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clude(틀:이탈리아의 대외관계)] [include(틀:교황청의 대외관계)] || [[파일:이탈리아 국기.svg|width=100%]] || [[파일:바티칸 국기.svg|width=70%]] || || [[이탈리아|{{{#ffffff '''이탈리아'''}}}]] || [[바티칸|{{{#000000 '''교황청'''}}}]] || [목차] [clearfix] == 개요 == 이 문서는 [[이탈리아 공화국]]과 [[바티칸 시국]]의 관계를 서술해놓은 문서다. [[이탈리아]]와 [[바티칸]]은 서로 공생관계이다. 전임 교황들인 [[요한 바오로 2세]]와 [[베네딕토 16세]] 선종 때도 [[이탈리아]]에서 모든 경기나 유희거리 등을 중단하고 추모와 애도 분위기로 바뀌었을 정도로 두 나라는 공생 관계를 가지고 있는 편이었다. == 역사적 관계 == === 고대 === [[이탈리아 반도]]를 [[본토]]로 삼은 [[로마 제국]]의 [[기독교]] 박해로 인해 초대 [[교황]] [[베드로]][* [[정교회]], [[오리엔트 정교회]] 등 다른 주교제 [[교회]]들도 베드로가 초대 [[로마 교황]]이라고 인정하고 있다. [[개신교]] 등 주교제를 인정하지 않는 종파에서 이를 부정하고 있다.]를 비롯한 수많은 [[기독교인]]들이 [[순교]]했기에, [[이탈리아]]의 세속 권력과 [[교황청]]의 관계는 매우 험악했다. 그러나 [[313년]]에 [[로마 황제]] [[콘스탄티누스 1세]]가 [[밀라노 칙령]]을 통해 기독교를 공인하면서 로마 제국과 교황청의 관계는 크게 개선되었고, 교황은 기독교 세계의 [[주교]] 서열 1위[* 다만 [[콘스탄티노폴리스 총대주교|콘스탄티노폴리스]], [[알렉산드리아 총대주교|알렉산드리아]], [[안티오키아 총대주교|안티오키아]], [[예루살렘 총대주교|예루살렘]] 등 동방교회의 [[총대주교]]들은 어디까지나 명예상의 서열만 인정할 뿐, [[로마 교황]]이 [[교회]] 전체를 좌지우지할 수 있다는 [[교황수위권]]은 부정했다.] 지위를 로마 제국으로부터 인정받을 수 있었다. 또한 [[380년]]의 [[테살로니카 칙령]]을 통해 기독교는 명실상부한 로마 제국의 [[국교]]가 되었는데, 동서 로마 분열 이후의 [[서로마 제국]]에서는 [[레오 1세(교황)|교황 레오 1세]]가 [[아틸라]]와의 협상을 통해 [[훈족]]으로부터 [[로마]] 시를 구원하기도 했다. === 중세 === [[서로마 제국]]을 [[라벤나 함락|멸망]]시키고 [[이탈리아 반도]]의 지배자가 된 [[오도아케르]]는 [[교황청]]이 [[이단/기독교|이단]]으로 간주하는 [[아리우스파]] 신도였으나, [[동로마 제국]]과의 관계를 고려해서 [[교황]]을 보호했고, 이는 마찬가지로 아리우스파였던 [[동고트 왕국]]에서도 지속되었다. [[6세기]] [[유스티니아누스 1세]] 시대에 [[벨리사리우스]]와 [[나르세스]]가 이끄는 [[동로마군]]이 동고트 왕국을 정벌하고 [[이탈리아 반도]]를 [[서로마 고토 수복 전쟁|수복]]하면서, 교황청은 다시 [[로마 제국]]의 보호를 받게 되었고, [[랑고바르드족]]이 이탈리아 반도 대부분을 휩쓴 이후에도 교황의 도시 [[로마]][[라벤나 총독부|를 보호하는 세력]]은 동로마였기에, 당시 교황들은 선출 이후에 그들의 주군인 [[바실레프스|동로마 황제]]의 승인을 받아야 했다. 그러나 [[751년]]에 [[랑고바르드 왕국]]이 동로마의 이탈리아 통치 거점인 [[라벤나 총독부]]를 함락시키자, 교황청은 더이상 동로마의 보호를 기대하기 어려워졌고, [[프랑크 왕국]]의 [[피핀 3세|피핀]]을 새로운 보호자로 선택하게 되었다. 