라마)|태종 이방원]]에 등장하며, [[조사의의 난]]에서 태종의 명에 의해 출정했으나 패배한다. 태조는 태종이 이천우를 선봉으로 보낸 것이 자신의 조카라는 점을 이용해 자신을 머뭇거리게 하기 위함이라 말하면서, 성정이 급한 녀석이니 유인 후 매복하면 패할 것이라고 하였는데 실제 그렇게 되었다. 그것 때문에 승리를 축하는 자리에서 이방원에게 벌하여 달라고 빌지만 이방원은 승패는 병가지상사라면서 넘어간다. [각주][include(틀:표절, version=1~74, source=한국민족문화대백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