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clude(틀:위서)] 田豫 171~252 [목차] [clearfix] == 개요 == [[후한]] 말과 [[삼국시대(중국)|삼국시대]] [[위(삼국시대)|조위]]의 인물이며 [[자(이름)|자]]는 국양(國讓)으로 유주 어양군 옹노현 사람이다. 연의에서의 등장이 너무 빈약하여 존재감이 없지만 그 활약상은 어느 세력에 대입해도 에이스라 부르기에 부족함이 없을 정도의 걸출한 명장이다. == [[삼국지(정사)|정사]] == 초기에는 여러 세력을 전전하는, 다사다난한 생활을 보냈다. 본디 젊었을 적에는 '''공손찬에게 의탁한 [[유비]]의 수하였다.'''[* 고당현령으로 있다가 도적에게 격파되어 임지를 버리고 공손찬에게 유비가 의탁한 것이 191년 이전의 일로 보이고 전예가 위나라 가평 연간에 82세로 세상을 떠났으니 이때 전예는 10대 후반에서 20대 초반의 나이였다.] 전예전에 따르면 전예가 '''스스로''' 의탁하여 섬겼다고 하니 당시 유비의 상황이 상당히 불안정했음을 감안하면 그에게 상당히 매료되었던 것으로 보이는데 이에 유비가 그를 매우 기특하게 여겼다고 한다. 주군과 부하가 까놓고 말해 아무것도 아니던 시절 주종관계를 맺었는데 부득이하게 헤어지고 나서야 둘다 대성한, 흠많무한 케이스다.[* 유비는 이후, 진군, 진등, 서서 등 유능한 인재들을 놓친 적이 있지만 그 시절에 그는 최소 주자사 정도는 맡던 시절이니 아무것도 없는 수준의 세력은 아니였다.] 이후 유비가 [[도겸(삼국지)|도겸]]에 의해 예주자사가 된 194년 무렵에 고향의 노모를 모시기 위해 유비와 헤어졌는데 이때 유비가 눈물을 흘리며 그와 작별하면서 "그대와 더불어 함께 대사(大事)를 이루지 못함이 한스럽구려."라고 말하면서 무척 아쉬워했다.[* 그나마 전예는 이후로 북방이나 대오전선 쪽에서 주로 근무한지라 유비 및 그가 세운 나라인 촉한과 직접적으로 싸우진 않았다. 이에 대해선 상술한 유비군 복무기록 탓에 일부러 대촉한 전선 쪽으론 배치를 안 시켰을 가능성이 있다.] 이후 공손찬을 섬겼으며, 공손찬 휘하에서 천주현[* 동주현이라고 하는데 이런 행정구역은 실제로 없었다. 그래서 유주 어양군 천주현의 오기로 보인다.]을 지켰는데, 공손찬의 수하였다가 [[원소(삼국지)|원소]]에게 투항한 장수 [[왕문]]이 군사 만여 명으로 공격하자 전예가 말했다. >그대는 공손씨의 은혜를 입고도 떠났지만 부득이한 사정이 있기 때문이라 생각했었소. 그러나 다시 돌아와 이처럼 공격하는 것을 보니 그대가 한낱 배신자에 지나지 않음을 이제야 알게되었소. 대저 보잘것 없는 지혜를 가진 자라도 자기 것을 지키며 쉽게 내어주지 않는 법이거늘, 하물며 나는 이곳을 지키는 임무를 맡았소. 어찌 속히 공격하지 않는 것이오? 그러자 그 말을 들은 왕문은 부끄러워해 돌아갔으며, 이 일로 공손찬은 전예에게 권모가 있음을 알았지만 중용하지 않았다. 