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clude(틀:대한제국의 매국노)] [include(틀:조선귀족)] [include(틀:조선총독부 중추원)] ||<-2> [[조선귀족|'''{{{#fff 조선귀족 자작}}}''']] || ||<-2>
'''{{{#eccd7a [[조선총독부 중추원|{{{#eccd7a 조선총독부 중추원 고문}}}]][br]{{{+1 임선준}}}[br]任善準 | Yim Sun-joon }}}''' || ||<-2> {{{#!wiki style="margin: -6px -10px" [[파일:Lim_Sun-jun.jpg|width=100%]]}}} || || '''이름''' ||임선준(任善準) || || '''자''' ||치경(穉慶) || || '''호''' ||산남(山南), 춘관(春觀) || || '''본관''' ||[[풍천 임씨]][* 죽애공파(竹崖公派) 25세 준(準) 항렬.] || ||<|2> '''출생''' ||[[1860년]] ([[철종(조선)|철종]] 11) [[12월 17일]] || ||[[한성부]] (現 [[서울특별시]]) || ||<|2> '''사망''' ||[[1919년]] [[2월 12일]][* 풍천임씨세보 제3권 90쪽에는 1월 18일에 사망한 것으로 등재돼 있다.] (향년 58세) || ||[[경기도]] [[경성부]] || || '''묘소''' ||[[충청북도]] [[진천군]] 이월면 사당리[* [[풍천 임씨]] 집성촌이다. 임선준의 증조부 임로(任魯, 1755 ~ 1828. 8. 22)가 [[http://jincheon.grandculture.net/jincheon/toc/GC02700583|이 마을의 입향조이다]].] || || '''직업''' ||[[정치인]], 관료 || || '''국적''' ||[[일본 제국|[[파일:일본 국기.svg|width=25]]]] [[일제강점기]] 조선 || || '''작위''' ||[[조선귀족]] [[자작(작위)|자작]] || || '''약력''' ||[[내부|내부대신]], [[탁지부|탁지부대신]][br][[조선귀족]] 자작, [[조선총독부 중추원]] 고문 || || '''비고''' ||'''[[정미칠적]]'''[br][[친일인명사전]] 등재 || [목차] [clearfix] == 개요 == || {{{#!wiki style="margin: -6px -10px" [[파일:e2b9c4c1-cef1-4b6b-a406-3d6b004c4328.jpg|width=100%]]}}} || || [[1909년]], [[순종(대한제국)|순종]]이 순행을 마치고 돌아와 [[창덕궁]] [[창덕궁 인정전|인정전]] 앞에서 친일 관료들과 기념촬영한 사진.[br]중앙에는 순종이 앉아있고 그 오른쪽에는 [[이재각]], [[민병석(1858)|민병석]], [[조중응]], [[김윤식(조선)|김윤식]], [[이지용]], [[조민희(1859)|조민희]], 고희성이 서 있으며 어진 뒤에는 [[이병무]], [[윤덕영]]이 서 있다.[br]순종황제의 왼쪽에는 [[이토 히로부미]], [[이완용]], [[임선준]], [[고영희]], [[송병준]], [[박제순]]이 서 있다. || [[조선]]과 [[대한제국]]의 [[정치가]]이자 [[친일반민족행위자]]. 1907년 [[정미 7조약]]에 찬성해 [[정미칠적]]이 되었다. 1910년 [[경술국치]] 이후 「조선귀족령」에 따라 자작 작위를 받았으며 사망하기 전까지 중추원 고문을 지냈다. == 생애 == 1860년(철종 11) 12월 17일 한성부(現 서울특별시)에서 아버지 임백희(任百熙, 1829 ~ ?)와 어머니 [[연안 이씨]][* 이공우(李公愚)의 딸이다.] 사이의 2남 2녀 중 차남으로 태어났다. 생5대조부 임서(任遾, 1708 ~ 1764. 1. 24)[* 임선준의 고조부 임종주는 임서의 장남으로 태어났으나, 출생 이후 큰아버지 임손(任遜, 1705 ~ 1780. 