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clude(틀:다른 뜻1, other1=임제종을 창시한 당나라의 승려, rd1=의현(승려))] ||<-2> {{{#!wiki style="margin: -4px -9px; padding: 5px 10px; background-image: linear-gradient(to right, #3A2646 0%, #4A2D5B 20%, #4A2D5B 80%, #3A2646); color: #fbe673" '''{{{임제}}}[br]{{{+1 林悌}}}'''}}} || ||<-2>{{{#!wiki style="margin: -4px -9px" [[파일:SE-7f7aad81-d676-48b2-b08e-ef0dd0db4060.jpg|width=380]]}}} || ||<-2> {{{#fbe673 {{{-2 임제 상상화}}} }}} || ||<|2> '''출생''' ||[[1549년]] [[12월 8일]] [br] {{{-2 ([[명종(조선)|명종]] 4년)}}} || ||[[조선]] [[전라도]] 나주목 회진리[br]{{{-2 (現[[전라남도]] [[나주시]] 다시면 회진리))}}} || ||<|2> '''사망''' ||[[1587년]] [[9월 13일]] [br]{{{-2 ([[선조(조선)|선조]] 20년)}}} || ||[[조선]] [[전라도]] 나주목 회진리 [br] {{{-2 (現 [[전라남도]] [[나주시]] 다시면 회진리)}}} || || '''본관''' ||나주 임씨 || || '''자''' ||자순(子順) || || '''호''' ||백호(白湖)/겸재(謙齋)/풍강(楓江)/소치(嘯痴)/벽산(碧山) || || '''능묘''' ||[[전라남도]] [[나주시]] 다시면 가운리 142 -2 번지 || || '''기념관''' ||[[전라남도]] [[나주시]] 다시면 회진길 8 [[https://www.naju.go.kr/baekhomoonhak|백호 문학관]] || [목차] [clearfix] == 개요 == [[조선]] 중기의 [[문인]]. 본관은 [[나주 임씨|나주]](羅州), 자는 자순(子順), 호는 백호(白湖)·겸재(謙齋)·풍강(楓江), 소치(嘯痴)·벽산(碧山)이다. == 생애 == 1549년 12월 8일 [[전라도]] 나주목 회진리(현 [[전라남도]] [[나주시]] 다시면 회진리)[* 현재도 [[나주 임씨]] 집성촌이다. [[임채정]] 전 국회의장과 [[임인채]] 전 국회의원도 이 마을 출신이다.][[https://www.yeongnam.com/web/view.php?key=20160421.010220805400001|#]]에서 5도 병마절도사를 지낸 아버지 임진(林晉)과 어머니 [[윤(성씨)|남원 윤씨]] 윤개(尹塏)의 딸 사이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아래로 임선(林愃)·임순(林恂)·임환(林懽)·임탁(林㤞) 등 남동생이 4명 있었고 여동생이 2명 있었다. 임제는 어려서부터 지나치게 자유분방해 스승이 없었는데, 1570년 그가 [[충청도]]를 거쳐 [[서울]]로 가는 길에 쓴 시가 성운(成運)에게 전해진 것이 계기가 되어 20세가 넘어선 나이에야 그를 스승으로 모시게 되었다고 한다. 이후 어머니를 여의고 글공부에 정진하였으나, 과거에 번번히 떨어졌다. 그러나 계속 학업에 정진하여 [[중용]]을 800번이나 읽은 일화가 유명하다고 한다. 1576년([[선조(조선)|선조]] 9) 28세의 나이로 식년시 생원시와 진사시 양시에 각각 2등 5위와 1등 4위로 합격하였으며[[http://people.aks.ac.kr/front/dirSer/exm/exmView.aks?exmId=EXM_SA_6JOb_1576_005952|#]][[http://people.aks.ac.kr/front/dirSer/exm/exmView.aks?exmId=EXM_SA_6JOb_1576_006046|@]], 이듬해인 1577년에 알성시 문과에 을과 1위로 급제하여[[http://people.aks.ac.kr/front/dirSer/exm/exmView.aks?exmId=EXM_MN_6JOb_1577_003954|#]] 흥양현감(興陽縣監), 서북도 병마평사(西北道兵馬評事), 관서도사(關西都事), 예조정랑(禮曹正郞), 홍문관 지제교(弘文館知製敎)를 지냈다. 그러나 본인의 호방한 성격, 동서의 붕당의 분쟁등으로 현실 정치에 개탄하고 명산을 찾아다니면서 시를 짓고 유람을 하다가 [[1587]]년 39세의 나이로 고향인 [[나주|회진리]]에서 여생을 마쳤다. == 성격 == > 四海諸國未有能稱帝者獨載邦終古不能 > 生於若此 陋邦 其死何足借命 勿哭 > >사해의 여러 나라들이 황제를 일컬어 보지 않은 나라 없거늘 >우리나라만 예로부터 그래보지 못했다. >이와 같은 나라에 태어났거늘 그 죽는 것을 어찌 애석해할 것 있느냐 >곡을 하지말라 > > >----- > 白湖林悌 臨終 誡子 勿哭辭(백호임제 임종 계자 물곡사) 당대의 명문장가로 이름이 높았으며, 호방한 성격에 시, 술, 검과 퉁소[* 그가 평소에 패용했던 검과 퉁소를 그의 고향마을에 위치한 백호 문학관에서 볼 수 있다. 