그리고 피핀은 [[교황령|교황에게 세속의 영지를 기증하여]] [[로마]]를 비롯한 중부 이탈리아 일대를 통치하는 [[군주]]로 만들어줬고, [[800년]]에 피핀의 아들 [[카롤루스]]가 교황에 의해 [[신성 로마 황제|새로운 서로마 제국의 황제]]로 추대되면서, 교황을 보호하는 이탈리아의 세속 권력은 프랑크 왕국이라는 것이 더욱 확고해졌고, [[베르됭 조약|프랑크 왕국의 3분할]] 이후에는 [[중프랑크 왕국]]과 그 뒤를 이은 [[이탈리아 왕국(신성 로마 제국)|중세 이탈리아 왕국]], [[신성 로마 제국]]이 그 역할을 물려받았다. 하지만 점차 교황청은 [[가톨릭 교회]]의 모든 [[성직자]]에 대한 서임권을 독점하는 동시에 세속 권력까지 확보함으로써 세속 군주의 보호를 받는 지위에서 벗어나려 했고, 이는 교황 [[그레고리오 7세]]가 [[신성 로마 황제]] 겸 [[이탈리아 왕국(신성 로마 제국)|이탈리아 국왕]] [[하인리히 4세]]를 무릎 꿇게 만드는 [[카노사의 굴욕]]으로 이어졌다. 이후 하인리히 4세가 그레고리오 7세에게 반격을 가하여 [[폐위]]시킴으로써 다시 황제가 우위를 점하는 듯 했으나, [[십자군 전쟁]]이 시작되자 교황권이 다시 강화되었고, [[보름스 협약]]을 통해 교황이 서임권 투쟁에서 최종 승리를 거둠으로써, 세속 권력에 대한 교황의 우위가 굳어졌다. 그러나 십자군 전쟁이 실패로 끝나면서 교황권이 다시 약화되기 시작했고, [[14세기]]에 [[아비뇽 유수]]와 [[서방 교회 대분열]]을 겪으며 교황은 더이상 세속 권력을 압도하지 못하게 되었다. === 근세 === 서방 교회 대분열이 종식된 이후 교황권은 어느 정도 회복되는 듯 했으나, [[1527년]]에 [[신성 로마 황제]] 겸 [[이탈리아 왕국(신성 로마 제국)|이탈리아 국왕]] [[카를 5세]]가 고용한 [[란츠크네히트|독일 용병]]들이 교황의 도시 [[로마]][[사코 디 로마|를 약탈하고]] 교황 [[클레멘스 7세]]가 [[빤스런|가까스로 목숨만 건져서 도망치는]] 초유의 사태가 터지면서, 교황청은 또다시 세속 권력과의 싸움에서 판정패를 당해야 했다. 또한 [[종교 개혁]]이 절정에 치달은 결과 일어난 [[30년 전쟁]]은 더이상 교황청이 [[유럽]] 대륙의 강국들이 벌이는 [[패권]] 경쟁에 유의미한 역할을 할 수 없는 세력이라는 것을 보여줬고, 교황의 정치적 영향력은 사실상 [[이탈리아]]에 국한되었다. 다만 [[교황령]]은 여전히 이탈리아 중부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나라였기에, 이탈리아의 일개 [[도시국가]]들한테도 무시당할만한 나라는 결코 아니었고, [[합스부르크 제국|오스트리아]], [[스페인 제국|스페인]], [[프랑스 왕국|프랑스]] 등 이탈리아 내에 영지를 보유한 외부 세력도 이탈리아의 정세에 있어서는 교황을 무시하고 일방적으로 결정을 내릴 수 없었다. === 19세기 === [[프랑스 혁명]] 및 [[나폴레옹 전쟁]]으로 인해 [[이탈리아]]에 [[자유주의]]와 [[내셔널리즘]]이 확산되자, 본격적으로 [[이탈리아 통일]]을 추구하는 세력이 등장했는데, 이탈리아 중부 대부분을 차지하고 북부와 남부 세력의 통합을 가록막는 [[교황령]]은 통일운동가들에게 있어서 [[적폐]]나 다름 없었고, 실제로 [[1849년]] [[로마]]에서는 통일운동가들이 일시적으로 [[비오 9세|교황]]을 축출하고 [[로마 공화국(1849년)|로마 공화국]]을 수립하는 사건이 일어나기도 했다. [[1861년]]에 수립된 [[이탈리아 왕국]]은 교황령을 합병함으로써 [[이탈리아 통일|통일]]을 완수하는 것을 목표로 했으나, [[나폴레옹 3세]]가 파병한 [[프랑스군|프랑스 제국군]]이 [[로마]]에 주둔한 상태였기에 당장 실행하지는 못했다. 