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류:한국의 독립운동가]][[분류:건국훈장 독립장]][[분류:건국훈장 애족장]][[분류:동명이인]][[분류:부여군 출신 인물]][[분류:경주시 출신 인물]][[분류:여주 이씨]][[분류:1870년 출생]][[분류:1907년 사망]][[분류:1935년 사망]][[분류:국립대전현충원 안장자]] [목차] == 부여군 출신 독립운동가, 李漢龜 == ||<-2> {{{#!wiki style="margin: -5px -10px; padding: 5px 10px; background-image: linear-gradient(115deg, #cd313a 50%, #0047a0 50%)" '''[[독립유공자|{{{#ffffff 대한민국의 독립유공자}}}]]'''[br] {{{#ffffff '''{{{+1 이한구}}}'''[br]'''李漢龜[* 李漢'''{{{+1 九}}}'''라고 표기한 문헌도 있다.]'''}}}}}} || ||<|2> '''출생''' ||[[1870년]] [[10월 10일]] || ||[[충청도]] [[부여군|임천군]] 서변면 발산리[br](현 [[충청남도]] [[부여군]] [[임천면]] 발산리) || ||<|2> '''사망''' ||[[1935년]] [[5월 14일]] (향년 64세) || ||[[충청남도]] [[부여군]] || || '''묘소'''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2묘역-273호 || || '''상훈''' ||건국훈장 애족장 || [clearfix] 이한구(李漢龜)는 1870년 10월 10일 충청도 임천군 서변면 발산리(현 충청남도 부여군 임천면 발산리)에서 태어났다. 그는 1906년 5월 17일 민종식의 [[홍성군|홍주군]] 의병진에 가담하여 선봉장 박영두(朴永斗)와 함께 유격장에 임명되었다. 소모장 [[http://e-gonghun.mpva.go.kr/user/ContribuReportDetail.do?goTocode=20001&mngNo=5234|이사성]](李思聖)과 같이 [[부여군|임천군]]·[[서천군|한산군]] 등지에서 의병을 모집하고자 임천군에 도착하였다가 체포되었다. 그해 11월 23일 [[평리원]]에서 소위 내란 혐의로 유배형 10년형을 [[http://theme.archives.go.kr/next/indy/viewIndyDetail.do?archiveId=0001352016&evntId=0034970324&evntdowngbn=Y&indpnId=0000002788&actionType=det&flag=1&search_region=|선고받고]] 유배되었다. 이후 출옥하였으나 옥고의 여독으로 1935년 5월 14일 충청남도 부여군에서 별세하였다. 1986년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대통령표창이 추서되었으며,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되었다. 그의 유해는 1994년 10월 21일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2묘역에 이장되었다. == 경주시 출신 독립운동가, 李韓久 == ||<-2> {{{#!wiki style="margin: -5px -10px; padding: 5px 10px; background-image: linear-gradient(115deg, #cd313a 50%, #0047a0 50%)" '''[[독립유공자|{{{#ffffff 대한민국의 독립유공자}}}]]'''[br] {{{#ffffff '''{{{+1 이한구}}}'''[br]'''李韓久'''}}}}}} || || '''초명''' ||이경구(李暻久) || || '''자''' ||한유(漢有, 韓有) 또는 경일(景日) || || '''호''' ||지포(芝圃) 또는 신성재(新省齋) || || '''본관''' ||[[여주 이씨]][* 여강경주파(驪江慶州派)-무첨당파(無忝堂派) 23세 '''◯구(久)''' 秉(병)◯ ◯燁(엽) ◯榮(영) 時(시)◯ 항렬.] || ||<|2> '''출생''' ||[[1870년]] [[9월 16일]] || ||[[경상도]] [[경주시|경주부]] [[안강읍|안강현]] 양좌동[br](현 [[경상북도]] [[경주시]] [[강동면(경주)|강동면]] 양동리 [[양동마을]])[* 인근의 안계리·다산리와 함께 [[여주 이씨]] 집성촌이다.] || ||<|2> '''사망''' ||[[1907년]] [[9월 11일]][* 여주(여강)이씨족보 권1 663쪽에는 9월 1일에 별세한 것으로 등재되어 있다.] (향년 36세)|| ||[[경상북도]] [[청하면(포항)|청하군]] [[죽장면|죽남면]] 입암리[br](현 경상북도 [[포항시]] [[북구(포항)|북구]] [[죽장면]] 입암리) || || '''묘소''' ||[[경상북도]] [[포항시]] [[북구(포항)|북구]] [[죽장면]] 현내리 || || '''상훈''' ||건국훈장 독립장 || [clearfix] [[독립유공자]] [[이순구#s-3|이순구]]는 그의 남동생이며, 독립유공자 [[이훈구(1869)|이훈구]]는 그의 4촌 형이다.