12. 23)에 입양되었다.]는 1735년([[영조]] 11) 식년 [[생원|생원시]]에 3등 29위로 [[http://people.aks.ac.kr/front/dirSer/exm/exmView.aks?exmId=EXM_SA_6JOc_1735_150059|입격한 뒤]] 1763년(영조 39) 안산군수(安山郡守, 종4품)을 [[https://sjw.history.go.kr/id/SJW-F39070280-02100|역임했고]], 고조부 임종주(任宗周, 1734 ~ 1781. 7. 23)는 1772년(영조 48) 탕평정시(蕩平庭試)에 갑과 1위로 [[장원급제]][[http://people.aks.ac.kr/front/dirSer/exm/exmView.aks?exmId=EXM_MN_6JOc_1772_010248|한 뒤]] 1775년(영조 51) [[사간원]] 대사간(大司諫)을 [[https://sjw.history.go.kr/id/SJW-F51020280-01700|역임했다]]. 증조부 임로(任魯, 1755 ~ 1828. 8. 22)는 1806년([[순조]] 6) [[음서|음관]]으로 선공감 가감역관(繕工監假監役官, 종9품)에 [[https://sjw.history.go.kr/id/SJW-H07040030-02400|임명되면서]] 관직에 진출해 1817년(순조 17) 보은군수(종4품)에 [[https://sjw.history.go.kr/id/SJW-H17110260-01800|올랐으며]], 조부 임익상(任翼常, 1789 ~ 1866. 3. 12) 또한 1835년([[헌종(조선)|헌종]] 1) 음관으로 선공감 가감역관에 [[https://sjw.history.go.kr/id/SJW-I01050030-02000|임명되면서]] 관직에 진출해 1851년(철종 2) 통훈대부(通訓大夫) 안주목사(安州牧使, 정3품)에 [[https://sjw.history.go.kr/id/SJW-J02110140-01300|올랐다]]. 아버지 임백희는 1852년([[철종(조선)|철종]] 3) 식년 [[진사|진사시]]에 2등 20위로 [[http://people.aks.ac.kr/front/dirSer/exm/exmView.aks?exmId=EXM_SA_6JOc_1852_032684|입격했다]]. 임선준은 고향인 [[충청도]] [[진천군|진천현]](現 [[충청북도]] [[진천군]])으로 내려가 체류하던 중 1885년(고종 22) 정시(庭試) 문과에 병과 7위로 [[http://people.aks.ac.kr/front/dirSer/exm/exmView.aks?exmId=EXM_MN_6JOc_1885_014333|급제해]] 그해 4월 2일 [[승정원]] 가주서(假注書, 정7품)에 [[http://db.itkc.or.kr/inLink?DCI=ITKC_ST_Z0_A22_04A_02A_00050_2003_111_XML|임명되면서]] 관직 생활을 시작했다. 이후 1886년 12월 29일 승정원의 정식 주서(注書, 정7품)에 [[http://db.itkc.or.kr/inLink?DCI=ITKC_ST_Z0_A23_12A_29A_00500_2003_121_XML|임명되었고]], 1894년까지 [[성균관]] 전적(典籍, 정6품), [[사간원]] 헌납(獻納, 정5품), [[홍문관]] 부수찬(副修撰, 종6품), 서학 교수(西學敎授, 종6품), 부사과(副司果, 종6품), 홍문관 수찬(修撰, 정6품), 총어영 군사마(摠禦營軍司馬), 강동현감(江東縣監, 종6품), 부사직(副司直, 종5품), 세자시강원 사서(世子侍講院司書, 정6품), 홍문관 응교(應敎, 정4품), 세자시강원 필선(弼善, 정4품), 사복시 정(司僕寺正, 정3품), 통례원 상례(通禮院相禮, 종3품), 세자시강원 문학(文學, 정5품), 부호군(副護軍, 종4품), [[승정원]] 동부승지(同副承旨, 정3품)·우부승지(右副承旨, 정3품)·좌부승지(左副承旨, 정3품), 성균관 대사성(大司成, 정3품), [[호조(조선)|호조]] 