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clude(틀:진서(남조역사책))] [include(틀:남사)] ||<-2> {{{#!wiki style="margin: -5px -10px; padding: 7px 10px; background-image: linear-gradient(to right, #091531 0%, #10275d 20%, #10275d 80%, #091531)" '''{{{#ECE5B6 남진의 후궁[br]{{{+1 貴妃 張氏 | 귀비 장씨}}}}}}'''}}} || || '''[[시호|{{{#d4cd99 시호}}}]]''' ||<(> 없음 || || '''[[성씨|{{{#d4cd99 성}}}]]''' ||<(> 장(張) || || '''[[휘|{{{#d4cd99 휘}}}]]''' ||<(> 여화(麗華) || ||<|2> '''{{{#d4cd99 재위}}}''' ||<:> {{{#ECE5B6 '''후주의 귀비'''}}} || ||<:> 582년 ~ 589년 || || '''{{{#d4cd99 배우자}}}''' ||<(> [[진숙보|후주]](後主) || || '''{{{#d4cd99 생몰}}}''' ||<(> 559년 ~ 589년 || [목차] [clearfix] == 개요 == 중국 남북조시대 [[진(육조)|남진]]의 후궁이다. == 생애 == 장여화는 559년에 병가(兵家)의 딸로 태어났다. 장여화의 집안은 가난하여, 가족이 모두 돗자리를 짜는 것으로 생계를 유지하였다. 그러다가 [[진숙보]]가 태자가 되면서 장여화는 궁에 선발되어 들어가 처음에 귀빈 공씨의 시녀가 되었다. 이후 진숙보는 장여화를 보자마자 바로 반하여 총애를 주었고, 장여화는 진숙보의 총애를 받아 진심(陳深)을 낳았다. 582년, 진숙보가 즉위한 이후 장여화는 귀비로 책봉되었고, 장여화에 대한 총애는 당시 진숙보의 황후였던 [[심무화]]보다 더 컸다. 이로 인해 태자 자리는 [[심무화]]가 양아들로 키운 [[진윤]](陳胤)에서 장여화의 소생인 진심(陳深)에게 넘어간다. 장여화는 머리카락에 윤기가 흘렀고 그 길이가 7척이나 되는 장발이었다.[* 현대 기준으로 머리카락 길이가 2m가 넘었다.] 진숙보가 진숙릉의 반란으로 부상을 입고, 승향전(承香殿)에 누울 때 장여화는 유일하게 진숙보를 시중들었고 총애는 더욱 커져갔다. 진숙보는 장여화 이외에도 황후를 제외한 다른 후궁들을 총애하여 점차 정사를 멀리하였고, 진나라의 정사는 장여화가 결정할 정도였다. 진숙보는 황후인 [[심무화]]를 내치고 장여화를 대신 황후로 삼으려고 했지만, 589년에 진나라가 [[수나라]]에 의해 멸망하면서 성사되지는 않았다. 결국 장여화는 589년 진숙보와 함께 수나라 군대의 추격을 피해 우물에 숨었다가 발견되어 붙잡혔고 남진이 멸망할 때 나라를 망쳤다는 죄목으로 처형되었다.[* 참고로 사서에 나오는 장여화의 최후에 대해서는 뉘앙스가 [[진서(남조역사책)|진서]], [[남사]]와 [[수서]]가 서로 다르다. 진서와 남사에서는 [[양제(수)|양광]]이 장여화를 참수하라 명하였다고 나오는데, 반대로 수서에서는 양광이 장여화를 아내로 삼으려고 하다가 [[고경]]이 간언한 직후 고경이 죽였고 양광이 이를 원망했다고 나온다.] 장여화는 진숙보와의 사이에서 상술한 태자 진심과 회계왕 [[진장]]을 낳았다. [[분류:남북조시대/인물]][[분류:559년 출생]][[분류:589년 사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