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clude(틀:조선의 후궁(중종 ~ 고종))] ---- || {{{#!wiki style="margin: -5px -10px; padding: 7px 10px; background-image: linear-gradient(to right, #6E1D55, #89236A 20%, #89236A 80%, #6E1D55)" {{{#ffd400 '''경혜인빈 김씨 관련 틀'''}}}}}} || || {{{#!folding [ 펼치기 · 접기 ] ---- [include(틀:칠궁 배향자)] ---- }}} || ---- ||<-2> {{{#!wiki style="margin: -5px -10px; padding: 5px 10px; background-image: linear-gradient(to right, #6E1D55, #89236A 20%, #89236A 80%, #6E1D55); color: #FFD400" '''조선 선조의 후궁[br]{{{+1 경혜인빈 김씨 | 敬惠仁嬪 金氏}}}'''}}} || ||<-2> {{{#!wiki style="margin: -6px -10px;" [[파일:순강원.jpg|width=100%]]}}} || ||<-2> {{{#ffd400 {{{-2 순강원 전경}}} }}} || ||<|2> '''출생''' ||[[1555년]] [[3월 31일]][* [[음력]] [[2월 29일]]] || ||[[조선]] [[황해도]] [[해주시|해주목]] 남성촌[br](現 [[황해남도]] [[해주시]]) || || '''사망''' ||[[1613년]] [[11월 30일]][* [[음력]] [[10월 29일]]] (향년 59세) || || '''능묘''' ||순강원(順康園) || ||<|6> '''재위기간''' ||'''{{{#ffd400 조선 숙원~소용}}}''' || ||[[1573년]] ~ [[1577년]] 전후 || ||'''{{{#ffd400 조선 숙의~귀인}}}''' || ||[[1577년]] 이후 ~ [[1604년]] [[12월 31일]] || ||'''{{{#ffd400 조선 인빈}}}''' || ||[[1605년]] [[1월 1일]] ~ [[1613년]] [[12월 10일]] || ||<-2> {{{#!wiki style="margin: 0 -10px -5px; min-height: 28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 '''본관''' ||[[김(성씨)|수원 김씨]] || || '''부모''' ||부친 - 김한우(金漢佑, {{{-3 1501 ~ 1577}}}) 모친 - [[전주 이씨]] 이효성(李孝性)의 딸 || || '''배우자''' ||[[선조(조선)|선조]] || || '''자녀''' ||{{{#!folding 슬하 4남 5녀 [ 펼치기 · 접기 ] 1남 - [[의안군]](義安君, {{{-3 1577 ~ 1588}}}) 2남 - [[신성군]](信城君, {{{-3 1579 ~ 1592}}}) 3남 - [[정원군]](定遠君, {{{-3 1580 ~ 1619}}})[* 추존 국왕 원종(元宗)으로, 16대 국왕 [[인조]]의 아버지.] 1녀 - [[정신옹주]](貞愼翁主, {{{-3 1582 ~ 1653}}}) 2녀 - [[정혜옹주]](貞惠翁主, {{{-3 1584 ~ 1638}}}) 3녀 - [[정숙옹주(선조)|정숙옹주]](貞淑翁主, {{{-3 1587 ~ 1627}}}) 4남 - [[의창군(1589)|의창군]](義昌君, {{{-3 1589 ~ 1645}}}) 4녀 - [[정안옹주]](貞安翁主, {{{-3 1590 ~ 1660}}}) 5녀 - [[정휘옹주]](貞徽翁主, {{{-3 1593 ~ 1653}}})}}} || || '''봉작''' ||숙원(淑媛) → 소용(昭容) → 숙의(淑儀)[br]→ 귀인(貴人) → '''인빈(仁嬪)''' || || '''당호''' ||양화당(養和堂) || || '''사당''' ||[[칠궁|저경궁]](儲慶宮) || || '''시호''' ||'''경혜인빈(敬惠仁嬪)''' || }}}}}}}}} || [목차] [clearfix] == 개요 == [[조선]] [[선조(조선)|선조]]의 [[후궁]]. 