성급하게 원소와 싸우려는 공손찬을 말렸지만 무시당했다가 결국 공손찬이 멸망하자 [[선우보]]의 밑에서 장사를 지냈는데, 선우보가 누굴 따르는 것이 좋은지 묻자 필경 조조가 이길 것이라 해 조조를 따르도록 했다. 208년에 [[조조]]가 승상이 되자 부름을 받아 승상공모연으로 임명되었다가 낭릉 현령과 익양태수 자리에 있을 때 가는 곳마다 공이 있었으며, 218년에 [[조창]]이 이민족을 토벌하러 갈 때 대군(代郡)을 치며 전예를 상(相)으로 삼았다. 군대가 역수(易水) 북쪽에 주둔하자 이민족이 기병을 복병으로 두었다가 공격하니 군인들이 요란해져 어찌할 바를 몰라했다. 전예가 지형에 의거하여 수레로 둘러싸 원진[* 헝가리의 wagon 전법이나 [[팔진도]], [[국의]]가 공손찬의 백마의종을 막을 때의 전법과 비슷하다.]을 만들면서 그 안에서 군사들이 [[활]]과 [[쇠뇌]]를 가득 당기고 의병(疑兵)들을 그 틈에 채워두었다. 이민족들이 진격하지 못하고 흩어져 물러나자 이를 뒤쫓으며 대승을 거두었고 마침내 대를 평정했다. 조창을 도와 대를 토벌한 것은 모두 전예의 계책 덕분이었다. 이후 남양태수로 승진하는데 남양태수로 지낼 때 [[후음]]이 반란을 일으키자 완을 점령해 그로 인해 수많은 도적 떼들이 생겨나 민심이 흉흉했는데, 전 태수가 그 중 500명을 붙잡고 전예에게 자랑하면서 "병사들의 사기와 저런 놈들이 다시는 없도록 본보기를 위하여 몽땅 죽여야 한다"고 주장했는데, 오히려 전예는 그들을 좋은 말로 타이르고 그대로 풀어줘 그 소문이 널리 퍼져서 후음의 군단이 해산하고 도둑들이 싹 사라졌다. 220년에 [[조비]]가 즉위하자 오환교위 지절이 되어 오환족을 감독하는 역을 맡았으며, 그는 이이제이의 전법을 기본으로 삼아 그들을 상대해 소리가 말 천필을 중국에 관에 보낸 일로 [[가비능]]에게 공격을 받자 전예는 그를 도와주러 갔다가 너무 깊숙한 곳으로 가 귀로가 끊기게 된다. 이에 전예는 소똥과 말똥을 태워 불을 환하게 유지해 군사가 있는 것으로 위장해서 빠져나왔으며, 적이 뒤쫓아 다시 마성에서 포위되자 [[성동격서|남문으로 큰소리를 내어 나가는 척 하면서 실제로는 북문으로 나가 적을 공격]]해 예상치 못한 상대의 군대를 대파한다.[* [[견초]]전에는 견초의 공으로 되어있다.] 오환왕 [[골진]]이 오만방자하게 굴자 전예는 백여기 만을 이끌고 골진의 진영으로 가서 그의 목을 베고 빠져나오자 모두 두려워해 감히 행동하지 못하고 골진의 동생에게 골진을 대신하게 했을 뿐이며, 이후로 전예의 위엄에 호인들은 감히 대항하지 못하게 되었다. 산적 고애가 노략질을 하자 선비족의 소리를 보내 고애를 배게 했으며, 이 공으로 전예는 장락전후에 봉해졌다. [[공손연]]이 배반할 때 조정이 오나라와 [[공손연]]의 연계를 두려워 해 [[양기(삼국지)|양기]]의 추천으로 전예에게 일을 맡기자 산동반도에서 진을 치고 기다렸는데, 텅 빈 땅에 진을 치고 있으니 사람들이 다들 미쳤다고 여겼으나 갑자기 폭풍우가 일어나 [[주하]] 등 공손연에게 갔다가 돌아오는 오나라 사절이 산동반도에 표류하자 몽땅 다 잡아들인다.