[* 이훈구의 아버지 이능경(李能璟, 1848 ~ 1889. 12. 18)은 본래 이한구의 아버지 이능종의 셋째 형이었지만, 11촌 지간의 족숙(族叔) 이재효(李在斆, 1804 ~ 1835. 9. 26)에 입양되었으므로 족보상으론 이훈구는 이한구에게 14촌 지간의 족형(族兄)이 된다.] 이한구(李韓久)는 1870년 9월 16일 경상도 경주부 안강현 양좌동(현 경상북도 경주시 강동면 양동리 양동마을)에서 [[이언적]]의 11대손인 아버지 이능종(李能種, 1851 ~ 1890. 5. 6)의 2남 1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아버지 이능종에게는 [[창녕 성씨]] 성도영(成道永)의 딸과 [[경주 손씨]](? ~ 1920. 10. 31) 손찬호(孫瓚浩)의 딸 등 두 명의 부인을 두었는데, 이한구가 누구의 소생인지는 알 수 없다.] 이후 경주부 죽장면 지동리(현 [[포항시]] [[북구(포항)|북구]] [[죽장면]] 지동리)으로 이주하였다.[[http://815gb.or.kr/boardview/month_character_view/10|#]] 그는 1905년 11월에 [[을사조약]]이 일제에 의해 강제로 체결되었다는 소식을 듣고서 비분강개하여 의병대장 [[https://e-gonghun.mpva.go.kr/user/ContribuReportDetail.do?goTocode=20001&pageTitle=Report&mngNo=9321|정용기]](鄭鏞基)와 더불어 의병을 일으킬 것을 상의하여 이듬해인 1906년 4월에 [[청하면(포항)|청하군]] 북면 북동대산(北東大山)에서 동생 [[이순구#s-3|이순구]]와 [[https://e-gonghun.mpva.go.kr/user/ContribuReportDetail.do?goTocode=20001&pageTitle=Report&mngNo=3734|정진한]](鄭鎭漢)·[[https://e-gonghun.mpva.go.kr/user/ContribuReportDetail.do?goTocode=20001&pageTitle=Report&mngNo=3308|손영각]](孫永珏) 등과 함께 산남의진(山南義陣)을 결성하고 정용기를 의병대장으로 추대했다. 이후 그는 중군장(中軍將)에 선임되어 이후 모든 일을 계획, 지도했다. 그후 정용기 의병장이 [[흥해읍|흥해군]] [[신광면(포항)|신광면]](현 포항시 북구 신광면) 우각리에서 일본군에 의해 체포되자 자신의 휘하 의병들을 인솔하고 [[청송군]] [[주왕산면|부동면]](현 청송군 [[주왕산면]]) [[주왕산]]으로 들어가 활약했다. 그러던 중 좌영장(左領將) 이경구(李景久)가 흥해군 서부면 약곡(藥谷)[* 現 [[경상북도]] [[포항시]] [[북구(포항)|북구]] [[흥해읍]] 약성리로 추정됨.]에서 일본군과의 접전에서 패전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자, 휘하 의병진을 이끌고 약곡으로 나아가 이경구를 격려하였다. 이어서 그는 청하군을 습격하고자 계획을 세우고 의병진을 인솔하여 청하군 현내면(현 포항시 북구 청하면) 덕성리를 거쳐 진격하던 중 돌연 일본군의 습격을 받았고, 이를 맞아 의병들을 독려하며 격전을 펼쳐 적군 수명을 사살하였다. 그러나 다음날 일본군에 북진(北陣)이 격파당했고, [[신돌석]]이 이를 추격하였으나 다시 패하고 말았다. 이 소식을 듣고 이한구는 의병들에게 정용기는 체포되었고 신돌석은 패전했음을 들어 일본군에 대해 우리 의병이 [[중과부적]]임을 잘 알게 하고 훗일을 도모하자는 기약을 한 뒤 의병진을 해산하였다. 1907년 석방되어 재기를 도모하고 있던 정용기와 더불어 재차 의병을 일으켜 청송군 현북면 신성리(薪城里)[* 現 경상북도 청송군 안덕면 신성리)로 진영을 옮기던 중 밤중에 일본군이 잠입하여 파수병을 사살하고 의병진으로 돌진하니 적들과 맞서 치열하게 전투하여 적군 3명을 사살하였다. 또한 [[영천시|영천군]](현 [[영천시]]) [[자양면]]에서 벌어진 자양(紫陽) 전투에서 일본군 헌병대의 분파소장(分派所長)을 생포하고 일본군 3명을 사살하는 등 전과를 올렸다. 그러나 1907년 9월 11일 [[강원도]]로 북진하던 도중 청하군 [[죽장면|죽남면]] 입암리에서 일본군을 맞아 교전 끝에 정용기·손영각·[[권규섭]] 등과 함께 전사, 순국하였다. 1963년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독립운동 공적을 인정받아 건국훈장 독립장에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