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clude(틀:다른 뜻1, other1=KIA 타이거즈의 前 사장, rd1=이화원(기업인))] [include(틀:중국의 세계유산)]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Scenery_of_Longevity_Hill.jpg|width=100%]] ||<-3> '''[[유네스코|{{{#fff 유네스코}}}]] [[세계유산|{{{#fff 세계유산}}}]]''' || ||<-3> [[파일:유네스코 세계유산 로고(흰 배경).svg|width=160]] || ||<|4> 이름 || 한국어 || 베이징의 황실 정원, 이허위안 || || 영어 || Summer Palace, an Imperial Garden in Beijing || || 중국어 || 北京皇家园林-颐和园 || || 프랑스어 || Palais d'Été, Jardin impérial de Beijing || |||| 국가·위치 || [[중국]] [[베이징시]] || ||<-3> [include(틀:지도,장소=颐和园, 너비=100%, 높이=224px)] || |||| 등재유형 || [[세계유산#s-3.1|문화유산]] || |||| 등재연도 || [[1998년]] || |||| 등재기준 || (i)[* 인간의 창의성으로 빚어진 걸작을 대표할 것], (ii)[* 오랜 세월에 걸쳐 또는 세계의 일정 문화권 내에서 건축이나 기술 발전, 기념물 제작, 도시 계획이나 조경 디자인에 있어 인간 가치의 중요한 교환을 반영], (iii)[* 현존하거나 이미 사라진 문화적 전통이나 문명의 독보적 또는 적어도 특출한 증거일 것] || |||| 지정번호 || [[http://whc.unesco.org/en/list/880|880]] || {{{#!wiki style="margin:0px;margin-top:0px;margin-bottom:0px;padding:0px" ||<:>
<#CC0000> [[파일:전국중점문물보호단위_4.png|width=65px]] ||<-2><:><#CC0000> {{{#gold {{{+1 '''전국중점문물보호단위'''}}} [br] 全国重点文物保护单位[br]중화인민공화국 국무원 공포}}} || ||<:><|4><#CCC>명칭 || 한국어 || 이화원 || || 간체 || 颐和园 || || 번체 || 頤和園 || || 영어 || Summer Palace || ||<:><#CCC>분류 ||<-2> 고건축 및 역사기념건축물[br](古建築及歷史紀念建築物) || ||<:><#CCC>시대 ||<-2> [[청나라|청]] || ||<:><#CCC>일련번호 ||<-2> 1-0122-3-075 || ||<:><#CCC>주소 ||<-2> [[중화인민공화국]] [[베이징시]] [[하이뎬구]] 신젠궁먼루19호[br]北京市海淀区新建宫门路19号 || ||<:><#CCC>등재 ||<-2> [[1961년]] || ||<:><#CCC>차수 ||<-2> 제1차 전국중점문물보호단위 || ||<:><#CCC> 국가 지정 명승지 등급 ||<-2> AAAAA급 ||}}} [목차] [clearfix] == 개요 == [[중국]] [[베이징시]] 북서쪽 [[하이뎬구]]에 위치한 황실원림. 총면적 2.9 km²에 달하며 [[베이징]]에서 현존하는 황실원림 중 건축규모가 제일 크고 비교적 온전하게 보전되었다. [[중국]] 고전원림의 본보기이기도 한 이화원은 높이 60m인 만수산(萬壽山)과 면적 2.2 km²인 쿤밍호(昆明湖)가 있다. '''중국 국가 [[중국5A급여유경구|AAAAA급]] 명승지'''로 지정되었다. == 역사 == === [[금나라]]와 [[원나라]] === 만수산은 원래 이름은 옹산(瓮山)인데, [[베이징]] 서산(西山)의 지맥으로 처음에는 높이가 60 m도 안 되는 작은 언덕이었다. 옥천산(玉泉山)의 샘물이 흘러내려 옹산 앞에서 호수를 이루었는데, 이 호수가 당시 [[금나라]]의 수도인 중도(中都) 서쪽에 위치해 있어 서호(西湖)라고 불렀다. 1153년 [[금나라]] [[해릉양왕]]이 이곳 산기슭에 행궁을 짓기 시작했고, [[원나라]] [[쿠빌라이 칸]]은 대도(大都)로 천도하면서 대운하를 통한 조운을 원활히 하고 궁중의 용수를 확보할 목적으로, 1262년과 1290년 두 차례에 걸쳐 도수감 곽수경에게 명해 옥천산의 샘물을 옹산 기슭에 막아 물을 끌어들여 서호를 준설 확대해 수역을 크게 늘리도록 했다. 이때 서호에서 파낸 흙은 옹산에 쌓아놓게 해 원래보다 크게 높아졌다. === [[명나라]] === 1497년 [[홍치제]]가 유모 조성부인(助聖夫人)을 위해 옹산에 원정사(圓靜寺)를 지었지만 나중에 폐사되었다. 