[* 오가 공손연에 파견한 사신인 [[장미(삼국지)|장미]], [[허안]] 등은 오와 친교를 유지할 생각도 없고 재물에 욕심을 낸 공손연에게 처형당했고, 주하가 그나마 살아남아서 배를 타고 오로 귀환하려 하던 차에 이런 봉변을 당한 것이다.] 234년 제갈량의 마지막 북벌 때 [[손권]]이 10만 대군을 칭하며 촉과 함께 양동 작전으로 신성을 공격하니 [[만총]]이 곧장 신성을 구원하려 하자 전예는 >적이 모든 부대로 대거 출군한 것은 단지 작은 이익을 노리는 것이 아니라 신성을 담보로 하여 우리의 대군을 끌어들이려는 것입니다. 그러니 그들이 공성하도록 내버려두어 그 예기를 꺾어야 마땅하고 그들과 더불어 적극적으로 싸워서는 안 됩니다. 성이 함락되지 않아 적군은 필시 피로하고 나태해질 것이니 파태해진 연후에 적을 공격하면 크게 이길 수 있습니다. 라고 조예에게 진언한다. 당시의 상황에 비춰 적의 의도를 파악해 구태여 급하게 병력을 움직이지 않으면서도 이길 수 있는 방책을 제시한 것인데, 이 자체만으로 이미 상당한 식견을 드러낸 것이지만 여기서 멈추지 않고 한층 더 나아가 >만약 적이 우리의 그런 계책을 알아챈다면 필시 공성하지 않고 '''형세상 스스로 달아날 것입니다.''' 만약 곧바로 진병하면 적의 계책에 그대로 빠져드는 것입니다. 또한 대군이 서로 상대할 때는 응당 알기 어렵도록 해야하며 자획하게 해서는 안됩니다. 라고 아예 손권의 전략과 행보를 완전히 예측한 듯한 의견을 피력하였고 조예가 이를 따르니 과연 그 말대로 손권은 도주하였다. 경초 연간(237 ~ 239년)에 식읍이 3백 호가 늘어나 5백 호가 되었으며, 232년에는 진이장군을 지내 겨울 10월에 군대를 이끌고 오나라 대장 [[주하]]를 성산에서 토벌하고 죽였지만 [[정희]]의 참언 때문에 공적이 거론되지 않았다. 정시(240 ~ 248년)에는 사지절, 호흉노중랑장, 진위장군, 병주자사로 임명되었으며, 이에 호인들은 예전에 그의 위명을 따라 서로 뒤따르며 헌상했고 후에 위위가 되었다가 여러 번 사직을 청했는데도 불구하고 [[사마의]]가 이를 들어주지 않았으며, 결국 병이 위독하다고 해 태중태부의 벼슬에 임명되었다가 252년에 향년 82세로 죽었다. 청렴해서 포상은 언제나 장사들에게 흩어주면서 호와 적이 보낸 사사로운 선물은 모두 장부에 적고 관에 보관할 뿐 자기 집에 들이지 않아 집안이 늘 가난했다. 비록 그와 다른 부류의 사람일지라도 모두 전예의 절의를 높게 여겼을 정도였다. 그의 청렴함에는 다음과 같은 일화가 있다. 선비족 소리 등이 바친 소와 말은 언제나 관으로 보냈는데, 전예가 가난한 것을 불쌍하게 여긴 호가 금 30근을 바치면서 집안의 재산으로 삼으라고 하자 소매를 펼쳐 받았다가 돌려보낸 뒤에 관에 바치니 조정에서는 조서를 내려 다음과 같이 칭찬한다. >옛날에 위강[* 춘추시대의 인물. 진도공의 신하로, 융족의 화친을 거부하려는 임금에게 간언해 화친을 받아들이게 했다.]은 가슴을 열어 융의 뇌물을 받았는데 이제 경은 소매를 들어 적의 금을 받았으니 짐은 이를 매우 가상히 여기노라. 그리고는 비단 5백 필을 하사했다. 전예는 하사품을 받자 이를 나누어 그 중의 절반은 소부에 간직하고, 뒤에 호가 다시 왔을 때 나머지 절반은 그에게 주었다고 한다. 