현재 [[칠궁]]에 합사되어 매년 10월 넷째주 월요일에 [[전주 이씨]] 대동종약원의 제사를 받고 있다. 슬하에 [[의안군|의안군 이성]], [[신성군|신성군 이후]], [[원종(조선)|정원군 이부]], [[의창군(1589)|의창군 이광]]을 비롯해 [[정신옹주(1526)|정신옹주]], [[정혜옹주]], [[정숙옹주]], [[정안옹주]], [[정휘옹주]]를 낳아 4남 5녀를 두었다. 이 중에서 셋째 아들 [[정원군]]의 자식이 [[인조]]로 등극하고, 정원군은 사후 대원군에 진봉되었다가 '''원종'''으로 추존되면서 [[종묘|종묘 영녕전]]에 봉안되었고 왕의 사친(私親)이 되었다. 즉, 인빈 김씨는 추존 왕 [[원종(조선)|원종]]의 어머니이자 [[인조]]의 할머니이다. '''[[1623년]](광해군 15년), [[인조반정]] 이후 [[인조]]부터 [[순종(대한제국)|순종]]까지 모두 그녀의 후손들이다.''' == 생애 == === 친정 가문 === 아버지는 [[사헌부]] 감찰을 지낸 김한우(金漢佑)이며, 어머니는 [[효령대군]]의 셋째 아들 보성군 이합(李㝓)의 증손자 이효성(李孝性)의 딸이다.[* 훗날 며느리가 되는 [[인헌왕후|연주군부인 구씨]]의 조모 역시 [[전주 이씨]]인데 인빈 김씨는 보성군의 7남 이서의 후손이고 연주군부인 구씨는 4남 이위의 후손이다. 이렇게 되면 인빈 김씨와 며느리 구씨와는 10촌간이다.][* 덩달아 시아버지 [[선조(조선)|선조]]와도 인빈은 12촌이다.] 또한, 외사촌 언니는 [[명종(조선)|명종]]의 [[후궁]]인 [[경빈 이씨]]였는데[* 원래 숙의였으나 [[영조]]가 자신의 생모 [[숙빈 최씨]]의 추숭을 하면서 이쪽도 덩달아 경빈(慶嬪)으로 추증되어 품계가 올랐다.] 사실상 일찍부터 [[조선/왕실|왕실]]과 인연이 있었던 셈. 언니는 신경과 결혼하여 딸을 낳았는데, 이 딸은 [[광해군]]의 후궁 [[소원 신씨]]가 된다. === 선조의 총애 === [[경빈 이씨]]는 자식이 없었기에 김씨를 데려다가 궁중에서 양육했는데, 어린 나이에도 행동이 유순하고 침착해서 남다른 바가 있었다고 한다. 이런 모습이 당시 왕대비로 있었던 [[명종(조선)|명종]]의 왕비 [[인순왕후]]의 눈에 들어 [[선조(조선)|선조]]의 [[후궁]]이 될 수 있었다. 이때가 김씨의 나이 14세 때의 일이다.[* 《상촌집》 28권, 인빈김씨신도비명(仁嬪金氏神道碑銘). ][* 이는 마치 [[중종(조선)|중종]]의 후궁 [[창빈 안씨]]가 왕대비였던 [[정현왕후]]의 추천으로 후궁이 된 것과 비슷한 케이스다. '''공교롭게도 두 사람 모두 [[왕비]]가 아닌 [[후궁]]이면서 [[선조(조선)|후]][[인조|손]]이 왕이 되는 영광을 누린다.'''] [[1573년]](선조 6년) 종4품 숙원(淑媛)으로 봉작되었다. 그 이후 정3품 소용, 종2품 숙의, 종1품 귀인을 거쳐서 [[1604년]](선조 37년) [[11월 12일]]에 정1품 '''인빈(仁嬪)'''이 되었다.[* 대부분 사극에서는 시기에 상관없이 처음부터 인빈 김씨로 등장하는 편이다. ] 인빈 김씨 이전에 [[선조(조선)|선조]]가 가장 총애했던 후궁은 [[공빈 김씨]]였다. 더군다나 정비 [[의인왕후]]가 [[불임]] 등으로 임신하지 못하는 동안, [[선조(조선)|선조]]에게 첫 아들 [[임해군]]과 둘째 아들 [[광해군]]을 낳아주었으니 같은 [[후궁]]이지만 위세도 당당했다. 하지만 [[공빈 김씨]]가 [[광해군]]을 낳고 산후병으로 [[1577년]](선조 10년), [[사망]]하면서 그동안 부각되지 않았던 그녀가 [[선조(조선)|선조]]의 총애를 독차지하게 된다. 여기에는 [[인빈 김씨]]의 처신이 한몫했다. 공빈은 살아생전에 "내가 아픈 이유는 다른 [[후궁]]들이 나의 신발을 가져다가 [[저주]]했기 때문"이라고 말했고, 그걸 믿은 [[선조(조선)|선조]]는 다른 [[후궁]]들에게 더욱 모질게 대했다. 그러나 당시 정3품 소용이었던 그녀는 [[선조(조선)|선조]]를 더 지극정성으로 모셨고, 앞에서 [[공빈 김씨]]의 지난 허물을 자주 들춰냈다. 그러자 [[공빈 김씨]]를 서서히 잊게 된 [[선조(조선)|선조]]는 그녀의 말에 맞춰 "[[공빈 김씨|공빈]]이 [[선조(조선)|나]]를 저버린 적이 많았다"고 하고, 인빈 김씨를 전에 없이 더욱 총애하게 되었던 것.