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clude(틀:운대 28장)] [include(틀:후한서)] 任光 (? ~ 29) [목차] == 개요 == 양한교체기의 인물로, 자는 백경(伯卿). 형주 남양군(南陽郡) 완현(宛縣) 사람이다. [[운대 28장]] 중 한명으로 서열 24위에 속한다. == 생애 == 어릴 적부터 충직하고 정이 두터워 마을 사람들로부터 사랑을 받았고, 성년이 되어서는 [[신나라]] 시절 군현의 말단 관리인 향식부(鄉嗇夫)에 임명되었다. [[경시제]] 유현(劉玄)의 병사들이 완현에 이르러 임광의 관복을 보고는 탐이 나 그에게 당장 옷을 벗어서 내놓으라 협박하였다. 임광이 이에 불응하자 병사들은 그를 죽여서라도 강탈하려 들었는데, 이 광경을 지켜보던 [[현한]]의 광록훈 유사(劉賜)는 임광에게 장자(長子)의 용모가 있음을 알아보고 병사들을 물러가게 하여 그를 구원해주었다. 임광은 자신을 따르는 무리들을 거느리고 생명의 은인인 유사의 밑으로 들어가 안집연(安集掾)이 되었다. 이후 편장군에 임명되어 대사마 [[광무제|유수]]의 영천군 정벌에 종군하였으며, [[곤양대전]]에서 유수의 지휘를 받아 신나라 군대를 격파하였다. 그 공으로 임광은 신도태수에 임명되었다. 경시제가 유연(劉縯) 형제를 의심해 유연을 주살하고 그 동생인 유수를 하북 원정에 보냈다. 그리고 얼마 뒤, 한단(邯鄲)에서 왕랑이 거병하여 유수의 목에 거액의 현상금을 걸고 하북의 여러 군현에 격문을 돌렸다. 대부분의 군현들이 투항하여 왕랑을 따랐으나, 임광은 굴복하지 않고 도위 이충(李忠), 신도령 만수(萬脩), 공조 완황(阮況), 오관연 곽당(郭唐) 등과 한마음으로 꿋꿋이 신도(信都)를 지켰다. 신도군 산하 현인 부유현(扶柳縣)에서 어떤 관리가 왕랑의 격문에 호응해 사람들을 선동하자, 임광은 그를 붙잡아 저잣거리에서 참수하여 백성들을 진정시키고 정예병 4천여 명을 뽑아 성의 방어를 더욱 철저히 하였다. 경시 2년(24년) 봄, 계(薊)에 있던 유수 일행은 왕랑의 군사를 피해 남쪽으로 이동하다가 하박성(下博城) 세 갈래길에서 어디로 향해야 할지 몰라 우왕좌왕하였다. 이때, 새하얀 옷을 입은 한 노인이 유수 일행에게 신도로 가는 길을 알려주고 신도태수 임광이 충성을 다해 지키고 있다 일렀다. 유수 일행은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노인의 말을 믿고 신도로 향하니, 과연 사전에 유수가 온다는 정보를 입수한 임광이 성 밖까지 마중 나와 유수를 영접하였다. 신도의 관리와 백성들은 모두 만세를 불렀고 만수 등이 관속들과 함께 나와 유수를 맞이하였다. 유수가 전사(傳舍)에 들어가 휴식을 취할 때, 임광에게 성두자로(城頭子路), 역자도(力子都)와 힘을 합치는 것이 어떻겠냐고 물었지만 임광이 불가하다 하였다.[* 성두자로와 역자도는 모두 신나라 시절 일어난 도적떼로, 그 두목들은 경시제로부터 관직은 받았으나 통제를 따르지 않고 이전처럼 근방을 도적질하고 다녔다. 