또 여남에서 그가 쇠약해졌다는 말을 듣고 비단 수천 필을 모아 전예에게 줬지만 받지 않은 일도 있었다. 전예가 죽으면서 말하길 [[서문표]]와 같은 길을 걸었으니 그와 같은 곳에 있을 수 있을 것이라면서 서문표의 사당 옆에 묻을 것을 분부했다. 아들 전팽조(田彭祖)가 후사를 이었다. == [[삼국지연의|연의]] == 아주 짤막하게 등장하는데 제갈량의 북벌 때 [[손권]]이 양양을 공격하자 [[조예]]가 양양으로 파견하여 수비하게 한 게 전부다. == 평가 == 전선지휘관으로서의 능력도 훌륭했지만, 가장 두드러지는 부분은 심리전의 대가로서의 면모. 북방에 주둔하면서 이민족들의 이합집산을 교묘하게 통제시켰다. 행적을 보면 기후를 예측하는 능력이나 대기병 수레방진을 이용하는 능력도 있었던 듯. 전예는 [[조운]]과 더불어 공손찬군 출신 중에서 무사히 살아남아 성공한 사실상 둘 밖에 안되는 케이스로,[* 그리고 이 둘 다 공손찬 부하 시절에는 중용받지 못했다. 이 둘의 잠재력을 알아본 사람은 [[유비]]이다. 공손찬의 인재보는 눈이 얼마나 나쁜지, 유비의 인재 보는 눈이 얼마나 뛰어난지를 알려주는 예다.] 공손찬이 패망한 후 조조의 휘하에 들어가 적잖은 공을 세워 높은 지위에 이르렀다. 뿐만 아니라 세수 여든이 넘도록 오래 살아 그 활동 시기도 [[군웅할거]] 시대부터 [[제갈량]]의 북벌 종료에 이를 정도로 장구하다. 비록 연의에는 거의 등장하지 않아 인지도가 떨어진 탓에 이따금 [[듣보잡]]으로 여겨지기도 하지만 상술했다시피 [[정사 삼국지|실제 역사]]에서 보여준 면모들을 보면 가히 '''특급 인재'''였다 할 수 있겠다. 특히 검소/청렴함을 볼 때, 지략이 돋보이는 군재뿐만 아니라 인품까지 빠짐없는, [[지장]]과 [[덕장]]의 면모를 두루 갖춘 위나라의 뛰어난 [[명장]]이다. 이 점에서 굳이 다른 인물과 비교하자면, 오나라의 도독 라인인 [[주유(삼국지)|주유]]-[[노숙(삼국지)|노숙]]-[[여몽]]-[[육손]] (그리고 [[주연(삼국지)|주연]])과도 꿀리지 않을 정도라 볼 수 있다.[* 해당 인물들은 모두 지략/군재/인품에서 높은 평가를 받는 인물들로, (오빠들이 가장 지지할 인물들) 그중 연의에서 업적이 모조리 묻혀버렸지만, 정사에서는 뛰어난 명장이자 덕장이었던 [[주연(삼국지)|주연]]이 특히 그와 대응될 것이다.] == 미디어 믹스 == === [[코에이]] [[삼국지 시리즈]] === [[전예(삼국지 시리즈)]] 문서 참조. === [[토탈 워: 삼국]] === 삼탈워에서는 배천 공손찬 세력의 클론 선봉장 장수로 등장한다. [[Total Unique Pack]] 모드 사용 시 고유 칭호를 가지게 된다. === [[요코야마 미츠테루 삼국지]] === [[파일:전략전예.png]] 연의에서 비중이 없기에 이름만 언급되고 다른 여타 연의 관련 매체에 비하면 실루엣으로나마 등장했기에 그나마 다행이다. === [[삼국전투기]] === 연재 당시 은근히 유행했던 골든 전예 이미지를 그대로 반영했다. 금색 때문에 [[백식]]으로 등장할 때도 있다. 역경 전투 (3)편의 타이틀 컷을 차지하기도 했다. 