[* [[선조수정실록]] 11권, 선조 10년(1577년) 5월 1일 무자 3번째 기사. [[http://sillok.history.go.kr/id/knb_11005001_003|#]] ] 때마침 [[공빈 김씨]]가 [[1577년|사망한 해]]에 인빈 김씨는 첫 아들 [[의안군]]을 낳고, 이듬해 [[신성군]]을 연년생(다음해에 이어서)으로 낳으면서 완전히 자리를 굳힌다. 그 결과 [[선조(조선)|선조]]의 많은 [[후궁]]들 중 유일하게 4남 5녀로 다산했으며, [[선조(조선)|선조]]가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으로 피란을 갈 때도 정비 [[의인왕후]]가 아닌 그녀를 곁에 데리고 갈 만큼 총애 받았다. 심지어 [[임진왜란|전쟁]]이 한창인 [[1593년]](선조 26년)에는 [[황해도]] [[해주]](海州) 행궁에서 정휘옹주를 낳았다. === 친정의 논란과 구설수 === 인빈 김씨의 남동생 '김공량'은 문제가 많은 사람이었다. 특히 [[1592년]](선조 25) [[내수사]]의 정5품 별좌(別坐)가 되었는데[* 내수사는 국가 재정과는 구별되는 [[조선/왕사|국왕]]의 개인 재산([[내탕금]])을 관리하는 중요한 특별 관청이다. 그러므로 [[후궁]]의 친인척이 내수사에서 일하는 것은 상당한 특혜로 [[후궁]] 집안의 재산 증식에도 도움이 되었다. --비리의 온상-- ],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선조(조선)|선조]]가 [[개성시|개성]]에 이르렀을 때는 백성들이 김공량의 실정을 들어 죄를 줄 것을 직접 청할 정도였다. >[[선조(조선)|상]]([[上]])은 남문에 나와 부로와 인민을 불러 위로하고 이어서 고충을 물으면서 하고 싶은 말을 하라고 하니, 선비 10여 명이 대답하여 아뢰기를, >"오늘날의 사태는 [[이산해]]와 김공량이 안팎으로 일을 꾸며서 인민이 원한을 품게 되어 외적의 침입을 초래한 것이온데, 이것은 모두 [[선조(조선)|전하]]께서 [[인빈 김씨|숙원 김씨]](淑媛金氏)에게 빠졌기 때문입니다." >하였다. >---- >《[[기재사초]]》 임진일록 >이때 어가가 [[개성시|개성]]에 이르니 백성들이 모여들어 혹은 통곡하고 혹은 눈물을 흘렸다. 그중 뚝뚝하고 무식한 부류들은 큰 소리로, >"[[선조(조선)|상감]]이 백성은 생각하지 않고 오직 [[후궁]]들만 부유하게 해주고 김공량(金公諒)을 총애하여 제일 계책을 삼다가 오늘 [[임진왜란|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어찌 공량을 시켜 적을 토벌하지 않으십니까." >하고, [[선조(조선)|임금]]을 향해 돌을 던진 사람이 있어도 시위(侍衛)하는 인원이 적고 병력이 약해서 막지 못하였다. 공량이 당시에 원망을 산 것을 알 수 있다. >---- >《공사견문록》 당시 [[왜군]]들은 '우리는 너희들을 죽이지 않는다. 너희 [[선조(조선)|임금]]이 너희들을 학대하므로 이렇게 온 것이다.' 라면서 공작을 펼쳤고, 백성들 중에서는 '왜인도 사람인데 우리들이 하필 집을 버리고 피할 필요가 있겠는가' 라면서 [[순왜|왜군에 동조하는 움직임]]을 보였다.[* 당시에는 [[선조(조선)|선조]]가 [[한성부|한양]]을 버리면서 [[경복궁]]을 비롯한 궁궐들 그리고 노비 문서를 관리하는 장례원 등이 모조리 불타는 등 민심이 매우 흉흉했다. ] [[선조(조선)|선조]]는 이처럼 요동치는 민심을 수습하기 위해서 조정 대신들에게 방법을 물었다. 그러자 돌아온 대답이 '내수사 관리들을 참형하고 김공량을 [[참형|효수]]할 것'이었다.[* [[선조실록]] 26권, 선조 25년(1592년) 5월 3일 임술 6번째기사. [[http://sillok.history.go.kr/id/kna_12505003_006|#]] ] 이때 "옛날 임금 중에는 총애를 끊은 임금도 있었다"는 말까지 나왔으나 [[선조(조선)|선조]]는 김공량을 처형할 생각이 없었다. 오히려 임금이 나서서 김공량을 두둔하는 지경이었다. >삼사([[홍문관]], [[사간원]], [[사헌부]])가 합계하여 김공량(金公諒)의 [[참형|효시]](梟示)를 청하니, 상이 답하였다. >"김공량이 언제 정사(政事)를 어지럽힌 일이 있는가? [[임진왜란|왜변]](倭變)이 어찌 이사람 때문에 일어났겠는가. 