李昊濟 1950년 4월 사망. [목차] == 개요 == [[일제강점기]]와 [[미군정]] 시기의 사회주의 운동가. == 생애 == [[보성전문학교]](現 [[고려대학교]]) 법과에 입학한 후 학생 운동에 뛰어들면서 사회주의 운동가가 되었다. 보성전문학교 학생회 활동을 하면서 1938년 2월 20일 '보전학생'이란 잡지를 발간하기도 하였다. 미군정 시기 초반인 1945년 12월에 청총이라 불리는 전조선청년단체총동맹 중앙위원장으로 좌익 계열 군소 정당 중 하나를 이끌었다. 이후 좌파 정치 세력이 [[남조선로동당]]으로 정리되는 시점에서 김일성사회주의청년동맹의 전신 중 하나인 남조선민주청년동맹에서 위원장을 맡아 좌익 청년운동의 지도자로 활동했다. 그러다가 좌익 활동이 불법화되는 과정에서 월북하였고, 평안남도 강동군의 강동정치학원 원장이 되었다. 강동정치학원은 유격전 전문가들을 양성하는 기관으로서 [[남조선로동당]]의 군사적 기반이었다. 그 후 제주도에 파견되어 있다가 1948년 4월에 발생한 [[제주 4.3 사건]]에 [[김달삼]]과 함께 참여했다. 제주 4.3 사건 이후 다시 월북하였다가 [[여순사건]] 이후 1949년 6월 조국통일민주주의전선의 명령을 받아 강동정치학원 출신의 유격대원 360여명을 이끌고 태백산맥을 따라 남쪽으로 내려왔다. 이때 여순 반란군을 일부 흡수하여 지리산 지역에서 활동을 벌이고 있던 [[이현상]]의 지리산유격대는 제2병단이 되었고, 이호제는 [[이승엽]]의 지시대로 제1병단 사령관을 맡아 38도선과 가까운 오대산 지구를 담당했다. 이호제의 제1병단은 오대산에 도착한 이후, 이미 입산해 있던 소규모 야산대를 흡수하여 약 4백명 규모의 병단이 되었다. 그 후 오대산과 태백산을 주무대로 유격대를 이끌고 활동했고, 1949년 8월 경주 북쪽 보현산까지 진출했으나 군경합동부대의 토벌로 제1병단은 1949년 12월 경에 거의 궤멸되었다. 한국 전쟁 발발 약 두 달 전인 1950년 4월에 토벌대와 전투 중 전사하였다. 그때 이호제의 시신에서 머리를 잘라낸 사진 기록이 남아 있다. [[분류:한국의 독립운동가]][[분류:고려대학교 출신]][[분류:북한의 인물]][[분류:1950년 사망]][[분류:6.25 전쟁/사망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