그 후 놀기 좋아하던 [[정덕제]]는 이곳에 호산원(好山園)이라는 행궁을 건축하고 옹산을 금산(金山)으로 개칭했다. [[정덕제]]와 [[가정제]]는 이곳에서 뱃놀이를 즐겼고 [[천계제]] 시절 [[위충현]]이 호산원에서 지내기도 했다. === [[청나라]] === 이화원이 본격적인 모습을 갖추게 된 것은 [[건륭제]]의 치세 때였다. 1750년(건륭 15) [[건륭제]]는 생모 효성헌황후의 [[환갑]]을 기념해 이화원의 전신인 청의원(淸漪園)을 조영하도록 명령하고, [[홍치제]]가 지었던 원정사 터에는 대보은연수사(大報恩延壽寺)를 세우도록 했으며, 이듬해(1751) 옹산을 만수산, 서호를 곤명호라 개칭했다. 청의원은 은자 480만 냥을 쏟아 부어 공사한 끝에 1764년 완공되었다. 청의원 내에는 '[[바다]]에는 신선이 사는 봉래산(蓬萊山)·방장산(方丈山)·영주산(瀛洲山)의 세 산이 있다'는 [[중국 신화]]를 바탕으로 곤명호 위에 남호도(南湖島), 단성도(團城島), 조감당도(藻鑒堂島)를 만들었고, 강남의 풍경과 원림을 좋아한 [[건륭제]]의 취향에 맞춰 항저우의 서호를 위시해 강남 지역의 내로라하는 경승지를 모방해 이곳에 재현했다. 이로써 [[청나라]]의 황실원림으로 유명한 '3산 5원', 즉 창춘원(暢春園)·원명원(圓明園)·향산(香山) 정의원(靜宜園)·옥천산(玉泉山) 정명원(靜明園)·만수산(萬壽山) 청의원(淸漪園)을 형성해 장관을 연출했으나 [[도광제]] 때 이후 [[청나라]]의 국력이 약해지고 재정이 쪼들리면서 유지에 어려움을 겪다가 1860년(함풍 10) [[아편전쟁|제2차 아편전쟁]] 때 영불 연합군이 북경을 점령해 3산 5원을 불태우고 진귀한 보물을 약탈해 청의원의 목조 건축은 전소되어 폐허로 변했다. 하지만 [[서태후]]가 수렴청정을 시작하면서 해군 경비를 유용[* 해군 경비가 유용되었다는 건 논란의 여지가 있으나, 일단 '''당시 청의 1년치 예산의 30%인 은 3천만 냥을 마구 쏟아부은 건 비판의 대상.'''], 청의원의 중건을 개시해 1884년(광서 10)부터 1895년(광서 21)에 걸쳐 공사가 진행되었고 '이양충화(頤養衝和)'의 뜻을 취해 청의원에서 이화원이라 개칭했다. 이렇게 무리를 해서 겨우 복구해놨지만 청나라는 [[청일전쟁]]에서 자업자득으로 패배했다. 1900년(광서 26) 또다시 8개국 연합군의 침입으로 훼손되었다. 이때는 [[청나라]]의 황혼기였으므로, 1902년 서태후는 [[베이징]]에 돌아온 뒤 전산(前山)과 원내의 동쪽 부분만 재보수하는 수밖에 없었다. === [[중화민국]]과 [[중화인민공화국]] === 1912년 [[신해혁명]]으로 [[청나라]]가 무너지자 이화원은 황실의 사유재산으로 남았다가 1924년 [[선통제]]가 [[자금성]]에서 쫓겨나면서 북평시가 접수해 공원으로 일반에 개방했다. [[중화인민공화국]]이 성립한 후 [[1951년]]부터 수차에 걸친 자금조달과 보수공사를 통해 원내의 대부분의 전각과 정원이 전성기의 모습을 회복했다. [[1961년]] 국무원은 이화원을 전국중점문물보호단위로 지정했고 이후 문화대혁명 시기에 불향각 내부가 홍위병들에게 훼손이 되는 피해를 입기는 했지만 이화원 자체는 무사했다. 이 때 훼손된 문화재도 이후 복원되었고 [[1998년]]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되었다. == 주요 건축 == === 전산(前山) === || '''사진''' || '''설명''' ||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26c910259978eec8.jpg|width=100%]]}}} ||'''동궁문(東宮門)'''[br]이화원의 정문으로 앞에는 1쌍의 청동사자가 놓여 있고 문에는 3개의 통행용 출입구가 있는데, 황제나 황후가 출입하던 가운데 문은 어로문(御路門)이라고 불렸다. 문 위에 걸린 '이화원' 세 글자의 편액은 [[광서제]]의 친필이다. 동궁문 북쪽에는 후비들이 거주하던 동8소(東八所)가 있었다. ||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181127022407107.jpg|width=100%]]}}} ||'''인수문(仁壽門)'''[br]이화원의 이중 궁문으로 편액은 [[한자]]와 [[만주어]]로 적혀 있다. 인수문 뒤쪽에는 정치활동구의 중심인 인수전이 있다. 원내의 양편에는 남북 9경방(九卿房)이 설치되어 있는데 [[청나라]] 대의 9경(九卿)과 6부(六部)의 수직실이다. 