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성명 ||장세전(張世銓) || || 자 ||석중(錫仲) || || 본관 ||[[장(성씨)|울진 장씨]] || || 생몰 ||[[1909년]] [[11월 6일]] ~ [[1943년]] [[12월 25일]] || || [[출생지]] ||강원도 울진군 근북면 화방동[br](현 [[경상북도]] [[울진군]] 죽변면 화성리 꽃방마을) || || 사망지 ||울진형무소 || || 매장지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묘역 || || 추서 ||건국훈장 애국장 || [목차] == 개요 == 한국의 독립운동가. 1991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받았다. == 생애 == 장세전은 1909년 11월 6일 강원도 울진군 근북면 화방동(현 경상북도 울진군 죽변면 화성리)에서 장영달(張永達)의 아들로 태어났다.[[http://uljin.grandculture.net/Contents?local=uljin&dataType=99&contents_id=GC01800693|#]] 그는 1938년 4월 12일, [[남원수]], 임시헌(林時憲), [[노하순]], [[남정성]], 전찬문(田燦文), 최효대(崔孝大) 등과 함께 울진 일대에서 준향계(準香契)를 조직했다. 준향계는 일제의 감시망을 피하기 위하여 소규모의 조직형태로 운영되었고 활동은 반일선전활동 및 조직의 내부결속을 다지는데 치중되었으며 일제의 중국침략전쟁이 장기화되면 반드시 일제가 불리한 처지에 놓일 것을 예상하고 이 기회를 이용하여 조국독립을 쟁취할 것을 계획했다. 준향계 게원들은 여섯 차례 회합을 가졌고, 이두연(李斗淵), 주영석(朱永錫), 주예득(朱禮得) 등을 동지로 포섭하고 시의적절한 독립운동 방향을 모색했다. 그러나 1943년 3월 일제에게 조직이 발각되어 와해되었고, 그는 [[충칭]]으로 탈출하려 했지만 3월 19일에 체포되었다. 이후 재판에 회부되어 예심을 받던 중 혹독한 고문을 견디지 못하고 울진형무소에서 옥사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82년 장세전에게 대통령표창을 추서했고 1991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했다. 그리고 2006년에 그의 유해를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묘역에 안장했다. [[분류:나무위키 독립운동가 프로젝트]][[분류:한국의 독립운동가]][[분류:울진군 출신 인물]][[분류:울진 장씨]][[분류:1909년 출생]][[분류:1943년 사망]][[분류:건국훈장 애국장]][[분류:국립대전현충원 안장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