참의(參議, 정3품), 돈녕부 도정(敦寧府都正, 정3품), [[병조]] 참지(參知, 정3품) 등의 관직을 두루 지냈다. [[갑오개혁]] 후 1895년 4월 7일 [[http://db.itkc.or.kr/inLink?DCI=ITKC_ST_Z0_A32_04A_07A_00040_2004_168_XML|제용원 주전사 장]](濟用院主殿司長), 1895년 6월 5일 [[http://db.itkc.or.kr/inLink?DCI=ITKC_ST_Z0_A32_06A_05A_00060_2004_168_XML|시종원 좌시종]](侍從院左侍從), 1903년 10월 7일 [[http://db.itkc.or.kr/inLink?DCI=ITKC_ST_Z0_A40_08A_17A_00130_2006_197_XML|중추원 의관]](中樞院議官)에 이어 1903년 11월 14일 비서원 승(祕書院丞) 겸(兼) 태의원 소경(太醫院少卿)에 [[http://db.itkc.or.kr/inLink?DCI=ITKC_ST_Z0_A40_09A_26A_00080_2006_197_XML|임명되었다]]. 1907년 1월 9일 성균관장(成均館長)에 [[http://db.itkc.or.kr/inLink?DCI=ITKC_ST_Z0_A43_11A_25A_00060_2006_209_XML|임명되었으며]], 1907년 5월 22일 학부 대신(學部大臣)이던 [[이완용]]이 [[의정부]] 참정대신(參政大臣)에 임명되면서 [[내각]]이 성립되자 내부대신으로 [[http://db.itkc.or.kr/inLink?DCI=ITKC_ST_Z0_A44_04A_11A_00030_2006_210_XML|입각하였고]] 대한의원장(大韓醫院長)을 [[http://db.itkc.or.kr/inLink?DCI=ITKC_ST_Z0_A44_04A_11A_00100_2006_210_XML|겸임했다]]. 1907년 5월 [[한국]] 시찰을 위해 방문하는 [[일본]] 황태자 [[다이쇼 덴노|요시히토]]를 환영하기 위해 전현직 대신과 관리들이 자발적으로 조직한 '신사회'의 평의원에 선출되어 환영 행사를 주관했으며 [[일본 정부]]가 주는 훈1등 욱일 대수장을 받았다. 1907년 6월 [[고종(대한제국)|고종]]은 [[을사조약]]이 무효라며 [[이준(열사)|이준]], [[이상설]], [[이위종]]을 [[헤이그 특사]]로 보내고 뜻을 전하려 하였지만 실패하고 이준이 죽자 일본의 압박으로 임선준이 내부대신에 올랐다. 1907년 7월 내부대신으로 고종의 강제 퇴위에 앞장섰으며 [[정미 7조약]](한일 신협약) 체결에 동조해 [[내각총리대신]] [[이완용]], [[학부|학부대신]] [[이재곤(1859)|이재곤]], [[탁지부|탁지대신]] [[고영희]], [[군부|군부대신]] [[이병무]], [[법부|법부대신]] [[조중응]], [[농상공부|농상공부대신]] [[송병준]]과 함께 [[정미칠적]]으로 지탄받았다. ||
{{{#!wiki style="margin: -6px -10px" [[파일:20190419_56_10157.png|width=100%]]}}} || || {{{#eccd7a '''1907년 영친왕과 대한제국 내각의 모습'''}}}[* 둘째 줄 왼쪽에서 첫번째 인물이 [[임선준]].][* 사진 속 임선준의 모습을 확대한 사진 [[:파일:임선준.jpg|#]]] || 1908년 5월 6일 탁지부 대신(度支部大臣)에 [[http://db.itkc.or.kr/inLink?DCI=ITKC_ST_ZA_A02_05A_08A_00030_2015_003_XML|임명되어]] 지방의 일본 소유로 된 군용지와 [[철도]] 용지 등을 [[면세]]했으며 [[의병]]에게 처단당한 인물의 친족에게 보상금을 지원했다. '대동학회'의 회원, '대한여자흥학회' 고문, '대한산림협회' 명예 회원, [[유교]] 진흥을 위해 세워진 '승종[[교회]]' 찬성장 등 [[친일]] 단체에서 활동하였다. 