역경 전투 편에서 처음 등장. 공손찬군에서 찬밥 신세로 살던 중 옆에 있던 조운에게 자신의 철학인 "싸우지 않고 이기는 것이 최고"를 설파하지만 묻지도 않은 내용을 시끄럽게 자꾸 나불대는 전예가 마음에 안 들었던 조운에 의해 두들겨 맞게 된다.[* 두들겨 맞는 와중에도 자기 할 말은 계속 이어가고 있었으며 심지어 표정 변화도 하나도 없었다.] 이후 조운과 공손속이 흑산적 장연에게 원군을 청하러 가게 되자 둘의 어설픈 원소군 변장을 보고 두 사람만으로는 위태위태해 보인다며 자신도 따라가기를 자청하는데, 두 사람이 관정의 배웅을 받으며 전예를 무시하고 그냥 가자 헐레벌떡 갑옷을 걸쳐입고 두 사람을 따라간다.[* 이 와중에 군복 색도 원소군의 녹색이 아닌 황금색 군복을 입고 와서 조운이 그 금색 군복은 뭐냐며 태클을 걸기도 한다.--[[서진|사실 미래에서 가져온 걸지도 모른다]]--] 이후 조운, 공손속과 함께 원소군과 선비족 연합군의 기습을 받게 되고 공손속이 사망한 뒤 싸우려는 조운을 개죽음이 될 뿐이라며 뜯어 말리고[* 물론 조운은 자기는 백만대군도 뚫을 수 있는 사람이라고 소리치지만 결국 전예가 악착같이 뜯어말린다...]같이 선비족에게 붙잡히게 된다. 전예와 조운의 선비족 포로기는 단행본으로 빠져서 본편에서는 등장하지 않는다. 팽성 전투 편에서 재등장한다. 어째서인지 선우보의 참모가 되어 있었으며, 조조가 천자를 끼고 있다는 점은 큰 메리트라며 조조의 승리를 점치고, 원소 편에서 조조 편으로 줄을 바꿔 잡을 것을 제안한다. 소패2 전투 편에서는 여전히 선비족 진영에 있는 걸로 묘사된다. 가비능과 함께 원상 기습에 동참했으며, 적이 완전히 사정권 안에 들어온 뒤 공격해야 효과를 볼 수 있다고 조언하기도 했으나 가비능이 그 정도는 자기도 안다고 쏘아붙이고, 동시에 한족의 명령 따위 들을 생각 없으니 명령하지 말라고 화를 내자 빠르게 사과하기도 했다. 가비능과 함께 원상을 공격하기 전, 조조에게 원상을 인질로 잡으라는 부탁을 받은 뒤 이건 너무 무리한 부탁인 거 아니냐는 선우보에게 어차피 이쪽이 원상을 잡고 말고가 중요한 일은 아닌 것 같으니 계속 공격하는 척만 해도 될 것 같다며 안심시키기도 했다. 한중 전투 편에서는 조창과 함께 오환 토벌 임무를 맡았다. 집결지에 도착과 동시에 적의 기습을 받아서 크게 당할 위기에 놓였으나, 전예가 기지를 발휘하여 짐수레를 엄폐물로 사용한다는 발상을 해낸 덕분에 기습을 성공적으로 막아낸 것으로 묘사된다. 성산 전투 편에서 재등장. 변방에서 견초와 함께 이민족을 막았고, 견초 사후에도 골진을 잡는 등 여러 활약을 하다가 이 일이 쉬워보였는지 자리를 차지하려는 [[왕웅]]의 모함으로 전임되어 여남태수가 되었다. 말이 좌천이지 전예 본인도 언급했듯 변방에서 중앙으로 보직이 이동된 거라 오히려 자기에게 좋은 거 아니냐고 의아해하기도 했다.[* 재밌는 점은 전예를 모함하고 오한교위를 차지한 왕웅은 정말로 쉽다며 오히려 전예보다 북방을 잘 통치한데다 [[가비능]]까지 처치하는 공을 세웠다. 이 때문인지 왕웅은 [[밥 로스]]로 패러디 되었다.] 