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류:후한의 인물]][[분류:한나라의 관료]][[분류:지닝시 출신 인물]] [include(틀:다른 뜻1, other1=한국사의 무기, rd1=장검(무기), other2=유럽의 무기, rd2=롱소드)] [include(틀:다른 뜻1, other1=당나라의 인물, rd1=장검(당나라))] [include(틀:다른 뜻1, other1=울산광역시 울주군 범서읍 굴화리의 나들목, rd1=장검IC)] [include(틀:후한서)] [include(틀:강하팔준)] [include(틀:팔급)] 張儉 생몰년도 미상[* 중국 위키피디아에서는 생년이 115년, 몰년이 198년으로 기술되어 있다.] [[후한]] 말의 인물이며 자는 원절(元節)로 장성(張成)[* 강하태수를 지냈다.]의 아들, [[장이]]의 후손. 연주 산양군 고평현 사람. 165년에 [[적초]]의 부탁을 받고 산양의 동부 지역의 독우가 되었으며, 중상시 [[후람]]의 가속들이 백성들에게 잔혹하게 굴자 장검은 후람의 죄상을 열거한 상주문을 올렸다. 후람의 집안의 무덤, 집을 파괴하고 재산을 몰수해 진상을 구체적으로 갖추어 상주문을 올렸다. 169년에 제2차 [[당고의 금]]이 일어날 때 주병에게 동향 사람 24명과 도당을 이루고 있다는 모함을 받아 도주했으며, 동래, 북해, 어양, 노국 등에 있는 아는 집을 찾아가 숨어지내면서 떠돌아다녔다. 그가 거쳐간 곳에서 중형을 받은 사람들만 10여 명이 나왔고 연루되어 고문받은 자들이 천하에 두루 퍼졌으며, 그 친척들은 모두 다 죽게 되어 군, 현은 이 때문에 부서지게 되었다. 184년에 당인들에 대한 금고가 풀리자 고향으로 돌아와 훗날 위위가 되었고 84세에 사망했다. 《[[삼국지연의]]》에서는 [[유표]]가 사람과 사귀는 것을 좋아해 명사 7명과 사귀었다면서 [[강하팔준]]에 대해 이야기할 때 언급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