인수문 맞은편에는 태호석이 있는데 생김새가 노수성(老壽星)을 닮았다 해서 수성석(壽星石)이라 부른다. ||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external/www.wenming.cn/xinsrc_24310072511240782455815.jpg|width=100%]]}}} ||<^|1>'''인수전(仁壽殿)'''[br]1750년(건륭 15)에 지어질 때는 근정전(勤政殿)이었다가 [[광서제]] 때 재건하면서 인수전으로 개칭했으며, 동향으로 된 정면 9칸의 전각이다. [[서태후]]와 [[광서제]]는 이곳에서 정무를 돌보며 외국 사절과 그들의 부인을 접견했다. 인수전 앞에는 [[건륭제]] 때 [[청동]]으로 주조한 [[봉황]], [[용]], 항아리, 향로가 놓여 있는데, [[중국]] 고대의 예제에 따르면 [[용]]은 제왕을 상징하므로 가운데에 놓여야 하지만, [[서태후]]가 [[수렴청정]]을 하면서부터는 [[용]]을 밀어내고 [[봉황]]을 가운데에 놓아 황제보다 우월한 [[서태후]]의 권력을 과시했다. 인수전 북쪽에는 연년정(延年井)이라는 이름의 우물이 있다. ||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external/paper.people.com.cn/12101012305002734275438864412.jpg|width=100%]]}}} ||<^|1>'''수목자친(水木自親)'''[br]곤명호 북쪽에 자리한 수목자친은 물가 앞에 부두가 있고 5칸으로 된 천당전(穿堂殿) 형식 건물로 낙수당의 정문이기도 하다. [[서태후]]는 수로로 이화원에 올 때는 이곳에서 내려 낙수당 침궁으로 들어갔다. ||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external/static.panoramio.com/14274392.jpg|width=100%]]}}} ||<^|1>'''낙수당(樂壽堂)'''[br]전각의 명칭은 [[논어]]에 나오는 '지혜로운 자는 즐겁고 어진 자는 장수한다.(知者樂 仁者壽)'는 구절에서 유래했다. 2중 정원의 사합원(四閤院)으로 좌우에 각각 곁채가 하나씩 있다. [[광서제]] 때 [[서태후]]는 이곳을 침궁으로 사용했다. 내부에는 [[독일]]에서 수입한 샹들리에가 걸려 있다. 낙수당 앞에 놓인 청동 사슴(鹿)·학(鶴)·병(甁)은 한자음을 빌어 '육합태평(六合太平)'을 상징한다. 낙수당 본채는 [[서태후]]가 일상적으로 활동하던 장소이고 서난각은 침실이며 동난각은 탈의실이다. ||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src=http___img.pconline.com.cn_images_upload_upc_tx_itbbs_1608_28_c9_26167642_1472349226994_mthumb.jpg&refer=http___img.pconline.com.webp|width=100%]]}}} ||<^|1>'''옥란당(玉蘭堂)'''[br]인수전 서쪽에 있는 호숫가에 자리한 사합원 형식의 건물로 1750년(건륭 15) 지어졌으며 [[광서제]] 때 중건된 황제의 침궁이었다. 이곳은 [[서태후]]가 이화원에서 [[광서제]]를 연금하던 장소로, 당시에는 정문 이외의 다른 통로는 벽돌로 막아 봉쇄했는데 그때 쌓았던 담장이 지금도 남아 있다. ||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external/www.desinia.tw/6-1-022.jpg|width=100%]]}}} ||<^|1>'''석가루(夕佳樓)'''[br]옥란당과 의운관 사이에 있으며 호숫가에 자리한 2층 건물이다. [[청나라]] 황제와 황후들이 만수산고 곤명호의 경치를 완상하며 휴식하던 장소였다. ||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3095f58750e7493fbd38be44826205d0.jpg|width=100%]]}}} ||<^|1>'''의운관(宜芸館)'''[br]옥란당 북쪽에 있으며, [[건륭제]] 때는 도서를 보관하던 장서처였다가 [[광서제]] 때 중건하면서 황후의 처소가 되었다. 