처벌은 죄에 맞아야 한다. 그러니 우선 가두어 두라." >---- >《[[선조실록]]》 선조 25년(1592년, 명 만력(萬曆) 20년) 5월 3일 임술 14번째기사 심지어 의병장 [[조헌]]이 상소에 "김공량(金公諒)이 원한을 쌓고 환심을 산 것은 [[양국충]](楊國忠)과 다름이 없습니다" 라고 썼다.[* [[선조수정실록]] 26권, 선조 25년(1592년) 8월 1일 무자 4번째기사. [[http://sillok.history.go.kr/id/knb_12508001_004|#]] ] 양국충은 [[양귀비]]의 친척인데, 조헌이 김공량을 양국충에 빗댄 것은 인빈 김씨까지 같이 비판하는 것이며 상당히 강도 높은 비판이다. 하지만 김공량은 시국이 어수선한 틈을 타 [[강원도]] 산곡(山谷)[* 지금의 [[강원도]] [[화천군|화천]], [[홍천군|홍천]] 산골짜기 일대]으로 숨었고 전쟁이 끝난 뒤에야 모습을 드러냈다. 그는 끝까지 제대로 된 처벌을 받지 않았고, 누이 인빈 김씨와 선조의 비호로 천수를 누렸다. 나중에 [[인조]] 대에 이르면, [[김상헌(조선)|김상헌]]이 [[윤근수]](尹根壽)[* [[윤두수]]의 동생이다. ]의 행장을 쓰면서 김공량(金公諒)에 대해 이렇게 평하였다. >김공량은 곧 인빈(仁嬪)의 오빠로서 [[정원군|정원 대원군]](定遠大院君)의 외숙(외삼촌)이다. 인빈이 [[선조(조선)|선조]]의 [[후궁]]으로 총애를 받자, 당시 [[영의정|영상]] [[이산해]](李山海)가 세력에 빌붙고자 밤에 그의 집에 찾아 갔는데, 궁금(宮禁)과 내통하여 안팎으로 권력을 농락한 자이다. >---- >《[[인조실록]]》 인조 8년(1630년) 6월 21일 여기에 대해 [[인조]]는 노여워하면서 "[[청음 김상헌|김상헌]]은 인정도 모르는 사람" 이라며 행장을 고쳐짓도록 하였다.[* [[인조]]는 자신이 할머니 인빈 김씨의 손에서 자랐다고 밝혔고, 또 인빈 김씨의 하나뿐인 [[동복형제|동복오빠]] 김공량을 챙겨주려고 할 만큼 신경 썼기 때문에 김상헌이 쓴 행장에 노여워 할 수 밖에 없다. [[http://sillok.history.go.kr/id/kpa_10210026_001|#]] ] 그런데 인빈 김씨 본인도 [[임진왜란]] 시절에 처신이 좋지 않았다. 《후광세첩》에 따르면, 인빈 김씨가 피난 중에 자기 어머니의 제삿날이라고 하여 제사 음식을 마련하고 조정 대신들에게도 나누어준 일이 있었다. 이에 [[윤두수]]는 "[[종묘]]에 올리는 제사^^(국가)^^도 오랫동안 폐하였는데, 인빈은 이에 자신의 어머니 제사^^(사가)^^를 올린단 말입니까?" 라고 쓴 소리를 하였다.[* 《후광세첩》 제3권 용사호종록. [[http://db.itkc.or.kr/inLink?DCI=ITKC_BT_1446A_0030_010_0010_2011_001_XML|#]] ] 또한, [[의주]] 행궁에 있을 때는 퇴선(退饍) 때문에 [[정철]]에게 비판 받았다. 본래 퇴선은 [[조선/왕사|국왕]]이나 [[왕세자]]가 음식을 먹고 남은 음식을 신하에게 하사하는 행위이다. 따라서 [[후궁]]은 감히 할 수 없는 일인데도 인빈 김씨가 분수에 넘는 일을 한 셈이다. 이 일화는 [[류성룡]]이 쓴 《운암잡록》 뿐 아니라 《사계전서》[* [[조선]] 중기의 학자 김장생(金長生)이 쓰고 [[송시열]]이 편집하여 [[1685년]](숙종 11년) 왕명에 의해 간행된 책이다. ]에 실린 [[정철]]의 행장에서도 그대로 나온다. >귀빈(貴嬪) 김씨(金氏)가 안에서 '''퇴선(退膳)'''을 내보내 별감이 상을 받들고 와서 대신들 앞에 놓았다. [[정철]]이 제일 위에 앉아서 어디에서 가져 왔느냐고 물었다. 별감이 대답하기를, >"김 숙의(金淑儀)에게서 왔습니다." >하니, [[정철]]은 성난 소리로, >"내가 비록 못났으나 어찌 김 숙의가 먹다 남은 음식을 먹겠느냐? [[구사맹|구 지사]](具知事)에게나 갖다 드려라." >하였다. >이는 왕자 [[정원군]](定遠君)은 인빈의 소생이며, 지사 [[구사맹]](具思孟)의 [[인헌왕후|딸]]이 정원군의 부인이기 때문이다. 