1910년 8월 6일 [[http://db.itkc.or.kr/inLink?DCI=ITKC_ST_ZA_A04_07A_02A_00030_2015_006_XML|중추원 고문]](中樞院顧問)에 임명되었고, [[경술국치]] 후 1910년 10월 1일 [[조선총독부]] 관제가 시행되면서 [[조선총독]]의 자문 기구인 [[조선총독부 중추원]]의 고문에 임명되어 10여 년 동안 매년 1600원의 수당을 받았으며 1910년 10월 7일 「[[조선귀족]]령」에 따라 [[자작(작위)|자작]] 작위를 받았다. 1911년 1월 은사 공채 5만원을 받았고 1911년 2월 조선총독 관저에서 열린 '작기본서 봉수식'에 의복을 갖추어 참석했으며 1911년 8월 29일 '병합 1주년'을 기념해 조선총독부 기관지인 《[[매일신보]]》에 '''빛나고 빛날지니! 아. 천년 만년이여'''라는 「합병 기념 축사」를 게재하여 [[일본 제국|일제]]의 조선 지배와 일본 [[천황]]을 찬양했다. 1912년 8월 '한국 병합 기념장'을 받았고 1912년 12월 종4위에 서위되었다. ||
{{{#!wiki style="margin: -6px -10px" [[파일:091654576000.jpg|width=100%]]}}} || || {{{#eccd7a '''1916년 8월 28일'''}}}[*출처 《이미지로 보는 한일병합사(映像が語る日韓併合史)》] || 1917년 5월 조선의 유력자인 [[귀족]]과 실업가 등이 발기하고 [[경성일보|경성일보사]]·[[매일신보|매일신보사]]가 주관한 '남북 [[만주]] 시찰단' 환영 원유회에 발기인으로 참여했다. 1917년 10월 일제의 협력과 지원하에 조직된 친일 [[불교]] 단체인 '불교옹호회'의 고문에 위촉되었다. 1918년 9월 '경성구제회'에 [[기부]]했고 죽기 전까지 떵떵거리며 살다가 1919년 2월 12일 [[사망]]했다. 사망 당일 특지로 정4위에 추서되었고, 작위는 외아들 임낙호(任洛鎬, 1896 ~ 1921. 9. 15)가 이어받았다. == 여담 == * 형 임대준(任大準, 1857 ~ 1903. 5. 5)[* 초명 임계준(任啓準).]의 차녀, 즉 조카딸 임건구(任乾九)는 [[이완용]]의 큰며느리로, 이완용의 장남 이승구(李升九, 1879 ~ 1905. 7)와 결혼했다. * 형 임대준 또한 1882년(고종 19) 증광 문과에 병과 30위로 [[http://people.aks.ac.kr/front/dirSer/exm/exmView.aks?exmId=EXM_MN_6JOc_1882_014237|급제한 뒤]] 1891년(고종 28) [[형조]] [[http://db.itkc.or.kr/inLink?DCI=ITKC_ST_Z0_A28_05A_03A_00270_2003_146_XML|참의]](參議, 정3품), 1893년(고종 30) [[http://db.itkc.or.kr/inLink?DCI=ITKC_ST_Z0_A30_09A_06A_00150_2004_160_XML|영변대도호부사]](寧邊大都護府使, 정3품) 등에 올랐다. * 외아들 임낙호(任洛鎬, 1896 ~ 1921. 9. 15)의 아내는 [[양주 조씨]]로, [[조선귀족]] [[자작(작위)|자작]] [[조민희(1859)|조민희]](趙民熙)의 딸이다. == 둘러 보기 == [include(틀:경술국치)] [include(틀:역대 대한제국 내부대신)] [include(틀:역대 대한제국 탁지부대신)] ---- * 관련 인물 * [[이완용]] * [[조중응]] * [[이재곤(1859)|이재곤]] * [[송병준]] * 관련 용어 * [[친일파]] * [[일본 제국]] * [[헤이그 특사]] * [[의병]] [각주][[분류:조선의 문관]][[분류:온건개화파]][[분류:대한제국의 인물]][[분류:정미칠적]][[분류:1860년 출생]][[분류:1919년 사망]][[분류:서울특별시 출신 인물]][[분류:풍천 임씨]][[분류:조선귀족 자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