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류:조선의 역관]][[분류:조선의 국구]][[분류:1623년 출생]][[분류:1669년 사망]][[분류:인동 장씨]] ||<-3> {{{#gold '''조선 숙종의 장인 | 희빈 장씨의 부친'''}}}[br]{{{#gold {{{+1 '''옥산부원군 장형 [br]玉山府院君 張炯'''}}}}}} || || '''{{{#gold 시호}}}''' ||<-2>안헌(安憲) || || '''{{{#gold 품계}}}''' ||<-2>대광보국숭록대부(大匡輔國崇祿大夫) || || '''{{{#gold 본관}}}''' ||<-2>[[인동 장씨|인동(仁同)]]|| || '''{{{#gold 본명}}}''' ||<-2>형(炯) || || '''{{{#gold 자}}}''' ||<-2>백야(伯夜) || || '''{{{#gold 부친}}}''' ||<-2>장응인(張應仁) || || '''{{{#gold 모친}}}''' ||<-2>증 정경부인 [[박(성씨)|남포 박씨]] || || '''{{{#gold 부인}}}''' ||<-2>영주부부인(瀛洲府夫人) 제주 고씨 파산부부인(坡山府夫人) 파평 윤씨 || || '''{{{#gold 자녀}}}''' ||<-2>2남 2녀 || || '''{{{#gold 묘소}}}''' ||<-2>경기도 고양시 일산동구 중산동 산 96-2 || ||<|2> '''{{{#gold 생몰[br]기간}}}''' || '''{{{#gold 출생}}}''' ||[[1623년]]^^([[인조]] 1년)^^ || || '''{{{#gold 사망}}}''' ||[[1669년]]^^([[현종(조선)|현종]] 10년)^^ [[1월 12일]] || [목차] [clearfix] == 개요 == [[조선]] [[숙종(조선)|숙종]]의 장인이자 [[희빈 장씨]]의 아버지이다. 더불어 [[경종(조선)|경종]]의 외조부가 된다. 본래 [[중인]] 신분의 [[역관]]이었으나 국구(國舅: 왕의 장인)가 되어 사후 [[영의정]]에 추증되는 영광까지 누렸다. 그러나 1701년(숙종 27) 무고의 옥으로 [[희빈 장씨]]가 몰락하면서 부원군과 부부인의 작호를 폐하고 교지를 불에 태웠으므로 엄밀히 말하면 잠시 국구가 되었을 뿐이다.[* 그런데 비석을 깨트리는 일은 어려웠는지 현재 [[경기도]] [[고양시]]에 옥산부원군 신도비가 남아있다. ] == 생애 == 장형은 일찍이 역관이 되어 품계가 통정대부(通政大夫)에까지 이르렀던 장응인(張應仁)의 아들이다. 장응인은 중국말을 잘해서 탐욕스러운 [[명나라]] 사람이라도 함부로 토색질을 못하게 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역과방목(譯科榜目)》[* 조선시대 역과(譯科) 시험에 합격한 사람들의 명단을 수록한 방목. ]에 따르면, 장형은 생전에 사역원 종8품 봉사(奉事)였으나 신도비에는 정9품 부봉사(副奉事)로 기재되어 있다. 당시 그의 형제들은 모두 역관이었는데, 사촌 형제인 [[장현(조선)|장현]]의 경우 '국중(國中)의 거부'라는 말까지 들었다.[* 숙종실록 17권, 숙종 12년 12월 10일 경신 4번째기사. [[http://sillok.history.go.kr/id/ksa_11212010_004|#]] ] 하지만 상대적으로 장형은 재산 축적에는 신경쓰지 않았는지, 신도비에는 '청빈한 생활을 하며 재산에 마음을 두지 않고 분수에 자족하며 부러워하지 않았다'고 하고 있다.[* 장형의 두번째 혼인을 보면 꼭 그렇지는 않았을 듯. 그가 첫번째 부인이 죽고 새로 맞이한 계실 파평 윤씨는 사역원 종4품 첨정 윤성립(尹誠立)의 딸이었다. 특히 윤씨의 친정 어머니 변씨는 [[허생전]]에도 등장하는 조선 최고의 갑부 '변부자 가문'의 딸로 바로 변승업의 당고모였다. ] 장형의 생전에 딸이 [[궁녀]]로 입궁하였는지 알 수 없다. 다만, 딸이 [[궁녀]]가 되었다가 [[숙종(조선)|숙종]]의 눈에 띄어 [[후궁]]이 되면서 1689년(숙종 15) 조선 최초로 중인 신분의 [[부원군]]이 나오게 된다.[* 숙종실록 21권, 숙종 15년 5월 6일 신축 3번째기사. [[http://sillok.history.go.kr/id/ksa_11505006_003|#]] ] 이듬해 숙종은 그의 묘소에 신도비를 세우게 하고, 사당까지 짓게 하였다.[* 신도비의 비명은 민암이 짓고, 오시복이 글씨를 쓰고, 권규가 전액을 썼다. ] >전교(傳敎)하기를, "옥산 부원군(玉山府院君)의 사당을 내사(內司)에서 이제 지어 줄 것인데, 요미(料米)와 전화(錢貨)도 해조(該曹)로 하여금 넉넉히 실어 보내게 하라." 하였다. >【이 역사는 굉장하고 사치하기를 극진하게 하였는데, 이렇게 비용이 많은 것은 전에 듣지 못하던 것이었다.】 >---- >《[[숙종실록]]》 숙종 17년 3월 22일 그러나 1694년(숙종 20) [[갑술환국]]과 1701년(숙종 27) 무고의 옥으로 [[희빈 장씨]]와 장씨 일가가 몰락하자 더이상 왕의 장인으로서 예우받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