그러나 [[1870년]] [[보불전쟁]]으로 인해 프랑스 제국군이 로마에서 철수하자 같은 해에 [[이탈리아 왕국군]]이 로마를 점령하여 교황령을 합병함으로써 이탈리아 통일을 완수했고, [[교황]] [[비오 9세]]는 이에 반발하여 이탈리아 국왕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2세]]와 [[이탈리아 총리|총리]] [[카밀로 카보우르]]를 [[파문]]하고[* 다만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2세에 대한 파문은 해당 인물이 사망하기 직전에 취소되었다.], 스스로를 [[바티칸 포로]]라 칭하며 [[사도 궁전]]에서 칩거했다. 또한 [[검은 귀족]]이라 불리는 로마의 전통 [[귀족]]들과 [[가톨릭]] [[성직자]]들은 [[역사적 극우파]]라는 파벌을 형성하여 이탈리아 왕국에 반대하고 교황령의 복원을 추구하는 활동을 지속했기에, 이탈리아 왕국과 교황청의 험악한 관계가 지속되었다. === 20세기 전반 === [[1919년]]에 창당된 [[가톨릭]] [[정당]]인 [[이탈리아 인민당(1919년)|이탈리아 인민당]]은 같은 해에 열린 [[총선]]에서 100석이 넘는 의석을 확보하며 [[이탈리아 하원|이탈리아 왕국 하원]]에 입성했다. 그러나 [[1922년]] [[로마 진군]]이라는 [[쿠데타]]로 집권한 [[국가 파시스트당]]이 이탈리아 [[우파]] 진영의 [[헤게모니]]를 장악하자 인민당의 당세는 위축되었고, [[1926년]]에 다른 [[야당]]들과 함께 강제 해산되었다. 다만 [[파시스트 이탈리아|이탈리아의 파시즘 정권]]을 이끄는 [[베니토 무솔리니]]는 [[교황청]]에게 옛 [[교황령]]의 일부를 돌려주는 조건으로 협상을 진행했고, [[1929년]]에 [[라테라노 조약]]을 체결하면서 결실을 맺었다. 라테라노 조약에 따라 [[이탈리아 왕국]]은 [[교황청]]이 [[바티칸 시국]]을 수립하는 것을 승인하고 [[가톨릭]]을 [[종교 국가|국교]]로 삼았으며, 교황청은 이탈리아 왕국을 승인하며 화답했다. === 20세기 후반 === [[2차 대전]] 이후 [[이탈리아]]에서 [[국민투표]]를 통해 [[이탈리아 왕국|왕정]]이 폐지되고, [[이탈리아 공화국|공화정]]이 수립되는 격변이 일어났으나, [[바티칸]]의 독립을 보장하고 [[가톨릭]]을 이탈리아의 [[종교 국가|국교]]로 하는 조항을 비롯한 [[라테라노 조약]]은 그대로 유지되었다. 또한 가톨릭 [[정당]]인 [[기독교민주당(이탈리아)|기독교민주당]][* [[이탈리아 인민당(1919년)|이탈리아 인민당]]의 후신이다.]이 꾸준히 [[이탈리아 의회]]에서 원내1당을 차지했기에, 바티칸은 간접적으로나마 [[이탈리아/정치|이탈리아 정계]]에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었다. 다만 [[제2차 바티칸 공의회]]를 통해 가톨릭 신자가 반드시 가톨릭 정당에 투표해야 할 의무[* 물론 가톨릭 정당이 있는 나라 한정이었다.]가 없어지면서 바티칸과 [[이탈리아 기민당]]의 연계가 약해졌고, [[1983년]] [[총선]]을 통해 집권한 [[이탈리아 사회당(1892년)|이탈리아 사회당]][* 의석 자체는 기민당, [[이탈리아 공산당|공산당]]에 이은 제3당이었지만, 기민당과 공산당이 둘다 이전에 비해 부진한 상태라서 [[캐스팅보트]]를 쥐고 [[연립정부|연정]] 협상에서 우위에 설 수 있었다.] 