무술정변 이후 옥란당과 이어진 통로는 벽돌 담장으로 막혀버렸다. [[광서제]]의 아내 효정경황후가 이곳에서 거주했다. ||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u=1896110557,2725052517&fm=253&fmt=auto&app=138&f=JPEG.webp|width=100%]]}}} ||<^|1>'''영수재(永壽齋)'''[br]영수재는 낙수당과 서로 통하게 되어 있는 건물로, [[서태후]]의 심복 환관인 이연영(李蓮英)이 거주하던 곳이었다. ||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external/pic.izy.cn/618286.jpg|width=100%]]}}} ||<^|1>'''양인풍(揚仁風)'''[br]낙수당 서쪽 산중턱 소나무 숲 속에 있으며 건물의 평면과 지붕의 선이 부채꼴을 이루고 건물 앞에 깔린 한백옥석이 부챗살처럼 놓여 있어 선면전(扇面殿)이라고도 부른다. ||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颐和园 德和園.jpg|width=100%]]}}}||<^|1>'''덕화원(德和園)'''[br]면적 3천여 m²에 정원 3곳이 있는 덕화원은 대희루(大戱樓), 이락전(頤樂殿), 경선당(慶善堂) 등 건물로 이루어진 [[경극]] 관람용 건축군이다. ||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attachment/이화원/testalpha.jpg|width=100%]]}}} ||<^|1>'''대희루(大戱樓)'''[br]건륭제 때는 대희루 자리에 이춘당(怡春堂)이 있었다. 자금성의 창음각(暢音閣), 승덕 피서산장의 청음각(淸音閣)과 함께 3대 [[경극]] 공연 건축으로 꼽히는데 이들 중 대희루가 가장 크다. 1891년에 착공해 4년 만에 완공했는데, 높이 21 m, 아랫부분 무대의 너비 17 m로 상중하 3층 무대이다. 3층 무대는 동시에 공연을 할 수 있고, 무대와 무대 사이에는 '천정(天井)'을 설치하여 서로 통하게 했으며, 아래층 무대 밑에는 '지정(地井)'을 설치해 귀신과 신선에 대한 극을 공연할 때 이용했다. 이밖에 2층으로 된 분장루가 무대와 이어져 있어 배우들의 분장실로 제공되었다. 대희루가 완공된 뒤 [[서태후]]는 당대의 유명 [[경극]] 배우들을 불러들여 공연하도록 했는데 그 덕에 [[경극]]이 발탈하였으므로, 이곳을 경극의 요람이라고도 한다. ||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external/www.yooyoo360.com/e66d2522fada1beb%E9%A2%90%E4%B9%90%E6%AE%BF2.jpg|width=100%]]}}} ||<^|1>'''이락전(頤樂殿)'''[br]대희루와 마주한 이락전은 [[서태후]]가 경극을 관람하던 장소이다. ||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external/www.yooyoo360.com/38485392012a23d8%E5%BA%86%E5%96%84%E5%A0%82.jpg|width=100%]]}}} ||<^|1>'''경선당(慶善堂)'''[br]덕화원의 가장 안쪽에 있는 경선당은 정면 5칸 전각으로 좌우에 각각 곁채가 하나씩 있다. [[서태후]]가 극을 관람하다가 잠깐씩 휴식을 취하던 곳이었다. ||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29920200726113311676.jpg|width=100%]]}}} ||<^|1>'''장랑(長廊)'''[br][[건륭제]]가 어머니 효성헌황후의 산책을 돕기 위해 만든, 낙수당 서원(西院)에서 시작해 석장정(石丈亭)에서 끝나는 길이 728 m, 273칸짜리 길다란 회랑. 4계절을 상징하는 유가정(留佳亭)·기란정(寄瀾亭)·추수정(秋水亭)·청요정(清遙亭) 등 4개 정자가 부속되었다. 장랑의 들보에는 1만 4천여 폭 소식채화(蘇式彩畵)로 된 그림이 있는데, 항저우 서호의 풍경을 비롯해 꽃·나무·곤충·새·산수, <[[서유기]]>·<[[삼국지연의]]>·<[[수호전]]>·<[[봉신연의]]>·<[[요재지이]]> 등의 고전소설과 같은 다양한 소재가 그려졌다. ||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attachment/이화원/baiwian.jpg|width=100%]]}}} ||<^|1>'''배운전(排雲殿)'''[br]만수산 남쪽 중턱에 위치한 정면 7칸, 측면 5칸의 전각으로 원래는 [[명나라]] 때 [[홍치제]]가 세운 대보은연수사(大報恩延壽寺)의 대웅전이 있던 자리였다. [[서태후]]가 이곳에서 자신의 생일을 축하하기도 했다. 명칭은 '신선이 구름을 헤치고 나오니(神仙排雲出) 보이는 것은 금과 은으로 된 대였노라(但見金銀臺)'는 시구에서 비롯되었다. 