참고로 두 세력 모두 무리가 십만이 넘었을 정도로 세력이 거대했다고 하나, 성도자로는 자기들끼리 내분을 일으키다 해체되었고, 역자도는 단향적(檀鄉)으로 이름을 바꿔서 활동하다 대사마 오한(吳漢)에게 궤멸당한다.] 유수가 그럼 병력이 적은데 어찌하겠느냐 다시 묻자, 임광이 대답했다. > "일단 명령을 내려서 군사를 조금이라도 더 모은 다음 인근 현들을 차근차근 공략하십시오. 먼저 항복을 권하고 투항하지 않는 현은 함락한 뒤에 병사들로 하여금 약탈하게 하면 됩니다. 사람은 본래 재물을 탐내기 마련이라 이렇게 한다면 사병들이 많이 모일 것입니다." 임광의 계책을 따르기로 결정한 유수는 종광(宗廣)을 신도에 남겨 신도태수의 업무를 잠시 대행하게 하였다. 비슷한 시기에 화성(和成)의 태수 비동(邳彤)도 항복해오니, 유수는 임광을 좌대장군, 이충을 우대장군, 비동을 후대장군으로 임명하고 셋을 전부 열후에 봉하면서 군사를 조금이라도 더 모으게 하였다. 임광은 군사를 징집한 후 주변 현들에 격문을 뿌렸다. > 대사마 유공(劉公)이 친히 성두자로와 역자도의 무리 백만을 거느리고 동쪽에서 와 반란자들을 토벌하노라. 기병들은 거록(鉅鹿)까지 임광의 격문을 퍼뜨리고 돌아오니, 격문의 내용은 순식간에 전파되었다. 한 가지 묘안을 떠올린 유수는 임광과 상의한 뒤, 밤을 틈타 당양(堂陽)까지 진군했다. 임광이 기병들에게 각자 횃불을 들게 하여 연못 너머를 가득하게 메우니 불빛이 온 천지를 밝혔다. 당양의 사람들은 격문의 내용처럼 백만 대군이 집결한 줄로 알고 놀라 항복하였다. 유수에게 백만 대군이 있다는 헛소문은 10여 일만에 널리 퍼져 투항해오는 거록의 군현들이 나날이 늘었고, 덕분에 유수는 별다른 전투 없이 세력을 크게 확장시킬 수 있었다. 병력이 어느덧 많이 모이자 유수는 왕랑의 근거지인 한단으로 진격했다. 가는 길에 상곡(上谷)과 어양(漁陽)에서 보내온 구원병과도 합류하여 사기가 드높았다. 왕랑은 두려워 자신의 별장(別將)을 보내 지름길로 나아가 신도를 습격하게 하여 종광을 사로잡고 이충, 비동의 가족들을 인질로 삼았다. 이충과 비동의 충심은 근심할 바가 아니었으나, 문제는 임광이 거느리던 부대원 중 대다수가 신도 출신이라 군심이 크게 흔들렸다. 유수는 하는 수 없이 임광의 부대만 따로 빼 신도를 탈환하도록 하였지만, 병사들의 동요는 멈추지 않아 많은 이들이 탈영해 왕랑에게 투항하니 임광은 군영을 버리고 유수의 진영으로 도망쳤다. 때마침 경시제가 유수를 돕기 위해 파견한 장수가 신도를 탈환하면서 이충과 비동의 가족들은 구원되었다. 이후 왕랑을 주살하고 무사히 한단을 손에 넣은 유수는 임광을 다시 신도로 돌려보냈다. 건무 2년(26년), 아릉후(阿陵侯)로 개봉되었고 식읍이 1만 호에 달하였다. 건무 5년(29년), 봉조청(奉朝請)에 임명되었으나, 그 해 겨울에 사망하였다. 그 뒤를 이은 아들 임외(任隗)는 훗날 승진을 거듭하다가 [[장제(후한)|장제]] 대에 구경(九卿) 중 하나인 [[태복]]에까지 올랐다. [[분류:후한의 인물]][[분류:한나라의 공신]][[분류:29년 사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