출신 [[베티노 크락시]] [[이탈리아 총리|총리]]는 [[1984년]]에 라테라노 조약을 수정함으로써 이탈리아를 [[세속 국가]]로 만들었다. === 21세기 === [[2012년]] [[2월]], 막대한 국가 부채에 허덕이고 있는 [[이탈리아]] 정부가 교황청 소유 부동산 및 교회에 세금을 부과하기로 결정해 논란이 일고 있다. 바티칸을 위시한 [[가톨릭]] 교회가 보유한 부동산은 [[이탈리아]] 전체의 '''20%'''로, [[성당]]은 물론이고 부속 학교(9천 개), 박물관 및 도서관(2300개), 병원(4700개) 같은 공공시설이 모두 포함되고 3분의 1은 [[호텔]], 여행사, 상점 같은 상업용 설비라고 한다. 1929년 라테라노 조약에 따라 [[이탈리아]] 정부는 교황청이 소유한 '종교 기능' 부동산에는 과세하지 않기로 되어 있었지만, 2012년 [[이탈리아]] 부동산세법 개정안에 따라 좀 더 엄격한 과세를 하기로 한 것이다. 교황청은 현재 실제 과세에 따른 세금이 연간 1억 유로(약 1480억 원)로 추정하지만, [[이탈리아]] 세무당국은 '''최대 20억 유로(2조 7639억 원)'''은 될 것이라고 추정하는 모양이다. == 소속감 == [[이탈리아]] 영토에 둘러싸여 있지만, 이곳에 있는 사람들은 바티칸이 이탈리아에 속해 있다는 생각은 하지 않는 모양이고, 바티칸 자체가 국가라는 의식이 매우 강하다. 맞는 말이다. 한 일화로 [[성 베드로 대성당]]에 행사가 있어서 일찍 출입이 통제된 일이 있었는데, 관광왔던 일행의 가이드가 어떻게든 들어가보려고 설득해보다가 결국 포기하고 "흥, 역시 이탈리아는…"이라고 말했더니 통제하던 사람이 '''"[[300(영화)|여긴 이탈리아가 아니라 바티칸이거든?]]"'''이라 맞받아쳤다고 한다. 당연하지만 바티칸에서 일하는 사람들이 모두 [[성직자]]나 [[수도자]]인 것은 아니다. 단순 [[평신도]]인 사람들도 많이 있으며, 바티칸 국적자 외에도 이탈리아 국적을 가지고 일하는 사람들 또한 많다. 사실 [[이탈리아인]]들도 바티칸에서 근무하는 것을 천국으로 여긴다. 통상적인 이탈리아 월급쟁이는 자기 소득의 40%가량을 세금으로 뜯기게 된다고 한다. 그런데 이탈리아 정부 입장에서 바티칸은 외국이므로, 이탈리아 국민으로서 바티칸에 취직한다면 이 사람은 그날부로 "돈 벌러 '''외국 나간''' 해외파견 노동자" 신분이 되어 이탈리아 공화국에 내야 할 세금 액수가 팍 줄어든다. 즉 바티칸 취업자는 다른 이탈리아인들은 못 누리는 사실상의 비과세 혜택을 받고 사는 것이다. 거기다 종신직(!!)이라 일단 한 번 고용되면 정말 중대한 사고를 치지 않는 이상 [[철밥통|절대 잘리지 않는다.]] 덕분에 바티칸의 관광객용 구내식당의 음식맛은 정말 심하게 맛이 없다. 따라서 바티칸 투어를 할 경우 웬만하면 미리 음식을 싸가도록 하자. 잘못하면 비싼 가격에 맛없는 음식으로 때울 수 있다. == 대사관 == 주 교황청 이탈리아 대사관은 [[로마]]에 있다. 즉 타국 주재 자국 대사관을 자국에 두는 것이다. 바티칸과 수교를 맺은 다른 나라도 이탈리아 영토에 대사관을 두고 있는데, 그 이유는 바티칸의 면적이 너무 좁아서 대사관을 수용할 공간이 없기 때문이다. == 관련 문서 == * [[이탈리아/외교]] * [[바티칸/외교]] * [[대국관계일람/유럽 국가/남유럽 국가]] * [[이탈리아 통일]] * [[바티칸 포로]] * [[검은 귀족]] * [[라테라노 조약]] [각주] [include(틀:문서 가져옴, title=바티칸, version=926, paragraph=10.5)] [[분류:이탈리아-바티칸 관계]][[분류:나무위키 외교 프로젝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