그리고 문학관 근처에 [[나주 임씨]] 대종가가 있다.]를 좋아했다고 한다. 또한 평소 [[사대주의]]에 매우 회의적이었던 인물로 보인다. 이는 그가 죽기 직전 남긴 임종시인 물곡사(勿哭詞)에 잘 나타나있다. == 일화 == >靑草 우거진 골에 자느냐 누웠느냐 >紅顔을 어디두고 白骨만 묻혔느냐 >盞 잡아 勸할 이 없으니 그것을 슬퍼하노라 유명한 [[기녀]]였던 [[황진이]]가 인생 사십에 병에 걸려 쓸쓸한 산기슭에 묻히느니 사람들 왕래가 빈번한 대로변에 묻어 주기를 유언하여 송도(松都) 대로변에 묻혔는데, 황진이의 기(氣)와 예(藝)를 높이 평가했던 임제는 그녀가 살았을 때 고대했던 만남을 바랬지만 뜻을 이루지 못함을 아쉬워하며, 기예(氣藝)가 일찍 저버림을 탄식하였고, 황진이의 무덤 앞에 넋을 달래며 제문을 짓고 제를 지냈다. 이후 조정에서 사대부가 [[기생]]에게 술을 올리고 그를 기리는 시를 지은 것을 문제 삼아 탄핵해 파직에 이르게 만든다. >서울 가는 나그네가 [[개성시|개성]]을 지나는데 >만월대에는 인적도 없고 계곡 물은 성벽을 돌아 흘러가네 >슬프다. 오백년의 역사여 >두견새 우는 소리에 청산이 빨려 들어가네 > >---- > 옥봉 백광훈 풍류 유람의 길동무인 백호 임제와 옥봉 백광훈이 서로 마부를 하루씩 교대하여 [[관서팔경]]을 유람하고 [[개성시|개성]]에 도착하니, 해가 저문데다 노자마저 떨어져 할 수 없이 어느 부잣집 신세를 지기로 하고, 저녁을 먹은 후 임제가 수작을 거는데, ‘주인 어르신, 오늘 은혜에 보답하고자, 제가 데리고 다니는 하인 놈이 글을 곧 잘하니 시나 한 수 읊게 하시지요.’라고 하면서 ‘운자는 서울 경이다.’하며 옥봉에게 분부한다. 옥봉 백광훈은 행색은 하인이지만 약속한 듯 붓을 들어 거침없이 일필휘지하는데, 그때 주인이 한참을 들여다 보더니 ‘[[전라도]]에 사는 백옥봉과 임백호가 글을 잘한다고 소문은 익히 들었지만, 글 잘하는 하인은 생전 처음 보았소.’ 하며 경찬을 하였다. 그러자 임제가 ‘저희들이 바로 백옥봉과 임백호입니다.’ 라며 함께 박장대소를 했다고 한다 그 외에도 [[충청도]] 감사의 아들에게 [[말(동물)|말]] 오줌을 [[신선]]이 마시는 불로주라 하여 마시게 한 일, [[경상도]] 어느 지방에서 화전놀이 하는 이들에게 시를 지어주고 음식을 제공받아 종일 더불어 논 일, [[박팽년]] 사당에 짚신을 신고 가 알현한 일 등의 일화가 전하고 있다. == 당대 평가 == >명산을 두루 유람하여 자신의 분방, 호일한 기운을 복돋아 시에다 토해냈다. >---- >[[이항복]] 「백호집서」 中 위의 일화들로 인하여 당대 사람들은 그를 기이한 인물로 평했다고 한다. 한편 [[황진이]]를 추모하면서 쓴 시로 "어찌 관리가 일개 기생을 위해 시를 짓고 무덤에 술을 올릴 수 있냐"고 지탄을 받기도 했다. 그러나 그의 이러한 이면적인 평가와 달리, 그의 글은 높이 평가되고 널리 애송되었다고 한다. == 대표시조 == > 청초(靑草) 우거진 골에 자난다 누엇난다. > 홍안(紅顔)을 어듸 두고 백골(白骨)만 무쳣나니. > 잔(盞) 잡아 권(勸)하리 업스니 그를 슬허하노라. > ---- >시조 <청초 우거진 골에> 대표적인 시조로는 [[황진이]]를 추모한 시인 '청초 우거진 골에'와 '물곡사' 등이 있다. == 저서 == 대표적인 저서로는 화사(花史), 수성지(愁城志), 백호집(白湖集)[* 보통 윤휴의 문집인 백호집과 혼동을 피하기 위하여 '임백호집'이라고 부른다.], [[원생몽유록]], 남명소승(南溟小乘), 부벽루상영록(浮碧樓觴詠錄), 용성수창집(龍城酬唱集)등이 있다. == 현대의 평가들 == >임제는 기개가 (가히) [[백두산]] 같을 뿐이라 하겠거니와 >그는 자기의 울적한 기분을 가학하여 많은 시를 쓰고 또 소설「수성지」를 썼다. >---- >조윤제 「한국문학사」 中 >광객 같기도 하고 또 끝없는 애국사상가 같기도 하고, 호협하고 순결한 시인 같기도 하여, 그는 조선을 '소중화'로 칭하는데 강력히 반대할 것이라. >---- >[[북경대학|北京大]] 교수 웨이쉬성 「朝鮮文學史」中 이외에도 [[고은(시인)|고은]]이 임제의 생애에 대해 쓴 시도 있다. [[분류:조선의 문관]][[분류:나주시 출신 인물]][[분류:나주 임씨]] [[분류:1549년 출생]] [[분류:1587년 사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