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clude(틀:다른 뜻1, other1=블락비 멤버, rd1=태일(블락비))] ||
'''이태일 관련 틀''' || || {{{#!folding [ 펼치기 · 접기 ] ---- [include(틀:삼성 라이온즈 1차 지명선수)] ---- ||
'''이태일의 역대 등번호''' || || {{{#!folding [ 펼치기 · 접기 ] ---- ||<-5>
'''{{{#fff [[삼성 라이온즈|{{{#ffffff 삼성 라이온즈}}}]] 등번호 12번}}}''' || || [[강만식]][br](1989) || {{{+1 →}}} || '''{{{#0047ab 이태일[br](1990~1997)}}}''' || {{{+1 →}}} || [[김영진(야구)|김영진]][br](1998~2001.4.27.) || }}} || }}} || ||<-2>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external/3.bp.blogspot.com/이태일.jpg|width=100%]]}}} || ||<-2> '''{{{+2 이태일}}}[br]李太逸''' || ||<|2> '''출생''' ||[[1967년]] [[4월 9일]] ([age(1967-04-09)]세) || ||[[경상북도]] [[경주시]] || || '''국적''' ||[include(틀:국기, 국명=대한민국)] || || '''학력''' ||[[경주고등학교 야구부|경주고]] - [[영남대학교 야구부|영남대]] || || '''포지션''' ||[[투수]] || || '''투타''' ||[[우투우타]] || || '''프로입단''' ||[[한국프로야구/1990년/신인드래프트#s-2|1990년 1차 지명]] ([[삼성 라이온즈|삼성]]) || || '''소속팀''' ||'''[[삼성 라이온즈]] (1990~1997)''' || [목차] [clearfix] == 개요 == [[삼성 라이온즈]]에서 활약했던 언더핸드 투수. 동글동글한 안경이 인상적이었다. [[양일환]] - [[진동한]] - [[김성길]] - '''이태일''' - [[박충식]] - [[김현욱(야구)|김현욱]] - [[권오준]] - [[심창민]] - [[우규민]] 등으로 이어지는 삼성의 잠수함 투수 계보를 잇는 선수 중 하나. 하지만 병마로 인해 전성기가 짧았던 '''비운의 투수'''. == 선수 경력 == === 아마추어 시절 === [[경주고등학교 야구부|경주고]] 시절에는 팀 전력이 떨어졌고 이태일도 그저그런 무명선수였다. [[영남대학교 야구부|영남대]]에 진학했지만 여전히 주목받지 못한데다 아버지의 병으로 집안 형편마저 어려워지며 이리저리 방황하며 야구를 포기하려고 했었다. 그러다 이태일이 영남대 2학년 때 [[성낙수]] 코치가 새로 부임하게 되었는데, 이태일의 가능성을 발견한 [[성낙수]]는 이태일에게 자신감을 불어넣어주며 그를 집중 조련했다. 게다가 단순히 코치로서 기술만 전수하는 게 아니라 집안 형편이 어려운 이태일에게 이따금씩 용돈도 쥐어주기도 하는 등, 당시 이태일의 선배들은 [[성낙수]]에게 너무 이태일만 편애한다고 불만을 토로했을 정도로 성낙수는 이태일을 아꼈다고 한다.[* 이후 이태일도 프로 선수가 된 후 [[성낙수]]를 자신의 평생 스승이자 친형과 같은 존재라고 말했다.] 또한 [[성낙수]]는 평소 친분이 있던 [[장명부]]를 인스트럭터로 초빙해, 이태일의 지도를 맡겼다. 