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clude(틀:다른 뜻1, other1=남송의 동명이인 장준, rd1=장준(송나라))] [include(틀:송사)] [include(틀:남송7왕)] ||<-2> {{{#ece5b6 '''{{{+1 남송의 명장[br]정충보국(精忠報國)[br]순충렬왕(循忠烈王)[br]{{{+1 張俊 | 장준}}}}}}'''}}} || || '''[[시호|{{{#fff 시호}}}]]''' ||충렬(忠烈) || || '''[[왕|{{{#fff 왕호}}}]]''' ||청하군왕(淸河郡王) → 순왕(循王)^^추봉^^ || || '''{{{#fff 최종 직위}}}''' ||중서령(中書令)^^추증^^ || || '''{{{#fff 이름}}}''' ||장준(張俊) || || '''{{{#fff 출신}}}''' ||봉상부(鳳翔府) 성기현(成紀縣) || || '''{{{#fff 자}}}''' ||백영(伯英) || || '''{{{#fff 생몰}}}''' ||1086년 ~ 1154년(향년 69세) || || '''[[주군|{{{#fff 주군}}}]]''' ||[[휘종(송)|송휘종]][br][[흠종(송)|송흠종]][br][[고종(송)|송고종]] || || '''[[국적|{{{#fff 국적}}}]]''' ||남송(南宋) || [목차] [clearfix] == 개요 == 중국 [[남송]] 초기의 명장이자 방랍의 난과 [[정강의 변]]때 [[금나라]]의 3~40만 대군에 맞서 공세를 막은 명장이다. 자는 백영(伯英), 시호는 충렬(忠烈), 왕호는 순왕(循王). == 생애 == 봉상부(鳳翔府) 성기현(成紀縣) 사람인 장준은 어려서 부터 말타기와 활쏘기를 좋아하고 재기를 갖추었다. 16살에 삼양궁전수(三陽弓箭手)가 되었다. 정화 7년(1117년)에 남만(南蠻) 토벌에 종군하여 도지휘사(都指揮使)로 전임되었다. 또한 [[서하]]와 인다천(仁多泉)에서 전투를 벌이고 승리하여 처음으로 승신랑(承信郎)으로 제수되었으며, 이후 무덕랑(武德郎)으로 진위되었다. 정강 원년(1126)년에는 동명현(東明縣)을 수비한 공으로 무공대부(武功大夫)로 전임되었다. 수도 개봉부가 포위되자, 장준은 신덕부 수신인 양양조(梁揚祖)를 따라 [[고종(송)|고종]]의 밑으로 들어왔다. 고종은 장준의 근엄한 모습을 보고는 곧바로 장준을 원수부(元帥府) 후군통제(後軍統制)로 발탁하였으며, 장준은 전공을 세워 영주(榮州) 자사로 전임되었다. 이후 1127년, 장준은 고종을 따라 동평부(東平府)에 당도하였는데, 당시 이욱(李昱)이라는 인물이 연주(兗州)를 점거하고 송나라에 반기를 들자, 장준은 도통제로 임명되어 이욱의 반란을 토벌하였다. [[정강의 변]]이 일어난지 1년후 어영사통제관(御營司統制官)이 되었고 건염 3년(1129년)에 진강 대첩이 일어날 시기 명주성(明州城)을 지켜내며 [[금나라]] 군대를 격파하였으나, 금의 왕자이자 명장인 완안종필(完顔宗弼)의 구원병이 대반격을 시도하자 성을 버리고 도망하였고 이 때문에 명주성의 군사들과 백성들은 대도살을 당하였다. 소흥 원년(1131년)에 강회(江淮) 초토사(招討使)[* 말 그대로 불러들여 무마하고 불응하면 쳐부순다는 뜻에서 전시에 설치하는 관직의 이름이였다.]가 되어 각지의 봉기군과 반란군사들을 진압하였다. 소흥 10년(1140년)에 그의 부하명장 [[왕덕]](王德)이 북상하여 금의 박주(亳州)[* 지금의 안후이성 보저우시이다.]를 함락시키려 하자 남송의 1대황제가 됐던 강왕 조구를 받아들이고 주화파의 우두머리인 현재 중국의 유명한 권신이자 [[남송]]의 2대 권신인 [[진회]]의 밑에 들어가 일하기 시작하였고 적극적으로 금나라와의 화의를 주장하였다. 이때 장준은 빠르게 강회를 토벌하였고 묘류(苗劉)를 평정하였고 이성(李成)을 격파했다. 소흥 11년(1141년)에 우승상 겸 추밀사(樞密使)에 임명되었다. 조정에서 파병(罷兵)하려는 것을 알고 먼저 자신이 통솔하던 군대를 반납해 화의해 적극 찬동했다. 진회(秦檜)가 모든 장수들의 병권을 회수해 그에게 맡겼다. 한 해가 다 가도록 떠날 뜻이 없자 진회가 강막(江邈)을 시켜 파직을 논하게 했다. 그렇게 큰 성과를 내었던 장준은 광국공(廣國公)과 익국공(益國公)에 봉해지고, 청하군왕(淸河郡王)에 진봉(進封)되었으며, 태사(太師)에 임명되었다. [[북송]] 말기의 혼란기에 전국을 다니면서 반란을 진압했다. 하지만 이과정에서 자신과 함께 싸워줬던 유명한 명장들 [[악비]], [[한세충]], [[오린(북송)|오린]]등을 배척하였고 결국 진회와 함께 논의를 하여 악비를 모함하여 주살시켰다. 이때 여론은 비난과 함께 흉흉해져서장추밀(張樞密)이라는 오명으로 불리우며 많은 모욕과 고통을 받았다. 소흥 24년(1154년)에 세상을 떠난 후 순왕이라는 작위와 충렬이라는 시호를 받았고 중서령이라는 관직에 추증되었다. 사후 몇백 년 뒤 그는 악왕묘 근처에 진회 일동의 흉상으로 불리면서 많은 중국인들에게 죽어서도 흉상으로 계란투척을 맞는 처량한 신세가 됐다. [[분류:송나라/인물]][[분류:1086년 출생]][[분류:1154년 사망]][[분류:송나라의 추존 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