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일:광주_학생_독립운동의_주역들(장재성씨와_장매성씨)남매.jpg]] 학창시절 [[장재성]]과 장매성 남매 || 성명 ||장매성(張梅性) || || 생몰 ||[[1911년]] [[6월 22일]] ~ [[1993년]] [[12월 14일]] || || [[출생지]] ||[[전라남도]] [[광주광역시|광주군]] 부동방면 금계리[br](현 [[광주광역시]] [[동구(광주)|동구]] 금동) || || 사망지 ||[[서울특별시]] [[중구(서울)|중구]] 필동2가 || || 매장지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묘역 || || 추서 ||건국훈장 애족장 || [목차] == 개요 == 한국의 독립운동가.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수여받았다. == 생애 == 장매성은 1911년 6월 22일 전라남도 광주군 부동방면 금계리(현 광주광역시 동구 금동)에서 아버지 장원용과 어머니 최예언의 딸로 태어났다. 그녀는 [[광주학생항일운동]]의 지도적 인물이었던 [[장재성]]의 여동생으로, 광주여고보에 재학중이던 1928년 11월에 동교생 [[장경례]], [[박옥련]], [[남협협]], 고순례(高順禮), 이금자(李錦子) 등과 함께 광주사범학교 뒷산에 모여 조국의 독립과 여성 해방을 목적으로 하는 소녀회(少女會)를 조직했다. 그녀는 [[박계남]], [[박채희]], 박현숙(朴賢淑), 김금연(金錦 ) 및 김귀선(金貴善) 등을 동지로 포섭하고 자신의 집을 비롯한 여러 곳에서 월례회를 개최했으며, 매월 1회 월례연구회를 통해 항일의식을 고취시켰다. 소녀회는 1929년 6월에 결성된 독서회중앙본부와도 연락을 갖고 활동했다. 독서회중앙본부가 서회원의 친목단결 및 재정활동 지원을 위해 학생소비조합을 조직할 때 각 학교 독서회 및 학생들로부터 자본금을 출자하게 했는데 이때 광주여고보에서는 소녀회가 주동이 되어 자본금 30원을 출자했다. 이후 1929년 11월 3일 [[광주학생항일운동]]이 발발하자, 장매성은 소녀회를 주도해 가두 시위를 벌이다가 부상당한 학생들을 치료하고 식수를 공급했으며, 경찰의 진압에 맞서기 위한 돌멩이를 운반하는 등 남학생들의 시위를 도왔다. 이러한 활동이 발각되면서 동지들과 함께 체포된 그녀는 1930년 10월 광주지방법원에서 치안유지법 위반 혐의로 징역 1년, 집행유예 5년을 언도받았고 학교로부터 퇴학당했다. [[8.15 해방]] 후 서울 중구 필동2가에서 조용히 지내다가 1993년 12월 14일에 사망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68년 장매성에게 대통령표창을 수여했고,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수여했다. [[분류:나무위키 독립운동가 프로젝트]][[분류:한국의 독립운동가]][[분류:동구(광주) 출신 인물]][[분류:1911년 출생]][[분류:1993년 사망]][[분류:건국훈장 애족장]][[분류:국립대전현충원 안장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