이태일은 [[장명부]]에게서 수싸움이나 볼배합 등을 배워 더욱 성장했다. [[성낙수]]와 [[장명부]]의 지도로 이태일은 대학 4학년인 1989년, 당시 대학 선수 중 최다승인 9승을 올리고 평균자책 2.66을 기록했다. 비록 당시 영남대 전력이 약해 대회 우승은 못했지만, 대륙간컵 국가대표팀으로 발탁되었다. === [[삼성 라이온즈]] === 1990년 [[삼성 라이온즈]]의 1차 지명을 받아 계약금 3,500만원을 받고 삼성에 입단했다. 당시 신인선수 중 [[박동희(야구선수)|박동희]], [[김동수(야구)|김동수]], [[김경기]] 다음으로 거액이었다. 삼성에선 이태일에 대한 기대가 컸다. 1989년 [[선수협]] 파동 후 에이스 [[김시진]]을 롯데로 트레이드하고, 대신 데려온 [[최동원]]을 겨우 설득해 삼성 유니폼을 입히긴 했지만 그는 예전의 최동원이 아니었고, [[권영호(야구선수)|권영호]]도 1989 시즌을 끝으로 은퇴해, 이제 2년차가 되는 [[류명선]] 외에는 이렇다 할 투수가 없었기 때문. [[김성길]]과 [[김상엽]]도 있었지만, 김성길은 나이가 꽤 있었고 김상엽은 겨우 2년차 신인에 1989년 성적도 그저 그랬다.[* 결과적으로는 김상엽도 1990 시즌에 10승이 넘는 기록을 세우며 일약 삼성의 에이스 중 한명으로 떠올랐다.] 그러나 이태일은 1990 시즌 초반에 5경기 동안 3패만 기록하고 2군으로 강등되었다. 속구와 슬라이더 투 피치에만 의존한데다, 구속을 올리려고 무리한 투구 폼을 구사하다 늑골까지 다쳤기 때문. 이태일도 삼성 투수진에 활력소가 되지 못하나 했지만, 2군에서 [[권영호(야구선수)|권영호]] 코치와 마티 코치에게서 싱커를 배우며[* 이전 문서에는, 2000년도 이전 사이드암 및 언더핸드 투수들은 싱커를 기본적으로 구사하지 않았다고 되어 있는데, 이는 잘못된 정보이다. 80-90년대의 사이드암 및 언더핸드 투수들의 기본 구질은 오른손 타자를 기준으로 했을 때 몸쪽 싱커와 바깥쪽으로 흐르는 변화구였고, 이를 잘 구사하는 능력이 그 투수 실력의 '바로미터'였다. 오히려 2000년대에 들어 사이드암 및 언더핸드 투수가 적어지면서 싱커를 구사하는 투수가 줄어들게 된다. 이러한 현상은, 싱커 자체가 습득하기 어렵기도 하고 부상의 위험이 높은 구질이라서 그런 것도 있다. 2000년대의 대표적 중간계투 요원이었던 [[조웅천]]의 경우, 싱커 구사가 어려워 비슷한 효과를 내는 서클 체인지업을 몸쪽으로 구사하여 좋은 성적을 거둔바 있다.(체인지업이 워낙 좋아 싱커로 오인받았으나, 본인이 체인지업이라고 한 바 있다) 80-90년대에 싱커를 잘 구사한 대표적인 언더핸드 투수는 [[한희민]], [[박충식]]. 한희민은 큰키에서 솟아오르는 직구와 싱커로 이름 높았고, 박충식(사실 팔 높이는 사이드암과 언더핸드의 중간 정도)은 그 당시 언더핸드 투수로는 보기드문 140대의 직구와 엄청난 각을 자랑하는 슬라이더 그리고 오른손 타자의 몸쪽을 파고드는 싱커로 좋은 성적을 거두었다. 통산 성적에서 언급한 두 명보다 우위인 [[이강철]]은 싱커보다는 커브와 솟아오르는 직구가 주무기 였으며, [[임창용]]은 무지막지한 뱀직구를 가지고 있어 아예 싱커를 던지지 않았다. ] 180도 달라져 1군으로 복귀했다. 7월 13일 롯데를 상대로 프로 첫 승을 거두고, 8월 12일 태평양전까지 8연승을 기록했다. 특히 8월 8일에는 롯데를 상대로 '''[[노히트 노런]]을 기록'''했다. 9이닝 4탈삼진 3사사구 투구수는 116구였다. '''프로 통산 6번째이자, 역대 신인 중 최초였으며, 삼성 선수로서는 최초의 [[노히트 노런]]'''이었다. 