자소전(紫霄殿)·옥화전(玉華殿)·방휘전(芳輝殿)·운금전(雲錦殿)의 4개 배전이 딸려 있으며 배운전 뒤쪽에는 덕휘전(德輝殿)이 있다. ||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external/mw2.google.com/38234367.jpg|width=100%]]}}} ||<^|1>'''불향각(佛香閣)'''[br]만수산 전산 비탈 높이 20 m에 기단을 쌓아 만든 41 m 높이 8각 4중 처마의 3층 목탑으로 이화원 내에서 가장 [[크고 아름다운]] 건물이자 이화원 전경을 담은 사진에서 빼놓지 않고 나오는 건물이다. 강남의 황학루를 본떠서 지었는데, 1750년(건륭 15) [[건륭제]]는 이 자리에 '''9층탑'''을 지으려고 했다가 원안을 수정해 8층탑으로 변경했다(…). 1860년 [[아편전쟁|제2차 아편전쟁]] 때 영불 연합군의 방화로 소실되었다가 1891년 [[서태후]]가 3층으로 중건되었다. 불향각 1층에는 1574년에 제작한 나무대비관세음보살(南無大悲觀世音菩薩)을 봉안했는데, 높이 5 m, 얼굴 12개, 눈 36개, 팔 24개가 달린 보살상으로 꽃잎 999장이 조각된 연화보좌 위에 서 있다. [[문화대혁명]] 때 홍위병들에게 불향각과 보살상이 훼손당했지만 이후 복원되었다.||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external/visitbeijing.or.kr/1452647364-53.jpg|width=100%]]}}} ||<^|1>'''지혜해(智慧海)'''[br]불향각의 뒤쪽, 만수산의 정상에 자리한 건물로 나무를 전혀 사용하지 않고 오로지 석재와 유약을 입힌 다양한 색깔의 벽돌만으로 지어진 건물이다. 4개 벽에는 불감과 [[불상]] 1008좌가 장식되어 [[불교]]의 지혜가 무한함을 칭송하는 의미를 나타냈으나, 여러 전란을 거치면서 훼손되는 피해를 입었다. ||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external/lh6.ggpht.com/nEO_IMG_IMG_2788.jpg|width=100%]]}}} ||<^|1>'''전륜장(轉輪藏)'''[br]전륜장은 불향각 동쪽 산비탈에 보운각과 대칭으로 마주 서 있는 종교 건축이다. 가운데는 3층의 정전이고, 양쪽은 각각 장경정(藏經亭)과 연결되어 있다. 정자 안에는 전경목탑(轉經木塔)이 설치되어 있는데, 이는 [[티베트 불교]]의 법기(法器)를 건축으로 상징화한 것이다. 정전 앞에는 [[건륭제]]의 어필로 된 '만수산곤명호비(萬壽山昆明湖碑)'가 세워져 있다. 비문 뒷면에는 당시 곤명호를 파고 [[베이징]]의 수리를 조절한 상황에 대해 적혀 있다. ||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u=1822474473,3343645321&fm=253&fmt=auto&app=138&f=JPEG.webp|width=100%]]}}} ||<^|1>'''보운각(寶雲閣)'''[br]배운전 서편에 있으며, 겉보기에는 일반적인 정자와 다르지 않지만 모든 부재가 나무를 모방한 '''[[청동]]'''으로 지어져 일명 '동정(銅亭)'이라고도 불린다. 1755년에 [[청동]]으로 목구조물의 부재를 모방해 만들었다. 높이 7.55 m, 무게 207 t에 달하며, [[티베트 불교]]의 승려들이 이곳에서 황제와 황후를 위해 기도와 염불을 했다. ||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external/a0.att.hudong.com/01300000167882121767771912511.jpg|width=100%]]}}} ||<^|1>'''석방(石舫)'''[br]곤명호 북단의 서쪽 호숫가에 자리한 배 모양의 건물이다. 길이 36m이고 선체는 거석을 다듬어 만들었는데 2층으로 되어 있다. 배의 내부는 꽃무늬 벽돌로 바닥을 깔았고 창문에는 채색유리를 상감했으며 천장은 벽돌 조각으로 장식했다. 1755년(건륭 19)에 건조된 석방은 [[건륭제]]가 곤명호의 경치를 감상함과 동시에 [[청나라]]의 통치가 반석처럼 공고함을 상징하기 위한 것이었다. 