여남태수가 되고 요동 토벌을 명받지만 급조된 수군으로는 요동을 공략하기 어렵다며 싸우는 척만 하겠다고 장제에게 제안했다. 장제가 그런 기만이 상부에 통하리라고 생각하냐고 묻자 전공은 만들어 오겠다고 했고, 장제가 말이 모순되어 있지 않냐고 화를 내자 설명하기 힘들다고 말하며 자기가 모든 책임을 질 테니 믿어만 달라고 했다. 이후 청주에 도착한 전예는 해안선을 둘러보고 요소요소마다 대놓고 보이게끔 병력을 배치한 뒤 성산으로 가서 놀자판을 벌인다(...) 이 꼴을 보다못한 청주자사 정희가 항의하지만 적당히 흘려넘겨서 정희가 뒷목을 잡게 만들기도 했다. 그러나 오의 사신인 주하가 요동에서 오로 돌아가던 중 풍랑에 의해 임시로 정박할 장소를 찾을 때, 전예가 사전에 배치해 둔 진영 덕분에 주하는 정박할 장소를 찾지 못해서 해안선을 따라 흘러가게 되었고, 팍 꺾어지는 지형인 성산에서 결국 줄줄이 난파당하게 되었으며, 성산에 있던 전예는 간단히 이들을 사로잡고 수많은 무기와 물자들을 노획했다. 한편 이 때 노획한 보물들을 병사들에게 나눠준 걸 청주자사 정희가 상부에 찔러서 성산에서의 전공은 무효화되었지만, 전예는 뭐 그리 세상을 빡빡하게 사냐고 별거 아니라는 듯 흘려넘겼다. 오장원 전투 편에서는 손권이 합비신성을 공략하자 신성 공략군의 배후를 치려는 만총에게 그것은 상대도 예상하는 바일 것이라며 신성 공략군의 배후를 공격하는 것을 반대했다. 만총이 지원이 없으면 신성의 병력만으로 오군을 감당해야 한다며 주저하자 신성은 병력이 떨어지지만 지리적으로 방어가 용이하기에 쉽게 무너지진 않을 거라며 만총을 설득했다. 이후 유수구에 합비성을 노리고 있는 오의 예비 병력들이 남아있다는 정보를 얻어오며 전예의 예측이 맞았다는 게 드러났지만, 신성의 상황이 점점 힘들어지는데도 지원을 갈 수가 없어 딱히 상황이 크게 나아지진 않았다. 전예는 중앙에서 지원을 받을 순 없겠냐고 물었지만 만총은 이미 지원을 요청했음에도 촉의 공격도 있어 쉽게 움직이기 어려운 모양이라고 답했다. 다만 이후 조예가 지원군을 이끌고 합비로 친정을 오면서 상황이 종료됐다. 이후 한동안 등장이 없다가 신성 전투 편에서 사망처리됐다. 그는 명예와 권력에 관심이 없어 추레하게 살았다고 언급되었으며, 동시에 세속의 스트레스가 없어 장수한 게 아닐까 하는 작가의 추측도 나레이션으로 지나갔다. [[최훈]]의 빠심이 드러나는 전형적인 인재. 손자가 가장 칭찬했을 스타일의 장수라는게 작가의 평.[[http://comic.naver.com/webtoon/detail.nhn?titleId=22027&no=308|#]] 상단에 쓰여 있듯 싸움을 않고 이기는 것을 최고라고 여긴다. 이유는 아군의 피해가 없으니까. 전예는 이에 덧붙여 공적이 드러나지는 않겠지만 그건 중요한게 아니며, 후세에는 반드시 누군가 알아줄 것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각주] [[분류:조위의 인물]][[분류:171년 출생]][[분류:252년 사망]][[분류:톈진시 출신 인물]] [include(틀:포크됨2, title=전예, d=2023-01-18 04:16:38)]