이후 삼성의 노히트 노런은 무려 29년이나 지나서야 [[덱 맥과이어]]가 두 번째로 기록하게 된다. [[파일:attachment/leetae11993.jpg]] [[노히트 노런]]을 달성하고 나서. 시즌 최종 성적은 13승 6패 [[평균자책점]] 3.50. 노히트노런을 기록한 것이나 8연승 기록에 시즌 성적까지 좋아 삼성 최초의 신인왕 수상을 노릴만한 성적이었으나, 신인임에도 주전 포수를 맡으며 팀의 정규시즌 1위에 기여한 [[LG 트윈스|LG]]의 [[김동수(야구)|김동수]]가 신인왕을 수상했다. 비록 신인왕 수상에는 실패했지만 1991년 10승, 1992년 13승을 올리며 당당하게 삼성 투수진의 한 자리를 확고히 해갔다. ==== 좌절과 복귀 ==== 그러나 1993년, 1994년 두 시즌 연속 10승에는 실패했다. 구위가 노출된 것도 있었지만 무엇보다 큰 이유는 '''혈전증'''[* 혈액의 일부가 혈관 속에서 응고되는 데다 무리할 경우 심장에 이상이 올 수도 있는, 치명적인 병이다.] 때문. 결국 1994년 9월 7일 태평양 전을 끝으로 1군에서 모습을 감췄다. 사실 이러한 부진은 [[김성근]] 감독이 김성길과 더불어 이태일을 선발 불펜 안가리며 미친듯이 굴린 것도 있으며 특히 이태일은 혈전증 때문에 관리가 필요한 상황이었음에도 별다른 조치를 취하지 않았기 때문.[* 이걸 김성근 감독 만의 잘못으로 보기 어려운게 당시 야구계에서는 "정신력"을 강조하는 것이 당연하게 여기는 시기였고 다른 구단들에도 좀 잘한다 싶으면 굴렸다. 이러한 폐해는 2000년대 들어서야 사라지기 시작했다.] 혈전증이라는 병마와 싸우며 1995 시즌을 통째로 재활로 보냈다. 삼성에서는 이태일이 선수 생활을 이어가기 어렵다고 판단해 방출시키려 했으나, 이태일은 연봉 25% 삭감을 감수하면서 삼성에 남아 선수 생활을 이어갔다. 그리고 1996년 4월 16일 홈 개막전에서 선발로 등판했다. 7이닝 3실점으로 퀄리티 스타트 플러스를 기록, 비록 패전투수가 되었지만 무려 1년 7개월만에 등판에서 기록한 성적이라 그의 복귀에는 청신호였다. 이후 현대전에서도 선발로 나서 6⅓이닝 동안 2실점을 하며 [[퀄리티 스타트]], 또 패전투수가 되고 말았지만 병을 앓았다는 기색이 없는 듯 점점 과거의 모습을 되찾아가고 있었다. 그리고 5월 5일 쌍방울과 더블헤더 2차전 때 구원투수로 등판해 마침내 승리투수가 되었다. 무려 1년 9개월만의 승리. 그 다음 등판이었던 한화전에서는 선발승을 거뒀다. === 은퇴 === 1996 시즌이 끝나고 혈전증은 끝내 이태일의 발목을 잡고 말았다. 체력이 급격히 떨어지며 예전의 구위를 회복하기 어렵게 되었고, 전지훈련지에서 재활을 하다 장딴지 부상을 얻으며 귀국하고 말았다. 그러다 혈전증 증세가 더 악화되자 1997년 6월, 결국 은퇴를 선언하며 마운드를 떠났다. 현재는 개인사업을 하며 사회인 야구팀(경산히어로즈, 태풍팀) 감독을 맡았으나 지금은 그만두셨다 한다. == 기타 == * 나이가 어린 야구팬들은 어째 [[신태일(디지몬 시리즈)|이쪽]]이랑 연관지어서 부르는 듯 하다(…). 아무래도 야구게임으로만 이름을 접해봐서인 듯. 그래서인지 [[프로야구 매니저]]나 [[마구마구]] 덱리뷰글에 이태일이 등장하면 "[[아구몬|태일아~]]" 드립을 치는 사람들이 꽤 많다(…). * 아들 이승엽[* 국민타자 이승엽과 동명이인이다.]