기존의 석방은 1860년(함풍 10)에 훼손되었고, 현존하는 석방은 1894년 서태후가 [[이화원]]을 재건할 때 선체를 서양식으로 바꾸고 '강물이 맑고 바다가 평화롭다(河淸海晏)'는 의미를 취해 청안방(淸晏舫)으로 개칭했다. ||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external/a3.att.hudong.com/01300000185618125938034460727.jpg|width=100%]]}}} ||<^|1>'''청리관(聽鸝館)'''[br]장랑의 서쪽 구간 북쪽 만수산 중턱에 위치해 있다. [[청나라]] 때 황제와 황후가 희곡이나 음악을 감상하며 연회를 베풀던 장소였다. ||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external/img2.yododo.com/01321C77E0F402E2FF808081321BFD68.jpg|width=100%]]}}} ||<^|1>'''화중유(畵中游)'''[br]불향각 서쪽의 건축군으로 3개의 정자(동쪽 정자는 차추정(借秋亭), 서쪽 정자는 애산정(愛山亭)), 누각 2채, 재 1채, 패방 1채로 구성되었다. 산세의 기복과 변화를 이용해 입체적인 평면으로 이루어졌으며, 여기에 올라서면 만수산과 곤명호의 풍경을 한눈에 굽어볼 수 있어 마치 그림 속을 유람하는 듯하다고 화중유라 이름지었다. || === 후산(後山) === || '''사진''' || '''설명''' ||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external/img.lotour.com/img379807.jpg|width=100%]]}}} ||<^|1>'''소주가(蘇州街)'''[br]후호(後湖)의 중심에 있는 소주가는 [[건륭제]] 때 건설되었다. 강남 수상도시의 시장을 모방하면서도 [[베이징]] 시장의 특색을 겸비했으며, 한 줄기 물길을 따라 양안에 2갈래 거리가 형성되어 있다. 총길이 약 300 m, 각종 점포 60여 곳이 줄지어 있지만, 황제와 황후가 경치를 감상하던 장소일 뿐 실제로 장사를 하진 않았다. 1860년에 영불 연합군이 침입하여 전소되었는데, 뒷날 [[서태후]]가 이화원을 재건할 때 소주가는 미처 보수하지 못했다. 지금의 모습은 1987~1990년에 재건한 것이다. 현재 이곳의 상점가에는 관광객을 위한 점포가 들어서서 [[청나라]] 때 동전으로 물건을 구매하는 체험을 할 수 있다. ||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external/www.showchina.org/W020090330312174919401.jpg|width=100%]]}}} ||<^|1>'''해취원(諧趣園)'''[br][[건륭제]] 때는 해산원이라 명명했다. 강소성 무석(無錫)의 기창원(寄暢園)을 모방한 것으로 강남 사가(私家) 원림의 특징을 지녔다. [[가경제]] 때 개축하면서 [[건륭제]]의 <해산원팔경시서(諧山園八景詩序)>의 '일정일경(一亭一徑) 족해기취(足諧奇趣)'라는 구절을 따 해취원으로 개칭했다. 1860년에 전소되어 [[광서제]] 때 개축했다. 해취원 내에는 정자·대·전당·수상 정자가 연못을 둘러싸고 있으며 100칸 유랑(游廊)이 건물들을 연결하고 있다. [[건륭제]]는 이곳의 시취(詩趣)·수취(水趣)·교취(橋趣)·서취(書趣)·정취(亭趣)·화취(畵趣)·낭취(廊趣)·방취(倣趣) 등 8취(八趣)를 주제로 시를 짓기도 했다. ||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external/scenery.cultural-china.com/details17ece8e6b53ce08fcdd0.jpg|width=100%]]}}} ||<^|1>'''4대부주(四大部洲)'''[br]만수산 후산의 증축선 위에 자리한 대규모의 [[티베트 불교]] 건축군이다. [[티베트]] 삼마야사(三摩耶寺)를 모방한 이 건축군에는 [[티베트]]풍과 [[한족]]풍 양식이 혼합되어 있다. 처음 지어졌을 때의 건축군은 1860년(함풍 10) 영불 연합군의 방화로 불탔고, 현존 건축군은 나중에 재건되었다. 주요 건물인 향암종인지각(香岩宗印之閣)에는 삼세 [[불상]]을 봉안했고, 주변에는 불교에서 말하는 [[수미산]] 우주론을 반영하여 동승신주(東勝身洲)·남섬부주(南贍部洲)·서우화주(西牛貨洲)·북구노주(北俱盧洲) 등 사대부루를 세웠으며, 각 부주의 양쪽에 소주(小洲)를 하나씩 만들어 8개 소부주라 한다. 전각의 남동·남서·북동·북서 모퉁이에는 백·흑·녹·홍 등 네 가지 색으로 라마탑이 있어 4범탑(四梵塔)이라 부르는데, 불교의 4지(四智)를 의미한다. 기타 부속 건물로 일광대(日光臺)와 월광대(月光臺) 등이 있다. ||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external/a4.att.hudong.com/01300000045615119678482427262.jpg|width=100%]]}}} ||<^|1>'''화승각(花承閣) 다보유리탑(多寶琉璃塔)'''[br]화승각은 만수산 후산의 동부에 위치한 반원형으로 된 건축이었으나 1860년(함풍 10)에 파괴되고 현재는 다보유리탑 하나만 남아 있다. 