사맹이 좌석에 있다가 상이 오자 부끄러워서 얼굴을 숙이고 일어나지 못하였다. >---- >《운암잡록》 이러한 기록과 달리 [[인조]] 대에 제작한 인빈 김씨의 묘지 신도비의 비문을 읽어보면 [[요조숙녀]]의 화신이다. --그야 신도비는 찬양이 목적이니까-- === 세자 책봉 === 인빈 김씨의 장남 [[의안군]]은 요절했고, 둘째로 태어났지만 사실상 장남으로 자라난 [[신성군]]은 무반 명가 [[평산 신씨]]의 일원이자 조선 최고의 맹장으로 이름 높았던 [[신립]]의 딸과 혼인했고, [[정원군]] 역시 서인 명문가이자 [[평산 신씨]]와 쌍벽을 이루는 [[능성 구씨]] 집안과 혼인하여 뒷배경이 든든했다.[* 이러한 [[결혼|혼인]]은 모두 [[선조(조선)|선조]]의 결정이었다. 김씨가 아무리 총애를 받더라도 [[조선/왕실|왕실]]의 간택 절차에 이래라 저래라 하기는 힘들었을 터이다. 이 [[결혼|혼인]]관계 덕분에 [[정원군]]의 맏아들 [[인조]]는 구굉과 신경진이라는 [[인조반정]] 핵심공신과 연을 확실하게 맺을 수 있었다.][* 또한 [[정원군]]의 장모, 그러니까 [[인헌왕후|연주군부인 구씨]]의 어머니는 [[신립]] 장군의 여동생이다. [[인헌왕후|인헌왕후 구씨]]의 아버지 [[구사맹]]이 [[신립]]의 여동생과 [[결혼]]한 것인데 이렇게되면 [[신성군]] 부인과 [[인헌왕후]]는 외사촌이 되는 셈이다. 동복형제인 [[정원군]]과 [[신성군]]은 형제인 동시에 사돈도 되는 것이다.] 당시 [[선조(조선)|선조]]는 적자(嫡子)가 없었으므로 세자 책봉을 두고 물밑에서 암투가 많았다. 그녀가 낳은 자식들의 혼맥을 보면 [[임해군]]이나 [[광해군]]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적어도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전까지 [[왕세자|세자]]로 유력했던 왕자는 [[신성군]]이었다. 그런데 [[1591년]](선조 24년) 이른바 세자 건저 사건이 터진다. [[연려실기술]]에 따르면 이렇다. [[서인]]이었던 [[정철]]이 [[동인(조선)|동인]]의 좌의정 [[이산해]], 우의정 [[류성룡]] 등과 상의하여 [[왕자]] 가운데 한 사람을 [[왕세자|세자]] 책봉할 것을 [[선조(조선)|선조]]에게 건의하기로 한다. 그런데 [[기축옥사]]로 원한과 앙금이 많이 남아있었던 [[이산해]]는 마음을 바꿔 인빈의 오빠 김공량과 결탁한다. 이들은 김씨에게 "[[정철]]이 신성군 모자를 죽이고 [[광해군]]을 [[왕세자|세자]]로 세우려 한다"고 무고한다. 그녀는 이 말을 [[선조(조선)|선조]]에게 전했고, 이 상황을 아무 것도 모르는 [[정철]]이 [[선조(조선)|선조]] 앞에서 그 세자 책봉을 이야기하는 바람에 [[관동]]으로 유배형에 처해진다.[* 《연려실기술》 제14권, 선조조 고사본말. [[http://db.itkc.or.kr/inLink?DCI=ITKC_BT_1300A_0150_010_0030_2000_003_XML|#]] ] 이로 인해 선조는 광해군에 대해 안 좋게 생각하게 되었고, 인빈 김씨 쪽과 광해군 쪽의 사이가 멀어졌다고 한다. 하지만 [[임진왜란|전쟁]]이 발발하면서 [[광해군]]이 피난 중에 급히 임시로 [[왕세자|세자]]가 되고, [[신성군]]은 [[1592년]](선조 25년) [[11월 5일]] 피난 중에 요절한다.[* [[선조수정실록]] 26권, 선조 25년(1592년) 11월 1일 정사 3번째기사. [[http://sillok.history.go.kr/id/knb_12511001_003|#]] ][* 피란중에 [[신성군]]이 후사를 보았으나 아들이 아닌 딸이었다] 이렇게 총애하던 [[후궁]]의 자식인 [[의안군]]과 [[신성군]]은 불행히 세상을 떠났고, [[정원군]]은 어려서부터 문제가 많은 인물인데다 [[임진왜란|전]][[정유재란|쟁]] 중에 '''[[분조]](分朝)'''[* 임진왜란 때, 조정을 갈라 의주의 행궁을 '원조정'(대조)이라 하고 세자가 있는 곳을 '분조'(소조)라고 불렀다.]를 성공적으로 이끈 [[광해군]]의 자리는 그 누가 감히 흔들 수 없었을 것이다. 이때부터 김씨는 정치적 노선을 변경하고 [[광해군]]을 위해 적극적으로 나섰다. 나중에 [[광해군]]조차 "내가 지금 [[조선/왕사|자리]]에 있게 된 데는 [[인빈 김씨|서모]](庶母)의 공이 컸다"고 말할 정도였다. 