은 [[2021년]] 현재 경일대학교 야구부 2학년이다. 포지션은 투수로 체격 조건은 우수하지만 프로 지명까지는 쉽지 않다는 것이 대체적인 평가. 결국 지명받지 못했고 [[2020년]]에 새로 야구부를 창단한 [[경일대학교]]로 진학했다. * [[NC 다이노스]] 사장을 지낸 언론계 출신 야구인 이태일과는 동명이인이다. * 양준혁의 영남대 2년 선배이다 == 연도별 성적 == * '''진한 표시'''는 리그 5위 내 기록. ||<-16> {{{#ffffff 역대기록}}} || || {{{#ffffff 연도}}} || {{{#ffffff 소속팀}}} || {{{#ffffff 경기수}}} || {{{#ffffff 이닝}}} || {{{#ffffff 승}}} || {{{#ffffff 패}}} || {{{#ffffff 세}}} || {{{#ffffff 승률}}} || {{{#ffffff ERA}}} || {{{#ffffff 피안타}}} || {{{#ffffff 피홈런}}} || {{{#ffffff 4사구}}} || {{{#ffffff 탈삼진}}} || {{{#ffffff 실점}}} || {{{#ffffff 자책점}}} || {{{#ffffff WHIP}}} || || 1990 ||<|7> [[삼성 라이온즈|삼성]] || 22 || 113 || '''13'''[br](5위) || 6 || 0 || '''0.684'''[br](공동 4위) || 3.50 || 95 || 4 || 43 || 45 || 48 || 44 || 1.15 || || 1991 || 31 || 126 || 10 || 10 || 3 || 0.500 || 4.64 || 137 || 18 || 31 || 31 || 68 || 65 || 1.31 || || 1992 || 27 || 154 || 13 || 7 || 1 || 0.650 || '''2.86'''[br](4위) || 140 || 7 || 47 || 52 || 60 || 49 || 1.19 || || 1993 || 16 || 70⅓ || 4 || 3 || 0 || 0.571 || 3.97 || 68 || 4 || 35 || 25 || 32 || 31 || 1.37 || || 1994 || 21 || 128 || 6 || 10 || 0 || 0.375 ||3.38 || 120 || 6 || 42 || 60 || 56 || 48 || 1.22 || || 1995 ||<-14> 1군 기록 없음 || || 1996 || 12 || 45⅔ || 2 || 3 || 0 || 0.400 || 6.50 || 62 || 8 || 22 || 17 || 34 || 33 || 1.69 || ||<-2> '''[[KBO 리그|KBO]] 통산'''[br](7시즌) || 129 || 637 || 48 || 39 || 4 || 0.552 || 3.81 || 622 || 47 || 220 || 230 || 298 || 270 || 1.27 || == 관련 문서 == * [[야구 관련 인물(KBO)]] * [[삼성 라이온즈/선수단]] [각주] [[분류:대한민국의 야구 선수]][[분류:경주시 출신 인물]][[분류:1967년 출생]][[분류:1990년 데뷔]][[분류:1997년 은퇴]][[분류:우완 투수]][[분류:우투우타]][[분류:경주고등학교 출신]][[분류:영남대학교 출신]][[분류:원클럽맨]][[분류:KBO 리그의 노히트 노런 달성자]][[분류:삼성 라이온즈/은퇴, 이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