이 탑은 높이 약 1 6m, 8면 7층 처마에 도금한 보정을 얹었고 탑신은 황·남·녹·백색 유리벽돌과 [[불상]]으로 장식했다. || === 동제(東堤) === || '''사진''' || '''설명''' ||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external/mw2.google.com/4468430.jpg|width=100%]]}}} ||<^|1>'''문창각(文昌閣)'''[br]곤명호의 동제 북단에 위치한 성관(城館)식 건축이다. 관문 위에 십자형 2층 누각이 있고 누각 안에는 문창제군(文昌帝君)의 동상이 안치되어 있다. [[도교]]에서 공명과 복록을 주관하는 문창성(文昌星)에서 명칭을 따왔는데, 만수산 서쪽 기슭에 자리한 숙운첨(宿雲檐) 내에 안치한 무성(武聖) [[관우|관제(關帝)]]상과 대칭을 이루어 문무보정(文武輔政)의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a9cc4dc92da341a9aa311c684275a3c9.jpg|width=100%]]}}} ||<^|1>'''곽여정(廓如亭)'''[br]팔방정(八方亭)이라고도 부르며 17공교 동단에 위치한 8각 2중 처마의 정자이다. 안팎으로 24개의 원기둥과 16개의 사각기둥이 있다. 면적이 130여 km²에 달해 [[중국]]의 정자 건축 중에서는 가장 크다. ||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이화원동우.jpg|width=100%]]}}} ||<^|1>'''동우(銅牛)'''[br]17공교 동쪽에는 [[구리(원소)|구리]]로 주조한 [[소]] 1마리가 꽃무늬를 조각한 석좌 위에 앉아 있는데, 수환(水患)을 줄이기 위해 1755년에 설치한 것이다. [[소]]의 등에는 전자(篆字)체로 <금우명(金牛銘)>이라는 명문이 있다. ||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53409389656f4d8da6d4272d21a56436.jpg|width=100%]]}}} ||<^|1>'''야율초재사(耶律楚材祠)'''[br][[거란]] 종실 출신으로 [[몽골]]의 네 칸을 섬긴 중신이었으며 제국의 기틀을 잡는데 큰 기여를 한 [[야율초재]]를 모신 사당으로 [[건륭제]] 때 개건했다. 정면 3칸이고 내부에는 [[청나라]] 때 만든 [[야율초재]] 채색 조각상이 있다. || === 남호도(南湖島) === || '''사진''' || '''설명''' ||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a6979085d5be455c95587db6213d5f82.jpg|width=100%]]}}} ||<^|1>'''17공교(十七孔橋)'''[br]남호도와 동제 사이를 가로지르는 다리로 아치 17개가 있다. 길이 150 m, 너비 8 m이고 난간에는 돌사자 조각 544개가 있다. ||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external/guide.lvmama.com/20100917110359712.jpg|width=100%]]}}} ||<^|1>'''용왕묘(龍王廟)'''[br]남호도 복판에 자리한 용왕묘는 '광윤영우사(廣潤靈雨寺)'라고도 하는데, 여기에 서해 용왕 광윤을 모셨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고대에는 [[용]]에게 비바람을 부릴 수 있는 능력이 있다고 믿어, 용왕묘를 세워 수해가 일어나지 않기를 기원했다. ||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u=2088390934,942658964&fm=253&fmt=auto&app=138&f=JPEG.webp|width=100%]]}}} ||<^|1>'''함허당(涵虛堂)'''[br]남호도 북단의 호숫가에 있으며 산석을 쌓아 만든 높은 대 위에 건축되었다. [[건륭제]] 때는 강서성의 등왕각(滕王閣)을 모방한 망섬각(望蟾閣)이라는 3층 건물이었지만 [[광서제]] 때 중수하면서 단층으로 바꾸었으며, 곤명호 건너편의 불향각과 마주본다. || === 서제(西堤) === || '''사진''' || '''설명''' ||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external/www.summerpalace-china.com/q1k0hkq.jpg|width=100%]]}}} ||<^|1>'''계호교(界湖橋)'''[br]곤명호와 후호를 나누는 경계에 있는 다리. ||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external/www.pep.com.cn/W020100825447367067526.jpg|width=100%]]}}} ||<^|1>'''옥대교(玉帶橋)'''[br]서제의 6개 다리 중 유일한 아치형이라 그 밑으로 배가 다닐 수 있다. 