또한 자기 관리에 더욱 신경썼다. [[인목왕후]]가 새 왕비로 들어오는 날에 다른 후궁들은 --어린 왕비를 상전으로 모시게 되었으니-- 좋아하지 않는 기색이었는데, 오로지 인빈 김씨만이 얼굴빛이 태연했고 특별히 기쁜 일이 있는 것처럼 행동했다고 한다.[* 《[[연려실기술]]》 제22권, 원종 고사본말. [[http://db.itkc.or.kr/inLink?DCI=ITKC_BT_1300A_0230_010_0020_2000_005_XML|#]] ] 뿐만 아니라 여러 자식이 있었지만, '어머니'라고 부르면 몸가짐을 조심하면서 "[[왕비]]에게 자식이 없고 내게 자식이 있는 것은 내 배를 빌려서 낳았을 뿐이니 어찌 어머니가 되겠는가" 하고 자식에게조차 '너'라고 부르지 않았다.[* [[후궁]]은 왕자녀(왕자녀는 태어나는 순간부터 품계가 없는, 품계를 초월한 초월적 신분이다.)보다 품계가 낮으니 하대를 할 수 없으며, 원칙적으로 [[후궁]] 소생 자녀의 어머니는 중전인 [[왕비]]이다. [[덕혜옹주]]도 외가를 말할 때 생모인 [[귀인 양씨]]가 아닌 [[명성황후]]의 [[여흥 민씨|외가]]를 말했다.] === 사후 === 인빈 김씨의 뛰어난 자기관리(?) 덕택에 즉위 이후 [[광해군]]의 보복은 없었다. 오히려 [[정원군]]과 [[의창군(1589)|의창군]]은 공신까지 될 수 있었고, [[정원군]] 또한 [[광해군]]의 [[존호]]를 올리자고 계청을 올리는 등 부단한 노력을 기울였다. 훗날 [[소현세자]]가 되는 증손주의 탄생까지 지켜보았는데, [[1613년]](광해 5년) [[10월 29일]] 인빈 김씨는 세상을 떠났다. [[광해군일기|실록]]에 실린 졸기는 다음과 같다. >[[선조(조선)|선조]](宣祖)의 [[후궁]]인 [[인빈 김씨]](仁嬪金氏)가 졸(卒)하였다. 빈은 [[의안군]](義安君)·[[신성군]](信城君)·[[정원군|원종 대왕]](元宗大王)·[[의창군(1589)|의창군]](義昌君) 등 네 군(君)과 다섯 옹주(翁主)를 낳았는데, 술수(術修)가 있어 미봉(美奉)을 잘하였다. 그 아우인 김공량(金公諒)이 천한 관리로서 [[이산해]](李山海) 부자와 서로 결탁하였는데, [[이산해]]가 드디어 유언비어로서 궁궐과 내통하여 대신을 참소해 떠나게 하였다. 이때부터 빈이 정사에 간여한다는 비난을 받았고 [[이산해]]도 역시 사론(士論)에 버림을 받았다. [[광해군|왕]]의 어머니인 [[공빈 김씨|공빈]](恭嬪)이 본래 인빈과 틈이 있었는데, [[공빈 김씨|공빈]]이 산병(産病)으로 죽자 인빈이 그 대신이 되었다. 왕의 [[임해군|형]][[광해군|제]]에 대한 총애는 드디어 줄어들었고 [[이산해|산해]]가 대신을 참소한 것은 이 기회를 틈탄 것이었다. 왕의 형제가 이 때문에 인빈을 매우 원망했으며, 인빈의 집안 사람들도 역시 인빈을 위해 그를 위태롭게 여겼다. [[광해군|왕]]이 [[경복궁 자선당|동궁]]에 있을 때 자주 [[선조(조선)|선조]]의 뜻을 잃자, [[인순왕후|대비]] 이하 여러 [[후궁]]들이 [[광해군|동궁]]을 대할 때 불경한 경우가 많았다. 그러나 빈만은 유독 [[광해군|동궁]]을 후하게 섬겨서 바라는 바를 모두 은밀히 상에게 아뢰어 이루어 주었다. [[유영경]]이 [[정인홍]]을 공격[* [[유영경]]은 선조가 총애하는 영창대군을 지지하는 소북파, [[정인홍]]은 광해군이 세자시절 분조를 이끌 때부터 지지하는 대북파이다. 그래서 [[영창대군]]이 태어난 이후부터 [[북인]]의 지지층이 서로 갈라져 결국에는 [[선조(조선)|선조]]가 죽기 전까지도 영창대군이 [[조선/왕사|왕]]으로 만들기 위해서 [[유영경]]은 [[선조(조선)|선조]]의 유언을 감출려고 [[역모]]에 준하는 수준까지 이르렀다.]할 때 [[선조(조선)|선조]]가 한창 [[광해군|동궁]]에게 노여움을 가졌으나, 빈이 변명을 하여 풀어졌다. [[광해군|왕]]이 즉위한 뒤 [[임해군]]의 옥사가 일어나자 빈이 궁중에서 힘을 썼기 때문에, [[정원군|원종 대왕]]과 [[의창군(1589)|의창군]]이 모두 정사 공신(定社功臣)에 참여할 수 있었다. [[광해군|왕]]이 일찍이 말하기를 '''"내가 [[인빈 김씨|서모]](庶母)의 은혜를 받아서 [[조선/왕사|오늘]]이 있게 된 것이니, 그 의리를 감히 잊지 못한다."''' 하였다. 