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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iki style="margin: -5px -10px; padding: 5px 10px; background-image: linear-gradient(115deg, #cd313a 50%, #0047a0 50%)" '''[[독립유공자|{{{#FFFFFF 대한민국의 독립유공자}}}]]'''[br]{{{#FFFFFF '''{{{+1 이현섭}}}'''[br]'''李鉉燮'''}}}}}} || || '''초명''' ||이현기(李鉉夔)[* 1885년 증광 생원시 입격 후 [[예조]]에 뜻을 전달하여 임금의 허락을 받았다.[[http://db.itkc.or.kr/inLink?DCI=ITKC_ST_Z0_A22_08A_19A_00080_2003_113_XML|#]]] || || '''자 / 호''' ||서규(瑞圭) / 우헌(愚軒) || || '''본관''' ||[[연안 이씨]][*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tem/E0046506|#]]] || ||<|2> '''출생''' ||[[1844년]]([[헌종(조선)|헌종]] 10) [[10월 26일]] || ||[[경상도]] 군위현 중리면 중구동[br](現 [[대구광역시]] [[군위군]] [[효령면]] 중구리 중리마을)[* [[연안 이씨]] 집성촌이다.] || ||<|2> '''사망''' ||[[1910년]]([[융희]] 4) [[9월 23일]][* 양력 10월 25일.] (향년 65세)|| ||[[경상북도]] [[안동시|안동군]] || || '''묘소'''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3묘역-837호 || || '''상훈''' ||건국훈장 독립장 || [목차] [clearfix] == 개요 == [[대한민국]]의 [[독립유공자]].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받았다. == 생애 == 이현섭은 1844년([[헌종(조선)|헌종]] 10) 경상도 군위현 중리면 중구동(현 대구광역시 군위군 효령면 중구리 중리마을)에서 [[임진왜란]] 때 정읍현감으로 종군하였던 [[https://terms.naver.com/entry.nhn?cid=46622&docId=536140&categoryId=46622|이진]](李軫)의 10대손인 이용연(李龍淵)의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위로 생원시에 입격한 맏형 이현무(李鉉懋)[* 1873년([[고종(조선)|고종]] 10) 식년시 생원시에 3등 24위로 [[http://people.aks.ac.kr/front/dirSer/exm/exmView.aks?exmId=EXM_SA_6JOc_1873_034890|입격했다]].]와 둘째 형 이현복(李鉉馥)이 있었다. 그는 12살 되던 1856년([[철종(조선)|철종]] 7) 5월 아버지를 여의었고, 그해 12월 경상도 [[안동시|안동대도호부]] 풍산현 갈전동(현 경상북도 [[안동시]] [[풍천면]] 갈전리 원당마을)로 이주하였다.[* 이현섭과 그 가족들이 살던 우헌고택은 갈전리 138번지에 있었으나, 2008년 경상북도청이 138-2번지로 이전하기로 계획되는 바람에 2016년 철거되었다.[[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001&oid=022&aid=0002174962|#]]] 1878년([[고종(대한제국)|고종]] 15) 경상도 유생으로서 서원을 복구하여 설립해줄 것을 청하는 연명 상소에 이름을 올렸다.[[http://db.itkc.or.kr/inLink?DCI=ITKC_ST_Z0_A15_01A_25A_00350_2004_071_XM|#]] 1885년(고종 22)에는 증광시 생원시에 3등 62위로 [[http://people.aks.ac.kr/front/dirSer/exm/exmView.aks?exmId=EXM_SA_6JOc_1885_037546|입격하였다]]. 1886년 봄에는 민씨 정권과의 불화로 4년간 [[평안도]] [[철산군|철산도호부]]에 유배되는 형벌을 받았다. 이 당시에는 이현섭 뿐만 아니라, 맏형 이현무와 유기호(柳基鎬)·이만응(李晩鷹)[* 1885년 6월 9일, 경상도 안동대도호부의 유생 김진우(金晉祐)의 상소에 이만응이, [[고종황제|고종]]의 명을 거역할 계책을 제창하고 겸해서 개인적인 감정을 푸는 말을 마구 하였습니다. 여러 [[진성 이씨]] 종친들을 서원 뜰에 많이 모아놓고 그 서자 족속의 항렬이 높은 자 몇 사람을 잡아다가 뜰 아래에 결박하여 꿇어앉히고 장(杖)을 치고 태(笞)를 치며 노예처럼 취급하고는 "서자(庶子) 부류를 허락하지 말라.〔勿許庶類〕"라는 네 글자의 글을 크게 써서 벽에다 붙였다고 고하였다.[[http://sillok.history.go.kr/id/kza_12206009_005|#]]]·이중린(李中麟)·조영기(趙永基)·이수학(李壽學)·이명연(李明淵) 등 많은 영남지방 유림들이 유배를 갔다고 하며, 이들은 1890년(고종 27) 1월 29일에 일제히 풀려난 것으로 보인다.[[http://db.itkc.or.kr/inLink?DCI=ITKC_ST_Z0_A27_01A_29A_01050_2003_137_XML|#]] 1894년(고종 31) [[동학농민운동]] 당시 오토리 게이스케(大鳥圭介)가 일본 군대를 이끌고 궁중에 난입하였으며, 이듬해 1895년에는 [[을미사변]]이 일어나 [[명성황후]]가 시해되자 그는 통분을 참지 못하고 안동부 [[예안군]] 의동면 양평리(현 안동시 [[도산면(안동)|도산면]] 토계리 양평마을)으로 이주하여 그곳에서 은거하였다. 1910년 [[경술국치]]로 일제가 한국을 병탄하여 나라가 망하자 통분을 이기지 못하여 음식을 먹지 못했으며 결국 9월 23일 의관을 갖춘 후 순국하였다. 1962년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유고로 『우헌실기(愚軒實記)』 2권이 전하며, 본래 묘는 지금의 경상북도 안동시 [[풍산읍]] 매곡리 밤실마을에 있었으나 2008년 5월 15일 부인 [[여산 송씨]]·[[인동 장씨]]의 묘와 함께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3묘역 837호에 이장되었다.[[https://terms.naver.com/entry.nhn?cid=51934&docId=2604115&categoryId=54433|#]] [[분류:한국의 독립운동가]][[분류:군위군 출신 인물]][[분류:연안 이씨]][[분류:1844년 출생]][[분류:1910년 사망]][[분류:건국훈장 독립장]][[분류:국립대전현충원 안장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