옥대교는 곤명호로 물이 흘러드는 수로로, [[청나라]] 때 황제와 황후가 배를 타고 곤명호에서 옥천산으로 들어가려면 이 다리 밑의 수로를 거쳐야 했다. ||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external/mw2.google.com/39316664.jpg|width=100%]]}}} ||<^|1>'''빈풍교(豳風橋)'''[br]이중 처마의 장방형 누각 다리이다. 붉은 기둥에 잿빛 기와를 얹고 처마는 채화로 장식했다. 원래 이름은 상저교(桑苧橋)였으나 [[광서제]] 때 <시경>의 빈풍(豳風)이라는 시를 인용해 개칭했다. ||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external/mw2.google.com/54235951.jpg|width=100%]]}}} ||<^|1>'''경명루(景明樓)'''[br]서제의 남단에 위치해 있으며 호남성 동정호의 악양루(岳陽樓)를 모방한 건물이다. 가운데 건물은 2층이고 좌우 양쪽에 곁채가 부속되었다. 명칭은 북송의 범중엄이 쓴 <악양루기(岳陽樓記)>의 "화창한 봄날 경치 아름다운데(春和景明) 물결이 잔잔하여(波瀾不惊) 하늘과 일색을 이루니(上下天光) 실로 벽파가 만경이로다.(一碧萬頃)" 하는 구절에서 유래했다. 1860년(함풍 10)에 전소되었다가 1992년에 중건되었다. ||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u=17412812,2203292779&fm=253&fmt=auto&app=138&f=JPEG.webp|width=100%]]}}} ||<^|1>'''경교(鏡橋)'''[br][[건륭제]] 때 만들어진 후 [[광서제]] 때 중건되었다. 명칭은 [[당나라]]의 시인 [[이백]]의 시 <추등선성사조북루(秋登宣城謝眺北樓)>의 '두 줄기 강물은 거울이 되어 서로 비추고(兩水夾明鏡) 두 다리는 무지개를 늘어뜨려 놓은 것 같네(雙橋落彩虹)'라는 구절에서 유래했다. || == 기타 == 역설적으로 청나라를 망하게 했던 건축물이 현재는 중국의 돈줄이다. 청말 민국초의 문학가, 고고학자였던 [[왕궈웨이]]는 곤명호에 투신자살하였다. 1983년 쇼브라더스를 나온 이한상 감독이 이화원이 불타는 과정과 함풍제의 최후와 서태후의 이야기를 담은 홍콩영화 <화소원명원>,<수렴청정>을 연출하여 흥행에 크게 성공한다. 이 영화는 [[양가휘]]의 데뷔작(화소원명원)이자 제3회 [[홍콩 영화 금상장]]에서 최연소 남우주연상을 수상한 작품(수렴청정)이기도 하다. [[천안문 6.4 항쟁]]을 다룬 로예 감독의 영화 <여름궁전>의 원제도 이 이화원이다. 이화원의 [[영어]] 이름이 Summer Palace였고 그게 [[한국]]에 넘어오면서 역으로 여름궁전으로 번역된 것. 이화원은 여름에 간다면 평범하게 관람할 수 있지만 겨울에 가면 그렇지 않다. 엄청난 추위 때문에 호수가 전부 얼어붙는다. 그래서 빨리 건너가겠다고 다리 대신 그냥 호수로.... 건너가는 사람들이 많다.[* 베이징의 겨울 추위는 한국이랑 차원이 다르다. 위도상 [[신의주]]보다도 살짝 높은 곳에 있다.] 다리 밑을 그냥 지나갈 수 있는데, 유적을 파손하는 건 아니어서 그런지 공안이 달려와서 잡는다거나 하진 않는다. 스케이트나 썰매를 타는 사람들도 있다.[* 오히려 베이징 시민들의 겨울철 스케이트 장소로 애용된다. 외국 여행사이트를 보면 겨울에 베이징에서 할 만한 것으로 추천되기도 한다.] [[베이징 지하철 4호선]] [[베이궁먼역]], [[베이징 지하철 시자오선]] [[이허위안시먼역]]을 이용해 올 수 있다. == 같이보기 == * [[자금성]] * [[선양고궁]] * [[중난하이]] * [[정원]] [[분류:중국의 세계유산]][[분류:중국의 관광지]][[분류:정원]][[분류:전국중점문물보호단위]] [[분류:중국의 공원]][[분류:서태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