이 때문에 빈(인빈)이 죽을 때까지 [[정원군|원종 대왕]] 형제들이 모두 탈이 없었다. > >---- >《광해군일기》 광해군 5년(1613년, 계해) 10월 29일 [[광해군]]은 "매우 놀랍고 애통스럽다"면서 "조시(朝侍)를 3일간 중지하라"고 명령하였으나, [[사헌부]]가 "법과 예에 근거가 없다"고 주장하자 이를 물렸다. 그녀의 죽음은 불행한 일이었다. [[정원군]]을 비롯한 그녀의 자손들에게 광해군의 [[편집증]]적인 성격과 [[조선/왕사|왕위]]에 대한 불안감이 점차 작용하기 시작했다. [[1615년]](광해 7년) [[정원군]]의 3남 [[능창군]][* 훗날 [[인조반정|쿠데타]]로 [[조선/왕사|왕]]이 되는 [[인조]]의 친동생이다.]을 [[조선/왕사|왕]]으로 추대하려는 [[역모]]가 있었다는 고변이 있었다. [[능창군]]은 16세의 어린 나이에 [[강화도]]로 [[유배]]를 떠나야 했고 [[자살]]을 선택했다. 이 소식을 들은 [[정원군]]은 [[술]]로 매일 세월을 보내다 [[화병|홧병]]으로 죽었다. 이후 백부 [[광해군]] 때문에 [[정원군|아버지]]와 [[능창군|동생]]을 잃은 [[정원군]]의 장남 [[인조|능양군]]이 직접 [[인조반정]]을 일으킨다. 그래서 [[인조]]부터 [[순종(대한제국)|순종]]까지 모두 그녀의 직계 후손들이고, 후대 왕들은 인빈에 대한 예우와 제사를 절대 잊지 않았다. 묘소는 [[경기도]] [[남양주시]] [[진접읍]] 내각리에 위치해 있다. 그녀의 묘역을 '''순강원(順康園)'''이라고 한다. 내부에는 [[선조(조선)|선조]]와의 사이에서 낳은 아들 [[의창군(1589)|의창군]] 부부의 묘역도 함께 있다. 다만 문화재 보호 차원 및 내부 묘역 정비 중이라 관람이 제한되어 있어서 순강원을 답사하려면 인근에 있는 [[세조(조선)|세조]]의 [[광릉]]을 관리하는 [[문화재청]] 소속 궁능유적본부 조선왕릉동부지구관리소([[광릉]])의 사전 승인을 받아야 답사할 수 있다. 신주는 [[칠궁]]의 하나인 저경궁(儲慶宮)에 모셔져 있다. == 가계 == * 증조부: 생원 증 좌찬성 김귀영(金貴榮) * 증조모: 증 정경부인 양성 이씨 * 조부: 만호 증 우의정 김순은(金順銀) * 조모: 증 정경부인 고령 박씨 * 부친: 감찰 증 영의정 김한우(金漢祐) * 모친: 증 정경부인 전주 이씨 * '''본인: 경혜인빈 김씨''' * 1남: [[의안군|의안군 이성]] * 2남: [[신성군|신성군 이후]] * 며느리: 군부인 신씨[* [[신립]]의 딸. ] * '''3남: [[정원군|원종 대왕 이부]]''' * 며느리: [[인헌왕후|인헌왕후 구씨]] * '''손자: [[인조|인조 이종]]''' * 손자: [[능원대군|능원대군 이보]] * 손자: [[능창대군|능창대군 이전]] * 1녀: [[정신옹주]] * 사위: 달성위 서경주(徐景霌) * 2녀: [[정혜옹주]] * 사위: 해숭위 윤신지(尹新之)[* [[윤두수]]의 손자로 혼인하여 두 아들을 낳는다. 장남 윤지(尹墀)의 딸은 김만기와 [[김만중]]을 낳았으며, 김만기의 딸은 [[숙종(조선)|숙종]]의 첫 왕비 [[인경왕후]]가 된다. ] * 3녀: [[정숙옹주]] * 사위: 동양위 신익성(申翊聖) * 4남: [[의창군(1589)|의창군 이광]] * 며느리: 군부인 허씨 * 4녀: [[정안옹주]] * 사위: 금양위 박미(朴瀰)[* 정안옹주의 시아버지 박동량(朴東亮)은 [[선조(조선)|선조]]의 왕비인 [[의인왕후]]의 사촌동생이다. ] * 5녀: [[정휘옹주]] * 사위: 전창군 류정량(柳廷亮) * '''남동생: 내수사 별좌 김공량(金公諒)''' == 대중매체 == === 드라마 === * 1983년 [[MBC]] 드라마 《[[조선왕조 오백년]]》에서는 배우 [[엄유신]]이 연기했다. * 1999년 [[MBC]] 드라마 《[[허준(드라마)|허준]]》에서는 배우 [[장서희]]가 연기했다. || [[파일:왕의여자_인빈김씨.jpg|width=100%]] || || 《왕의 여자》의 인빈 김씨 || * 2003년 [[SBS]] 드라마 《[[왕의 여자]]》에서는 배우 [[이혜숙]]이 연기했다. 작중에서 인빈 김씨를 저지하기 위해서 [[의인왕후]]([[이효춘]] 분)가 [[김개시]]([[박선영(1976)|박선영]] 분)를 [[선조(조선)|선조]]([[임동진]] 분)의 후궁으로 만든 것으로 묘사된다. [[임해군]]([[김유석]] 분)이 자신의 오빠 김공량을 매질한 일 때문에 철천지원수가 되었으며 "[[임해군]]이 [[왕세자|세자]]가 되면 자신과 [[신성군]]은 죽는다"며 선조 앞에서 눈물을 쏟는다. 