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류:1894년 출생]][[분류:1955년 사망]][[분류:몰년 미상]][[분류:일제강점기의 인물]][[분류:대한민국의 운전수]] ||||
'''{{{+1 이판능[br]李判能}}}''' || |||| {{{#!wiki style="margin: -0px -5px" [[파일:attachment/panung.jpg|width=100%]]}}} || |||| 당시 신문에 실렸던 기사. || || '''출생''' ||[[1894년]] ?월 ?일|| || '''사망''' ||[[1955년]] ?월 ?일 (향년 61세)|| || '''직업''' ||[[전동차]] 차장|| || '''배우자''' ||성명 미상|| || '''자녀''' ||성명 미상|| || '''범죄유형''' ||[[대량살인]] 및 [[칼부림]], [[테러]]|| || '''형량''' ||징역 7년 6개월|| || '''총 피해자 수''' ||'''17명''' || [목차] [clearfix] == 개요 == [[일제강점기]] [[일본]]에서 [[일본인]] 대다수와 조선인 소수를 [[대량살인]]한 [[살인]]범. [[우범곤]]과 유사한 케이스의 대량 학살범이다. [[이판능 대량살인 사건]]의 피의자다. == 생애 == 이판능은 직장에서 온순하다는 평이 있었고 결혼도 해서 자녀를 두었으며[[https://www.sisain.co.kr/news/articleView.html?idxno=44657|#]] [[일본]]으로 건너가서 하숙하며 [[전동차]] 차장으로 근근히 먹고 살던 하층 노동자였다. 1921년 6월 2일 당시로서는 고가품이었던 [[수건]] 3장을 집에서 도둑맞고 파출소에 가서 신고했으나 무시당하자 분노가 쌓였고 집에 돌아왔는데 [[일본인]]인 하숙집 여주인과도 그 문제로 다투다 여주인의 [[남편]]에게 얻어맞자 분노가 폭발했다. 그 길로 [[부엌칼]]을 휘둘러 주인집 가족을 죽이고 길거리로 뛰쳐나와 닥치는 대로 사람을 찔러 17명을 살해하였다. 희생자 중에는 일본인뿐만 아니라 조선인도 끼어 있었다. 1심에서는 무기징역을 선고받았고 2심에서는 징역 7년 6개월로 감형받았다. 감형받은 이유는 정신질환 때문인데 사건을 맡은 변호사가 당시 일본에서는 최초로 정신병을 감형 사유로 내세웠다고 한다. [[1955년]]에 사망했다는 기록이 있었다. == 사건 == [include(틀:상세 내용, 문서명=이판능 대량살인 사건)] [각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