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파일: 장 드 비엔.jpg|width=100%]]|| ||<-2><:> '''성명''' ||<(> 장 드 비엔[br]Jean de Vienne || ||<-2> '''생몰년도''' ||<(> [[1325년]] ~ [[1396년]] [[9월 25일]] || ||<-2> '''출생지''' ||<(> [[신성 로마 제국]] 돌[* 현재 [[프랑스]] 프랑슈콩테 쥐라주 돌 시.] || ||<-2> '''사망지''' ||<(> [[불가리아]] 니코폴리스 || ||<-2> '''아버지''' ||<(> 기욤 2세 드 비엔 || ||<-2> '''어머니''' ||<(> 쇼드네의 마르그리트(또는 클로딘) || ||<-2> '''형제자매''' ||<(> 기욤, 시몬, 오데, 잔, 자케트, 마르그리트, 카트린 || ||<-2> '''직위''' ||<(> 프랑스 해군 제독 || [목차] [clearfix] == 개요 == [[프랑스 왕국]]의 귀족, 장군. [[백년전쟁]] 시기에 잉글랜드군을 상대로 맞섰다. == 생애 == 1325년경 당시 [[신성 로마 제국]]에 속한 돌(Dole)에서 미레벨과 룰랑의 영주였던 기욤 2세 드 비엔과 쇼드네의 마르그리트(또는 클로딘)의 장남으로 출생했다. 그의 초기 행적은 분명하지 않다. 단지 8살에 어머니를 잃고, 10살에 삼촌을 잃었으며, 19살 때 아버지를 잃었다는 것만 전해진다. 형제인 기욤은 루앙 대주교와 셍세느 대수도원장을 맡았으며, 조카 장 드 낸트는 파리 대주교를 역임했다. 1358년 롱위의 영주이자 친척인 자크 드 비엔의 지휘 아래 아발롱 일대에서 잉글랜드군과 교전했으며, 1358년부터 1364년까지 프랑스 등지에서 약탈을 일삼은 자유 용병대간의 전쟁에 투입되었는데, 특히 1362년 [[브리네 전투]]에 참가했다고 전해진다. 1364년 사보비아 백작에 기용되어 목걸이 기사단의 기사로 선임되었다. 1364년에는 [[베르트랑 뒤 게클랭]]의 휘하에 들어가서 [[코르슈렐 전투]]에 참여했다. 1365년부터 1367년까지 사보이아 백작 [[아메데오 6세]]가 동로마 제국 황후이자 자신의 친척인 [[사보이아의 안나]]를 돕기 위해 [[오스만 제국]]에 맞선 [[십자군]] 원정을 단행했을 때 참여했으며, 사보이아의 거룩한 대축일의 최고 기사단의 기사가 되었다. 이후 프랑스로 돌아온 그는 프랑스 국왕 [[샤를 5세]]가 아키텐을 재정복하기 위해 백년전쟁을 재개했을 때 앙주 공작 [[루이 1세(앙주)|루이 1세]] 휘하에 들어가 1369년부터 1373년 사이에 몽토팡과 생트세브르 일대에서 활약했으며, 아키텐과 앙주 등지에서 잉글랜드군을 몰아내는 데 기여했다. 1373년 [[곤트의 존의 슈보시]]를 단행한 잉글랜드군에 소속된 분견대를 올쉬르샤토 인근에서 습격해 여러 기사를 생포했으며, 뒤이어 샤를 5세로부터 프랑스 해군 제독에 선임된 뒤 해군을 재조직하고 해안 경비대를 창설해 해안 감시를 이끄는 임무를 수행했다. 1377년부터 1380년까지 플리머스, 와이트 섬, 라이 등 잉글랜드 남부 해안을 지속적으로 습격해 약탈과 방화를 자행했다. 이로 인해 잉글랜드 왕국 백성들은 동요했고, 잉글랜드와 [[가스코뉴]], [[플란데런 백국]]간의 물자 교류는 매우 약화되었다. 1381년에서 1385년 사이에 프랑스 국왕 [[샤를 6세]]를 위해 플란데런 백국 및 잉글랜드군과 맞서 싸웠는데, 특히 1382년 11월 27일 [[루즈베케 전투]]에 참전해 프랑스군이 플란데런 반란군을 상대로 결정적으로 승리하는 데 기여했다. 1385년 180척의 수송선에 프랑스군 [[맨앳암즈]] 1,000명, 기마 궁수병 500명 등을 싣고 스코틀랜드에 상륙해, 스코틀랜드군과 연합하여 잉글랜드 북부를 침공하는 임무를 수행했다. 그해 7월 노섬벌랜드의 주요 요새인 와크를 공략하는 데 성공했고, 뒤이어 컴벌랜드와 웨스트모어랜드 일대를 황폐화했다. 그러나 2배에 달하는 잉글랜드군이 몰려오고 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칼라일을 공략하려 했던 그는 방향을 돌려 스코틀랜드로 철수했다. 이후 잉글랜드 국왕 [[리처드 2세]]가 보복 원정에 나서 [[에든버러]]에 입성하고 파괴했지만, 장 드 비엔은 스코틀랜드인들과 함께 산악 지대에 숨어서 정면 대결을 회피하고, 적 분견대 및 보급부대를 상대로 유격전을 벌였다. 결국 리처드 2세는 변변한 전투를 치러보지 못한 채 보급난에 시달리다가 1386년 가을에 철수했다. 이후 프랑스 때문에 피해를 입었다고 여긴 스코틀랜드인들은 장 드 비엔 등 프랑스 장성들을 강제로 억류한 뒤 보상금을 내놓으라고 요구했다. 이에 프랑스에서는 잉글랜드와 2, 3년 정도 평화 조약을 맺고 스코틀랜드를 침략해 완전히 파괴하자는 여론이 생길 정도로 격분했지만, 적을 늘릴 수는 없었기에 어쩔 수 없이 보상금을 내주고 프랑스 장성들을 돌려받았다. 그 후 프랑스와 스코틀랜드간의 관계는 소원해졌다. [[샤를 6세]]는 프랑스 해군을 키우는 데 별다른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이로 인해 별다른 활약을 하지 못하던 그는 1396년 [[오스만 제국]]에 맞서 십자군을 일으킨 [[헝가리 왕국]]의 국왕 [[지기스문트]]에 가담했지만, 1396년 9월 25일 [[니코폴리스 전투]]에서 전사했다. 그의 유해는 송환되어 프랑슈콩테에 있는 노트르담 드 벨보 수도원에 안장되었다. == 여담 == 1937년에 진수된 프랑스 순양한 '장 드 비엔', 1984년에 진수된 프랑스 호위함 '장 드 비엔'을 포함한 프랑스 해군의 여러 군함은 이 인물의 이름을 따서 명명되었다. [[분류:프랑스의 귀족]][[분류:프랑스의 군인]][[분류:백년전쟁/인물]][[분류:1325년 출생]][[분류:1398년 사망]][[분류:쥐라 출신 인물]][[분류:전쟁 사망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