결국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신성군을 지키기 위해 [[의인왕후]]를 따라 [[광해군]]([[지성(배우)|지성]] 분)을 세자로 추천하는데 사실 [[광해군]]의 세자 책봉이 [[명나라]]의 승인을 받지 못한걸 이용할 생각이었다. [[의인왕후]]의 사후에는 "김개시가 [[후궁]]의 첩지를 받으면 후궁들의 체면이 뭐가 되느냐"며 다른 후궁들을 주도해 선조에게 항의하고 "차라리 새 중전을 맞으라"며 은근히 종용한다. 어린 중전을 세워 꼭두각시처럼 이용할 속셈이었지만 [[인목왕후]]([[홍수현]] 분)가 호락호락하지 않아서 중전 간택을 밀어붙인걸 후회하기도 한다. 김개시 때문에 광해군과의 사이는 썩 좋지 않지만 중풍으로 쓰러진 선조가 왕위를 [[영창대군]]에게 주려고 하자 광해군이 왕위를 잇도록 설득한다.[* 이 때 인빈 김씨는 머리를 굴려 어린 [[영창대군]]을 지지했다가 [[임해군]]의 손에 죽을 수도 있다는 생각을 했고 빈궁([[사강]] 분)이 자신에게 깍듯하게 대접한다는 점을 고려해 선조를 설득한다.] 광해군 즉위 이후에는 작중에서 퇴장한다. * 2013년 [[MBC]] 드라마 《[[구암 허준]]》에서는 배우 [[정시아]]가 연기했다. * 2013년 [[MBC]] 드라마 《[[불의 여신 정이]]》에서는 배우 [[한고은]]이 연기했다. * 2014년 [[KBS]] 드라마 《[[왕의 얼굴]]》에서는 배우 [[김규리(1979년 10월)|김규리]]가 연기했다. * 2015년 [[KBS]] 드라마 《[[징비록(드라마)|징비록]]》에서는 배우 [[김혜은]]이 연기했다. === 소설 === * [[이은성]]의 소설 <동의보감>에서 병에 걸린 [[의안군]]을 허준이 진료할 때 잠시 등장하는데 [[공빈 김씨]]와는 달리 비중은 없다. 공빈 김씨의 빈 자리를 메웠던 만큼 아름답고 품위있는 인물로 묘사되며 아픈 의안군의 병세를 [[허준]]이 감추자 '주상께는 아룄을 것도 같건만...'이라며 답답해한다. * 김덕호의 <조선제국 일본정벌기>[* 훈련 중에 고대 유물의 힘으로 [[임진왜란]] 시대로 건너온 [[대한민국 해병대]]가 [[조선]]의 실권을 잡고 임진왜란을 막은 뒤 [[일본]]을 정복한다는 내용의 판타지 소설이다.]에서는 '임빈'으로 잘못 표기되었으며 조정의 반동 세력과 결탁했다가 [[주인공]] 측에게 즉결 총살당한다. * [[슈타인호프(작가)|임영대]]의 대체역사소설 <[[이순신의 나라]]>에서는 직접 등장하지는 않으나 후반에 관군의 요청으로 파견된 [[여진족]]의 배신으로 [[정원군]] 부자를 제외한 왕실 직계가 몰살당한 후 이름만 언급되며 정원군이 모셔가지 않았을까 추정만 할 뿐 생사 여부가 밝혀지지 않았다. * [[네이버]] 웹소설 <[[광해의 연인]]>에서는 초반에 여주인공 경민을 괴롭히고 남주인공 [[광해군]]을 눈엣가시로 여기는 [[빌런]]으로 나온다. 신판에서는 대비의 명으로 [[선조(조선)|선조]]의 [[후궁]]이 되었으며 공빈 김씨와 달리 후궁 생활에 적응하고 암투를 즐겼다고 한다. 경민이 광해군의 아이를 임신하자 이를 빌미로 광해군을 끌어내리고 정원군을 세자 자리에 올리려 하지만 오히려 정원군은 죄를 뒤집어쓰고 [[제주도]]로 귀양가게 된다. 선조가 승하하고 광해군이 즉위하자 공기화. == 참고 문서 == * [[공빈 김씨]] * [[구사맹]] * [[광해군]] * [[광해군일기]] * [[류성룡]] * [[선조(조선)|선조]] * [[선조실록]] * [[선조수정실록]] * [[승정원일기]] * [[신립]] * [[신성군]] * [[윤두수]] * [[의인왕후]] * [[의창군(1589)|의창군]] * [[이산해]] * [[인목왕후]] * [[인순왕후]] * [[인조]] * [[인조실록]] * [[인헌왕후]] * [[임해군]] * [[정원군]] * [[정철]] * [[칠궁]] [각주][include(틀:표절, version=152~160, source=위키백과)] [[분류:조선의 후궁]][[분류:1555년 출생]][[분류:1613년 사망]][[분류:수원 김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